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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자신에게 정직하셔야 합니다!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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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신에게 정직하셔야 합니다! (행 5:1-11)


어느 집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아내가 식탁에 올리는 음식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래 놓고 나서는 늘 경건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는 남자가 여느 때처럼 불평을 늘어놓고 나서 감사 기도를 하자 어린 딸이 물었습니다.
"아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는 소리를 들으시는 거야?"
"그럼, 물론 들으시지."
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하는 소리도 모두 다 들으셔?"
아버지는 자기가 딸에게 신앙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해줬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럼, 빠짐없이 들으신단다."
그러나 딸의 다음 질문으로 그의 자부심은 곧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빠의 그런 두 가지 말 가운데 어느 쪽을 믿으셔?"

인간 관계에서 대하기가 참으로 난감한 사람은 일구이언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입으로 때에 따라서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관계를 맺기가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야고보는 야고보 3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않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6절에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어느 방송에서 거짓말을 했을 때에 나타나는 행동에 대하여 방송을 했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거짓말을 했을 때에 첫째로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말이나 행동에 과장된 표현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비비게 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거짓말에 익숙해 있는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하나의 테스트가 있습니다.  네 가지 답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만 나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서 마음속으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첫째로 나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  둘째, 나는 자주 거짓말을 하는 편이다.  셋째, 나는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히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 경우도 있다.  네 번째,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들 네 가지 중에서 어디에 해당되십니까?  첫째 나는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  이 사람은 병원에 입원해야 합니다.  영적 병원에 입원하셔서 주님의 심각한 다루심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자주 거짓말하는 편이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진지하고도 심각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 거짓말을 한 경우도 사실은 있다.  저는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네 번째,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거짓말쟁이 중에서도 새빨간 거짓말쟁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진실하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진실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에서 반쯤은 사실이고 나머지 반쯤은 거짓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 진실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 이것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 문제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과 거짓된 삶에서의 문제 앞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랑하는 여러분, 반쯤은 진실이고 반쯤은 거짓말인 인생….  어쩌면 이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 어디에서나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두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할 필요가 있었을 때에 이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땅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상당한 부분은 숨겨 두고, 나머지 상당한 부분을 헌금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가 가진 전부라고 했습니다.  일부분을 드리면서 전부를 드리는 것처럼 말하고 헌납을 했습니다.

그런데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거짓인 이들 부부의 행동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굉장히 화가 나셨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이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저 책망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들 두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 가셨다는 것으로 사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혹여 어떤 분은 조금 심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실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두 사람이 잘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밥그릇을 챙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렇다고 두 사람이 헌금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목숨까지 거두어 가셨다.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신 분이 아니신가?  그렇게 생각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인들의 의식구조, 기독교적 가치관이 반영된 서구 사회와 달리 한국에서는 이러한 느낌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거짓말을 심각한 범죄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과거에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에 클린턴 전대통령은 섹스 스캔들로 세계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그의 섹스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고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핵심은 섹스 스캔들이 아니라 그가 거짓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이 더 중요한 핵심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엄청난 의식구조의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섹스 같은 것은 커다란 사회적 범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한 범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짓을 아주 심각한 범죄라고 말합니다.  왜, 어떤 의미에서 거짓은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리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아주 일관성 있게 강조하기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요"  내가 바로 진리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하나님은) 미쁘시고"  여기에서 "미쁘다"는 말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시편 5편 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그 다음 6절에 보면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잠언에도 20장 10절에 보면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일관성 있게 진실하십니다.

