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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처럼 돌보시는 주님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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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처럼 돌보시는 주님 (시 23:1-6)


시작하는 말 

부활절 네 번째 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목자로써 인도하심을 느끼고 감사하는 예배이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설교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은혜와 감동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몸의 귀가 하는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소리는 일종의 공기의 진동이라고 합니다. 우리 귀가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공기 진동이 고막에 닿으면 미세한 떨림이 생겨 이것이 우리 몸에서 가장 작은 뼈인 ‘이소골’ 로 전달된다고 합니다. 톱니처럼 맞물린 3개의 이소골 진동은 달팽이관 속의 림프액으로 전달되고, 3만여 개의 청신경 세포는 이를 뇌로 전해 40만 가지의 소리 정보를 인지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 어느 하나라도 제 기능을 못하면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귀가 하는 역할은 듣는 것 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기능이 더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위치감각, 평형감각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귀의 속 부분에 있는 세반고리관 혹은 달팽이관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우리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은 몸의 균형을 잃게 되고, 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구토 증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교인 중에도 그게 문제가 생겨서 병원에 입원하신 분도 몇 분 계셨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동차도 네 바퀴가 달려 있으니까 그저 달리는 것 같지만  특별히 양쪽 바퀴 축의 각도가 정확하게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고속 주행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자동차들은 정기적으로 휠 밸런스(wheel balance)를 컴퓨터를 통해서 정확하게 잡아 주어야 잘 달립니다. 이러한 균형은 사람이나 자동차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건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집을 지을 때 다림줄을 띄우기도 하고, 높이와 기울기를 잘 측정하여 균형을 맞추어가면서 건물을 세웁니다. 균형이 맞지 않는 건물은 오래 갈 수도 없고, 결국에는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균형은 평화를 만들어 주는 가장 소중한 요소입니다. ‘균형’ 이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조화’ 라는 말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고, 다른 것과 균형을 이룰 때 그것을 우리는 조화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가장 완벽한 조화의 개념을 우리는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 느끼게 됩니다. 서로 다른 음들이 조화롭게 연결되고 마음을 감동케하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러나 조화를 깨뜨리는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게 되면 평화는 깨지고, 불쾌감이 자리잡게 됩니다. 
  
성경은 개인 뿐 아니라 교회론을 피력할 때도 끊임없이 “세우고 건축한다.” 는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합니다.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이 교회가 세워졌으니…….” “성전은 지어져 가느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등의 표현은 우리의 교회가 완성된 것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지어져 가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할 때 공동체는 계속해서 지어져 가는 특징을 가집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워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관심을 갖고 세워 가느냐에 따라 교회의 모습은 결정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도 균형 있게 세울 때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협화음을 낼 때, 교회는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개인의 삶이나, 우리 공동체 교회가 목자처럼 돌보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조화롭게 세워져가고 성숙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몸  말 

부활절 제 4주인 이 주일은 ‘선한 목자 주일’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주일의 교회력에 사용되는 성경 본문으로 항상 요한복음 10장과 시편 23편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시편 23편이 설교의 본문이 되었습니다. 시편 23편은 잘 알려져 있는, 우리 모두가 거의 대부분 알고 암송하는 말씀인데,  시편 23편을 읽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언덕에 풀을 뜯고 있는 양들과 멀찍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목자를 그리는 목가적인 장면을 연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볼 수 없지만 뉴질랜드나, 호주를 방문하면 쉽게 볼 수 있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을 곰곰이 읽어보면, 시편 23편 분위기는 반드시 목가적이지만은 않고, 평화롭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전투하는 분위기’ 입니다.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사망의 골짜기에 그들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넘어뜨리려는 원수의 궤계가 있으며, 죽음의 그림자로 덮여 있는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시편 23편에 숨어있는 분위기입니다. 외적 환경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가면서 평화를 만들고, 균형을 이루며 그것을 지키며 세워 나가는 그런 삶의 현장을 우리가 느낄수 있는 것이 시편 23편의 분위기입니다. 

