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의 영광(4) (마 28:1-8)

  • 잡초 잡초
  • 283
  • 0

첨부 1


그리스도의 영광(4) (마 28:1-8)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 태어나셨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에는 연약한 생명으로 태어나셨다. 둘째로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태어나실 때에는 하늘의 영광 속에서 하나님의 보좌에서 태어나셨다."고 앤드류 머래이(Andrew Murray)는 말했습니다. 

Ⅰ.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의 영광 입니다. 

본문 28장 6절에 『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고 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주일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무덤을 맨 처음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마리아들과 그곳에 갔습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었다고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수직하던 자들이 무서워 떨면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때 그 천사가 여자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호위병들이 무덤을 지켰으나 그것은 헛된 일이었습니다. 여인들은 돌아가서 자기들이 본 것을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무덤으로 뛰어갔습니다. 

요한복음 20장 5-8절에 『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과 그 안에 개켜져 있는 수의를 발견한 뒤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부활하신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마리아는 예수님인줄 몰랐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알려주면 내가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제야 자기와 말씀하시는 이가 예수신줄 알고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야!" "선생님!" 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사랑스러운 대화였을 것입니다. 
이때 본문 28장 10절에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큰 충격에 못이겨 주체할 수 없이 심신이 나약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5-27절에 『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날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11km 가량 떨어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의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 슬픈 표정을 짓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더디 믿는 것을 질책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구약에서 말하는 그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평소에 가르쳤지만 그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엠마오 지경에 들어가서 식탁에 앉아 떡을 떼는 순간 비로소 눈이 열려 눈앞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0-32절에 『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라고 했습니다. 

2) 도마의 신앙고백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4-25절에 『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도마는 단지 제자들의 증거만 가지고서 부활을 믿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한결같은 증언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도마는 좀더 확고한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 봐야만 부활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요구한 경험적 증명을 얻긴 했지만 그렇게 할 때 여드레나 허비해야만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더 나타나시지 않은 채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도마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마침내 도마의 의심이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27절에 『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자기 손을 만져 보고 옆구리에 난 상처를 확인해 보라고 제안하셨지만 도마가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아마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때 『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라고 한 도마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에 관한 신약성경 기록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고백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도마가 고백한 이 성경구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한 도마를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 20:29)고 하셨습니다. 

Ⅱ. 그리스도의 승천(Ascension)에 나타난 영광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에 『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0-51절에 『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라고 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을 지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일을 기념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의 생애 가운데 중요한 사건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는 것이 헛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의 죽음은 생각할 수 없듯이 승천이 없는 부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승천이 없다면 재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시대를 열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5-7절에 『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승천은 가시적 승천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9절에 『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에 『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승천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에 『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4) 그리스도의 승천은 다시 오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8절에 『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평안이라는 선물을 남겼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일'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미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에녹과 엘리야가 승천한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승천하셨습니다. 『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3).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를 하시면서 자신의 독특한 승천을 암시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늘로 올라갔지만 예수님의 승천이 지니는 특별한 의미로 승천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님만 그런 특별한 의미로 승천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여기서 승천이란 단어는 단지 '올라간다'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가 깊습니다. 구체적으로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특수한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주 전체에 권위를 떨치는 곳에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절대주권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 11-14절에 『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왕직만 맡으신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직도 맡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16절에 『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칼빈이 살았던 제네바는 사생활을 간섭할 수 있는 여러 법률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치금지법(Sumptuary law)입니다. 흔히 소비억제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안은 1558년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안은 대부분 칼빈이 만든 법안입니다. 화려한 장식의 결혼식, 그리고 여인들의 분에 넘치는 머리모양과 몸치장을 규제했습니다. 심지어 연회의 경우 세 코스 이상, 또한 매 코스마다 네 접시 이상 되지 않도록 규제했습니다. 
소비억제법은 6년 후인 1564년 6월 8일 새로운 포고령으로 통과되었습니다. 그 목적은 절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부와 가난은 상호보완적 기능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지지 않고 부요한 자들은 더 부요한 자가 되지 않게 가르쳤습니다. 칼빈은 가진 소유의 재분배를 역설했습니다. 칼빈은 더 많은 소유는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한 도구라고 했습니다.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인정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는 소위 경제적 지원과 보호가 필요한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자들과 고아와 과부, 병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제네바시의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칼빈은 경제적 혼란과 도덕적 무질서를 막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칼빈은 재산의 불공평한 분배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선의, 즉 누가 선한 일을 하는가를 살피는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얼마간의 동정심만으로는 재산의 재분배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칼빈은 가진 자들의 신앙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스러운 부활 신앙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부활 신앙은 현세보다 내세가 아니라 현세와 내세를 통시적으로 보는 혜안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절대와 상대 개념에 충실합니다. 

교회 생활은 절대이고 세상의 일은 상대적이라고 할 때 절대는 가치 있고 상대는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절대와 상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법과 철학입니다. 
교회보다 세상이 크게 보이는 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만난 재앙입니다. 교회와 세상은 절대와 상대적 개념으로 수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등식화시킬 때, 절대적 개념과 상대적 개념에 충실해야 교만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한번 걸려든 그리스도인들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세상에 익숙하게 해버립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탄의 전략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길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마침내 마지막 날에 슬피울며 이를 갈게 합니다. 세상으로 기울어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복원력은 내세 신앙, 즉 부활 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샤머니즘이나 기복 신앙은 내세 신앙이 없습니다. 
부활 승천 신앙은 나의 눈을 밝게 합니다. 부활 승천 신앙은 나의 귀를 밝게 합니다. 부활 승천 신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부활 승천 신앙을 전파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