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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림과 죽임의 경계선에서...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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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과 죽임의 경계선에서... (요 8:1-11)


1.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인생- 봄꽃을 보며

봄이 되면 어김없이 봄꽃들이 피어납니다. 같은 벚꽃이라도 좀 일찍 피는 꽃도 있고 좀 늦게 피는 꽃도 있습니다. 같은 동네지만, 시민운동장 안에 있는 벚나무들은 4월 초에 꽃이 만개하였고, 상리공원의 벚나무는 중순에 만개하였습니다. 어떤 꽃은 좀 생명이 길기도 하지만, 목련같은 꽃은 만개하여 ‘아, 아름답다’ 탄성을 지르고 며칠 지나면 곧 떨어져버립니다. 그렇게 아름답던 꽃들도 떨어지면, 청소부들을 귀찮게 하는 쓰레기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떨어져야 합니다. 다음 해에 새로운 꽃, 더 화사한 꽃을 피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도 그러합니다. 좀 일찍 성공하는 사람이 있고, 대기만성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의 아름다움을 좀 오래 누리는 사람도 있고, 반짝 누리다가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뭇 사람들의 탄성과 부러움을 사는 아름다움의 절정,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곧 아래로 내려옵니다. 추한 모습, 사람들에게 귀찮게 여겨지는 존재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로 추락했다고 영원히 추락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꽃 피울 때가 옵니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화사한 꽃을 피울 때가 옵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상승하고 있다고 교만하지 말 것이며, 하강하고 있다고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상승하고 있을 때 겸손하고, 하강하고 있을 때 소망을 갖는 것,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2. 예수님을 만나면 살 수 있다 - 사람을 살리도록 하자

오늘 우리는 인생 막장으로 추락한 한 여인을 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히면 간음한 남자와 여자 둘 다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왔으니, 이제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공개 처형을 당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살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법에 의하면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살려주십니다. 간음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죽음을 면하고 살아났습니다. 추락하는 인생에게 예수님은 날개를 달아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여인처럼 죽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는 죄값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날개가 생겼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살림과 죽임의 경계선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세상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한 부류는, 무슨 잘못을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살려야 한다 라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그런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 율법에 의하면 죽어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들의 손에는 돌이 하나씩 들려져 있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좀 이상합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더 잘 압니다. 서기관은 성경학자들입니다. 바리새인도 율법을 잘 알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판단하면 될 일인데 굳이 예수님께 데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6절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악질들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이 여인을 이용한 것입니다. 율법대로 죽이라고 하면, 자비가 없다고 말할 것이고, 살려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겼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올무에 걸리도록 만들어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에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죽이려고 돌을 하나씩 들고 왔습니다. 

제가 작년에 어느 모임에 참석하러 가다가 시간에 쫓겨서 서대구 공단쪽에서 신천대로를 타려고 가는데, 차들이 많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제일 끝 차선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차선으로 차를 몰고 신천대로 쪽으로 올리려고 하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 차선이 왜 조용하나 했더니 그 차선은 우회전하여 공단으로 들어가는 차선이었습니다. 차선위반인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초행길이어서 그랬습니다.” 라고 했더니 경찰이 벌금 스티커를 끊지 않고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경고장을 끊어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맙든지.... 
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용서가 필요합니다. 

4. 연약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 여인이 왜 간음하게 되었는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가난하여서 매춘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외로워서 남의 남자를 사랑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연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주님은 여인의 연약함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렇게 했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병원에 가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의사의 말 한 마디에 힘이 생기기도 하고 의욕이 상실되기도 합니다. 이런 환자의 약한 마음을 잘 아는 의사는 죽을 병에 걸렸더라도 일단 환자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줍니다. “괜찮습니다. 회복될 것입니다.” 
의사는 환자의 입장에 서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연약한 사람, 실수 많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살리려고 합니다. 

해피데이는 사람을 살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살리는 일,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그들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5. 모두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 글을 쓰셨습니다. 무슨 글을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어느 학자는 아마 인간들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땅에 쓰셨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땅에 글을 쓰면서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벌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그랬더니 손에 돌을 하나씩 들고 살기등등하여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왔던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씩 하나씩 모두 흩어집니다.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겉보기에 착하고 고상해보여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 비슷합니다. 

욕심이 없이 맑고 꼿꼿하게 학처럼 사는 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가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 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서도 오골계!’” (정희성, 시인본색)

학같이 고상해 보이는 분도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닭 같은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별 사람 없습니다. 다 약합니다. 다 부족합니다. 다 실수가 많습니다. 
이 여인과 간음한 남자는 어디 갔습니까? 발각되자 바로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힘이 있으니까, 붙잡으러 온 사람들을 물리치고 줄행랑쳤을 것입니다. 힘없는 여자만 붙잡혔습니다. 
우리 모두 붙잡히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 잘못한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운 나쁘게 경찰에게 잡혀 스티커를 끊겼을 뿐입니다. 우리가 스티커를 안 끊긴 것은 단지 들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꼭 같습니다. 

6. 제2의 기회를 주신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모든 부족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죄 지어도 괜찮아’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고를 유예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두고 보겠다는 말입니다. 
제2의 기회를 주겠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집착하여 과거처럼 실패자로 살 것인지, 아니면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마음 자세로 살 것인지 네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실패했습니까? 넘어졌습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다시 한 번 더 해보라.’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너는 가능성이 있다. 충분히 잘 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있으니까.”

7.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비참과 비탄, 고통과 공포 같은 불행한 것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행복을 꿈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면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행복은 곧 베푸는 것입니다......(중략) 나의 행복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만인의 행복이 필요합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만인의 행복이 필요하다.” 
“나의 행복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나 혼자 행복하는 것은 참 행복이 아닙니다. 
나 혼자 예수 믿고서는 예수 믿는 진정한 기쁨, 참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함께 예수 믿도록 할 때, 내 안에서 참 기쁨이 솟아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처럼, 불쌍한 처지에 놓인 사람, 추락하고 있는 인생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몹시 불안하며 당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살림과 죽임의 경계선에서...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렵니까? 살리는 편에 서시지 않겠습니까?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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