평화라는 말의 히브리어가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압니다. 샬롬 평화라고 하는 이 단어는 관계성 속에서 나오는 말이며 존재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삶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 어떤 존재로 서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샬롬 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돈이 많이 있고 아파트 평수가 크다고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부부관계가 바르게 되어 있고 자녀관계가 바로 되어 있을 때 평화가 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을 때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은 목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해될 말씀이 아니고 관계성 속에서, 그리고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잘 아시는대로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신앙고백 속에 드러나는 것은 주체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영어 성경은 이것을 선명히 나타내 주고 있는데, 사용하는 주어를 보면 “He, He, He…….” 가 계속됩니다. 그분이 주체이시며 모든 결정권은 그분이 가지고 계십니다.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그분이십니다. 서게 하시고, 거하게 하시고, 가게 하시는 분도 그분이십니다. 그분이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것이 주관이 되고, 그 생각들이 모아져 인생관이 되고 세계관이 됩니다. 그러한 생각을 통해 인생이라는 결정체가 나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 자신의 설계도를 가지고 나옵니다. 자기 자신의 설계도를 따라 교회는 이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각자의 설계도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설계도만 강하게 주장하는 그 곳에서는 주님의 교회는 혼란스럽고, 균형을 잃고 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러한 소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생각, 어떤 설계도를 주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의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설계도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리고 주님의 설계도를 따를 때 교회는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삶을 살면서 내가 내 인생의 주체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이다 그렇게 말해도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계획 속에서 되는 대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의 주체를 발견하는 모습, 내 삶의 주체를 다시 발견하고 그 주체 되시는 분의 뜻을 따라 삶을 살기로 결정 하는 때가 신앙생활의 출발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정체성이 객체로서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분이 인도하시고, 그분이 보호하십니다. 그분이 주체가 되셔서 인도하십니다. 그분이 그 하나님이 결코 객체가 될 수 없고, 객체도 아니신 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 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객체인 것 처럼 다시 말하면 내 결정을, 내 생각을 세워놓고, 변할 수 없는 내 고집을 세워놓고 기도 한답시고 하나님은 내 생각과 내 고집을 그저 도우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마치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그분을 주체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주체 이고 그 분이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삶의 주체란 말입니다. 그분을 주체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 , 여러분 그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요 주체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분을 나의 삶의 주체로 고백하는 경우에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여호와는 나의 목자입니다. I Have Everything I need. 내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하면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준비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이렇게 목자처럼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이시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고백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 말씀은 목자 되시는 주님을 고백할 뿐 아니라, 첫 번째는 그가 나의 목자이시오 주인이시오 주체이시오 영원한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를 따라 사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인간이 양을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양에게는 날카로운 뿔도, 발톱도, 이빨도 없습니다. 어떤 맹수와 같이 힘차게 달리지도 못합니다. 양은 털이 계속 자라기 때문에 누군가 털을 깎아 주고 돌봐 주지 않으면 도무지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지독한 근시안이어서 불과 몇 미터 앞도 못 보는 그런 동물입니다. 

그러기에 무리를 지어서 삽니다. 목자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뛰노는 푸른 초장이, 맑은 시냇물가가 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되는 것이 양들의 세계입니다. 아니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들도 한치 앞을 보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1분 후의 일을 알 수만 있다면 재난이 올 때 피해갈 수 있으련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많은 것을 발명하고 엄청난 문명의 이기(..器)들을 만들어 낸 것도 인간이지만 자기 눈 바로 위에 있는 눈썹도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도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분의 손길 아래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시편 95편 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6-7절). 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양으로 산다는 것은 그의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을 말합니다. 내 멋대로, 내 기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께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기대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의 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이런 태도가 교회 속에 강하게 형성되면 그 곳에 주님의 역사는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것의 주권을 쥐고 계시는 ‘우리의 주님’ 으로 모시고, 우리들이 그분의 양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분위기를 가진 교회 속에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교회는 금년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재 하였던 초대 교회는 바로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인이시오 주체이심을 고백하며 의지하며 맡기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런 분위기임을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을 때, 그리고 이런 모양으로 마음이 하나 되게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신비한 역사, 부흥의 역사, 치료의 역사, 주께 돌아오는 역사, 주의 권능이 드러나는 역사는 그 구성원들의 능력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위기가 이루어졌을 때에 그 교회 속에 담아 주시는 은혜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심으로, 그의 음성을 계속 우리가 들을 수 있을  때 온전히 우리가 목자의 뜻을 따를 수 있고 그리고 목자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서는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10:27)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는 데 실패한다면 이 속에 있어야 할 균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 음성을 듣고 뒤따라가는 양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이기를 축원합니다. 그러 할 때 약속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즐기는 것이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몇 번 말씀드린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 개화기에 시골의 한 청년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선교사의 눈에 든 이 청년을 미국에 보내어 신학을 공부시켜 목사로 만들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야 할 그 시절, 한 달이 넘게 가야했습니다. 선교사가 그 청년에게 많은 돈을 준 배표를 쥐어 주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청년은 때가 되면 집에서 준비해간 미숫가루에 물을 타서 먹고 끼니를 때웠습니다. 몇 주가 지나자 가지고 간 음식들이 동이 나고 배는 고파 견딜 수 없었습니다. 때마다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에 견딜 수 없어 높이 갑판에 올라가 물을 마시고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옆에 있던 미국인이 당신은 왜 식사 시간에 갑판으로 가느냐. 식사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이 대답하기를 나는 가진 돈이 없어 음식을 사먹을 수가 없어 참고 견디노라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미국인이 깜짝 놀라고 깔깔 웃으며 말하기를 당신은 배표를 가지고 있지 않으냐고? 그 배 삯에 이미 모든 음식 값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몰랐습니다. 정말 창피할 정도로 바보였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 식당에 갔더니 너무 너무 맛있는 음식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글쎄 그걸 몰라서 지금까지 음식이 잔뜩 준비되어있는데도 배를 곯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신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풍성한 것을 준비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때때로 그것을 믿지 못하여 쪼록 쪼록 날마다 배를 곯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혹시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인간이 이룬 풍요만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풍요를 맛보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풍요를 믿고 아는 성도들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그것이 우리의 것,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풍요함을 알고 믿고,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풍요에 대해 오늘의 시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표현합니다. 메마른 광야와 같은 중동 땅에서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는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푸른 초장에 뛰놀면서 그분이 마련해 주신 신령한 양식들, 그것들을 마음껏 먹고 편히 쉴 수 있는 것으로 오늘 시편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란 이러한 풍요로운 영의 양식이 넘쳐나는 푸른 초장이어야 합니다. 

