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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단과 사울 (삼상 13:15-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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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과 사울 (삼상 13:15-14:52)
 
 
13장이 사울의 불순종을 다루었다면, 14장은 사울의 집착을 보여줍니다. 요나단 이야기는 사울이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음을 생각하게 하지요.

사무엘이 길갈을 떠난 후 사울에게는 “육백 명 가량”(13:15)의 백성만 있었습니다. 상비군 3천 명 중에 20%만 남았지요. 게다가 당시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19) 싸우려고 남아 있는 백성조차 “칼과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22) 있었지요. 승리하려면 적을 압도할 만큼 숫자가 많든지 무기가 우수하든지 해야 하는데, 숫자도 무기도 블레셋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요나단은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15:6)

이 말을 통해 요나단의 생각을 하나씩 분석해봅시다. 먼저 요나단은 블레셋을 “할례 없는 자들”이라 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징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관계를 표시하지요. 이 관계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는 왕께 보호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행동 이면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적군이 3대로 나뉘어서 공격해오고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에 많은 백성이 두려워하며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 없는 세상의 도전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를 생각한 것입니다.

만일 백성들이 믿음이 충만한 상태라면 합심해서 공격을 막아내면 되지요. 하지만 백성들은 믿음이 없어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사무엘마저 떠나 버리자 싸우려는 의욕조차 사라지고 있었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불신은 확산되고 두려움은 커질 것입니다. 백성과 함께 망하기를 기다리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뭔가 백성들의 믿음을 고취 시킬 수 있는 불씨가 필요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담대하게 싸우도록 고무시킬 돌파구가 필요했지요. 이러한 그의 고민을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말 속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신다는 사실을 “할례”의 언약에 근거해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하실까 하노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심하는 말이 될 수 없지요.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때에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음을 인정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식으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다고 맹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지요. 이점에서 언약궤를 가져오기만 하면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그리고 제사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줄로 생각했던 사울의 신앙과 다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어차피 죽을 목숨 조금 더 일찍 죽는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징계하시려고 블레셋의 손에 붙이시는 전투가 아님을 분명히 알았지요(참조. 9:16). 그러므로 요나단은 전혀 희망 둘 수 없는 상황에서 구원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승리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분명히 살 길이 있음을 믿었지요. 그의 용맹스러움은 조국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희생적인 각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뜻을 분변하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곤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도 요나단과 같은 순서를 밟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두신 큰 뜻을 분별합니다. 둘째로 지금 이 자리까지 인도해 오신 목적을 생각합니다. 셋째로 현재 처해있는 처지를 분석합니다. 넷째로 그 속에서 내가 가진 은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이 경우는 사울과 요나단만 칼(은사)을 가졌지요.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행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할 때 근거도 없이 무작정 믿는 맹신과 구별됩니다. 신비한 체험들을 바라는 미신과도 구별되지요. 요나단은 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여호와께서 일하셔야만 해결될 수 있는 판단 속에서 스스로 특공대가 됩니다. 

관념적인 신앙도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려고만 할뿐 적극적으로 공격하거나 적극적으로 수비하지 않습니다. 두려워 떨면서 막연히 어떻게 해결되기만을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든지(눅 11:9), 혹은 잠잠히 참고 인내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지요(시 37:7). 그 마음을 살펴보면 상황 때문에 믿음을 잃고 포기한 채 오늘 망할지 내일 망할지 불안해하고 염려하며 떨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나단의 행동은 그의 믿음이 관념적이지 않고 살아있는 실제적인 믿음이었음을 확인해줍니다.

본문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대조됩니다. 사울은 600명 남짓 백성과 한 자루 칼로는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단 한명의 병사와 한 자루의 칼만으로도 승리를 이끌어 내었지요. 요나단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고취시킬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숫자’란 거부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나이도, 자산도, 규모도, 성적도 모두 숫자로 환산할 수 있지요. 이러한 숫자 때문에 믿음이 위축되는 정신은 오늘날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말 하면서도, 실제로는 숫자 때문에 울고 웃지요.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살아 있는지 살펴 볼 일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올라오라”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을 뜻하는 “표징”으로 삼겠다고 합니다(10). 꼭 그것이 표징이 될 까닭은 없지만, 기다릴지 먼저 공격할지를 정할 기준으로 삼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요나단이 좀 더 승리의 확신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12). 그래서 “반일경 지단” 곧 소 한 쌍이 반나절에 밭갈 수 있는 정도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도륙한 자가 “이십 인 가량”되었습니다(14). 숫자로 보면 아주 미미한 승리였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 역사하기 시작하셨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은 당황하고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지요.

15절을 직역하면 “들판의 그 진영 안에 떨림이 있었다. 그 요새의 모든 백성들과 노략꾼들 또한 떨었다. 그리고 그 땅이 흔들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떨림이 있었다”입니다. 블레셋은 언약궤 때문에 심히 고통 받았던 기억과 미스바에서 사무엘에게 패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기 시작하셨다는 징조는 그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허다한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이리저리 흩어”졌고(16), 당황한 나머지 “블레셋 사람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크게 혼란”했습니다(20). 블레셋 편에 가담했던 “히브리 사람”과 “숨었던 모든 사람”도 돌이켜 “이스라엘 사람”과 합세하여 싸웠습니다(21-22).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23). ‘이제는 희망이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절망적인 그 순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로 바뀌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수히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신 20:1). 하나님의 백성이 이 하나님을 믿고 싸우고 있는 한 결코 세상의 세력에 압도되어 망해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곤란 중에 있던 백성이 승리를 만끽한 날에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게 만듭니다. 대적 앞에서는 떨던 그가 백성 앞에서는 담대합니다. “백성에게 맹세시켜” 아무것도 먹지 못하도록 “저주”까지 걸었지요.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기 위함이라 했는데, 이 말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싸우기보다는 개인의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24).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 백성을 지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승리를 통해 왕의 권위를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이 일에 집착했기 때문에 그는 점점 더 무리한 수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악령에 사로잡히고, 죽기 전날에는 영매를 찾기까지 하지요.

본문에서부터 사울은 요나단의 말처럼 “이 땅으로 곤란케”(29)하는 자가 되어갑니다. 허기진 백성은 “고기를 피 채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게 되었는데(33),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도록 도와야 할 자가 오히려 무리한 명령을 내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도록 만든 셈이지요. 그가 아들 요나단을 죽이려 했던 사건도(36-44), 자신의 승리와 권위를 유지하는 일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날에 어떻게 행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성이 요나단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었음을 생각하고서 요나단을 구해내지요(45).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을 자신이 제공했음을 통감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사울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보다 자신의 승리와 권위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이 일 역시 죄로 여기지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지요. 따라서 15장에서 다시금 결정적인 불순종을 반복하고 맙니다. 14장 마지막 부분(47-52)은 이것으로 사울의 생애가 끝난 것처럼 정리합니다. 사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수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불순종과 집착을 반복하다가 결국 버려지게 되지요. 

본문은 하나님 백성에게는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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