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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견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롬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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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견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바울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았음을 증거함으로써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법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입었으면 자랑 할 것이 있겠지만 그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고 합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바울은 일한 자가 그 삯을 받을 때에는 은혜가 되지 않지만 일한 것이 없는 자가 그 삯을 받는 것은 은혜임을 비유로 들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은혜에 대하여 (시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러한 복 있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그중에서 하나님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고 의인으로 여기시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이르는 구원의 복입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임을 강조함으로써 믿음의 법이 율법보다 앞선 것임을 증거합니다. 
유대인은 할례를 받음이 곧 구원의 징표라고 생각하여 무할례자들에 대하여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은 할례는 믿음을 인친 징표일 뿐 그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인 논증을 통하여 교훈합니다. 이는 또한 아브라함이 할례자들의 조상이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됨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은 모든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초로 할례 받은 아브라함입니다

(창 17:26)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창 17: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열국의 아비로 부름받습니다

(느 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느 9: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힙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예하는 자들이 율법으로 인하여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은 구원에 이르는 내용이었는데, 아브라함이 이 언약을 받은 시기는 율법을 받기 전이었으므로 언약이 율법을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언약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이방 성도들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믿음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의 언약에 참예하게 됨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이 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바울은 아브라함이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됨을 강조합니다.(롬4:16)

믿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에 동참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시어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에 참예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의 성도로 믿음으로 견고하여 영광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영광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 입니까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하나님은 하란에 거하는 아브라함을 불러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창 12:1)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8절).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사회 형태가 공동생활을 해야 했던 부족 사회, 혹은 유목민 사회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했으며, 얼마나 결단력 있게 행동했는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약속으로 주시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 속에서 이미 가나안을 자기 장래의 기업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던 갈대아 우르는 당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땅을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을 자신의 기업으로 바라보았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게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히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도성으로 삼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이 기업으로 받을 영적 가나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약속하신 기업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왔지만 하나님은 그가 하신 약속을 당장 실현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이방인과 같았고, 화려한 집이나 도성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히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그는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당하는 고난을 인내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놀라운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여러 모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나라입니다. 풍차와 튤립 그리고 암스텔담 같은 유명한 도시에서의 유람 등은 네덜란드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정규 코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그 관광은 말짱 헛되다 합니다. 3층으로 된 그 집 꼭대기에 올라가면 책장이 있는데 그것을 살짝 옆으로 밀면 비밀 통로가 나타난다합니다. 그 통로 아래로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 바로 게슈타포를 피해서 유대인 가족이 숨어 있던 곳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13살의 어린 소녀 안네는 일기를 썼다합니다. 안네의 일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합니다. '우리의 세계가 어둠의 세력에 점점 포위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공포와 죽음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공포와 학살과 죽음과 전재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을 바라본다. 우리에게는 이 하나님 나라가 바로 평화의 원인이다. 우리는 이 희망 때문에 이 작은 공간에서도 천국을 경험한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포와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그 좁은 공간에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할 것입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고 앞일을 예측 할 수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견고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언약을 받을 때에 자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3: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언약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고 백 세가 되기까지 자손이 없었음에도 약속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써 이삭을 낳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교훈하여 줍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 4:19)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롬 4:21)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진 사실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창 21: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1: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 21: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당시 사라는 이미 늙었고 단산 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사라는 약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만드시고 불가능에서 가능을 창출하시는 하나님 바랄 수 없는 가운데 약속바를 이루시니 믿음으로 견고하여 영광 돌려야 합니다. 


부활 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히 11: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러한 믿음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데서도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하여 자손을 번창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언약을 믿었기에 자신이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처럼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신앙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었고,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고 또한 죄인을 의롭다 함을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기독 신앙의 핵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체험하였듯이 성도도 부활 신앙으로 마지막 날 다시 사는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소유하여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아니할 때 믿을 수 있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메디 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죽음은 업숙합니다. 좌절과 슬픔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주님만 해결합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좌절과 어두움과 절망으로 몰아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을 치유하시며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죽음의 극복은 불로초를 먹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죽은 회당장의 딸을 향해 달리다굼 곧 소녀야 일어나라 명하시어 살리신 주님 나인성에서 상여에 실려 나가는 과부의 외아들을 향해 청년아 일어나라 명하시어 살리신 주님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무덤문을 열라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하시어 살리신 주님 무덤에 지낸바 되시었다가 사망을 삼키고 살아나신 주님 살리는 영이 되시어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영광 돌리되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부활의 신앙으로 놀라운 은혜의 복을 체험하였던 아브라함이 처럼 믿음으로 견고 하여 사명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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