삶의 분주함에서 오는 피곤함과 수많은 아픔들로 지친 사람들이 이 곳에 와서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으며, 새 힘을 얻으며,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목자 되시는 주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돌아가는 그런 교회이기를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풍성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주님을 통해 그러한 부요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해서 풍성함이 경험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통하여 목자 되신 주님이 주시는 풍성함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시편 23편의 저자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생각하며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부족함이 없다는 만족은 안일함이나 다른 사람보다 많이 소유해서가 아닙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푸른 풀밭과 잔잔한 시냇가와 같이 안전과 만족을 주심은 누워 쉬라는 것도, 자연을 즐기라는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소생시키시는 것도 단순히 그의 능력을 자랑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삶이 의로운 길로 걸어가는 삶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도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신 부도, 오늘 여러분에게 주신 건강도, 오늘 여러분에게 주신 행복한 가정도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교회도 그저 우리가 편안히 먹고 누워서 쉬기만 하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옳고 바른 의의 길로 가도록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푸른 초장’ 이라는 이 시의 처음구절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둘은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야만 생명의 초장과 물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편안하게 비행기 태워서 푸른 풀밭과 잔잔한 냇가와 같은 안전지대로 옮겨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곳으로 들어가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쉰이 넘으신 분 쯤 되면, 우리는 모두 어릴 때 ‘너의 꿈이 뭐니?’라고 물으면 ‘대통령이요’ ‘장군이요’, ‘에디슨 같은 훌륭한 발명가요’라고 대답했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의 어린아이들의 꿈은 주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이러한 꿈들이 어려움 없이,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인생에는 고난 없는 승리란 있을 수 없으며. 아픔이 없는 행복이란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초대교회의 시대보다 예배하기 쉽고, 기도하기 쉽고, 신앙생활 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참된 예배와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할 때, 결코 쉬웠던 적이 없습니다. 또 다른 장애와 박해는 우리의 삶에 어느 때나 있는 것입니다. 생활도 사업도 직장도 더 편하고 쉬웠던 때는 없습니다. 참된 승리와 의의 길은 언제나 시련을 이김으로 얻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련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이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시는 분이 목자 처럼 돌보시는 그 도움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는 ‘워렌 버핏’ 에게 어느날 딸이 와서는 돈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워렌 버핏은 그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아버지한테 와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하니? 돈을 빌릴 곳은 아버지가 아니라 은행이니라’ 했다는 것입니다. 투자자인 워렌 버핏의 눈에는 은행에 쌓여 있는 무궁한 돈이 자신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돈으로 보였고, 실제로 그는 은행의 돈을 이용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심은 무한한 능력의 근원에 우리가 줄을 대고 뿌리를 박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능력이신 주님께서 우리가 고난과 시련에 맞서 이겨 나갈 수 있게 목자처럼 돌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믿으시고 그렇게 고백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에게도 우리에게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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