반대로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마귀의 존재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성경은 마귀를 가리켜서 거짓의 아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에,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나 언어에 거짓이 섞여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면,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그리고 3절에 보면,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 붙들린 바 된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이런 일을 했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들은 거짓의 아버지인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고 거짓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4절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교회를 향하여, 교회 지도자를 향해서 이들이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모든 거짓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범죄다.  그것은 진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리는 죄악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로 이 거짓이라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조금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다니 이것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적 피상성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당시 초대교회는 교회의 기초를 놓아 가는 때였습니다.  교회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지지 않으면 그대로 계속해서 잘못됩니다.  처음이라는 것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그 교회가 정말 복음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진실 위에 세워져야 했습니다.  진실한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할 교회의 모습을 주님께서 기대하셨기 때문에 그 교회 안에 거짓이 들어왔을 때에 처음부터 이것은 단단히 다룰 필요가 있다.  저는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은 아닐는지 모릅니다.  아주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진리와 정직의 터전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을 향한 복음 선포의 책임을 다할 수가 있다.  이렇게 믿었던 하나님께서 이들 부부의 부정직한 모습을 가차없이 다루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냈던 사건.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진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짓이 지배하는 공동체,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는 분명히 병든 사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반드시 도덕적인 위기가 찾아옵니다.  진실을 잃어버리고 양심이 통하지 않는 사회, 신용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을 때 그 사회의 복된 미래를 우리는 결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회 속에서 누구의 말도 믿을 수가 없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신용이 통하지 않는 사회, 정직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질서와 공의가 지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만이라도 진리 위에, 정직 위에 세워지기를 기대하셔서 이 사건을 몹시도 정확하게, 거룩하게, 엄중하게 다루신 사건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보십시오.  사건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온 교회가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습니까?  "거짓말했다가 생명을 잃어버렸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중에서 누군가가 거짓말 한 번 했다가 한 사람이 가셨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긴장을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긴장만 하겠습니까?  뭔가 우리들의 삶이 좀 새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 다음절 이하에 보면, 이 사건 직후에 교회를 통한 부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 그것이 바로 거짓의 죄악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거짓이 존재하는 한 부흥의 역사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이 존재하는 한 교회 공동체는 온전하게 서 가지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진실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거짓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짓이 얼마나 오래 가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실존주의 작가인 알버트 까뮈는 자기가 쓴 작품의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마지막 심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거리에서 날마다 심판을 본다."
나는 날마다 심판을 본다.  우리는 이미 거짓을 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도 심판을 경험하고 그래서 비틀거리는 삶의 모습을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판은 여기, 이곳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링컨이 한 유명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짓은 사람들을 잠시는 속일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노출됩니다.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몇 사람이 주일날 놀러 갔습니다.  신나게 하루종일 놀았습니다.  월요일 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하는데 가기가 싫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학생이 꾀를 냈습니다.  "야, 우리 하루 더 놀자.  그리고 완전히 결석이 되면 안 되니까 이따 오후에 학교 끝나기 직전에 들어가서 사실 주일날 우리가 놀러 갔었는데 시골 깊은 곳에 놀러 갔다가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는데 공구를 가져오지 않아서 바퀴를 고칠 방법이 없었다.  하루종일 애쓰다가 가까스로 고쳐서 겨우 왔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 보고하자.  넷이서 합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날 하루 더 신나게 놀고서는 오후에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선생님, 참 죄송합니다.  어제 우리가 사실은 깊은 산골에 놀러 갔다가 월요일 날 아침에 학교에 오려고 그러니까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공구를 안 가져와서 고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애쓰다가 가까스로 고쳐 가지고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아, 그러냐고" 빙그레 웃으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서 메모지 하나를 다 주더랍니다.  네 사람에게 메모지를 주고서는 떨어져 앉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메모지에다가 자동차 타이어 어느 쪽 바퀸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앞바퀸지 뒷바퀸지 어느 쪽인지 네 사람 각자 쓰라는 겁니다.  여러분,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짓의 사람들이란 책을 쓴 정신분석학자인 스코트 팩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거짓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거짓을 믿을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는 그는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인생을 산다.  이것은 최악의 비극이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인생은 결국 자기 파멸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거짓은 자신을 파괴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거짓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까?
혹은 어떻게 이 거짓을 예방할 수가 있습니까?
혹은 우리가 거짓에 빠졌을 때에 어떻게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어떻게 했어야만 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몇 가지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의 죄를 극복하려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와 여러분이 거짓말을 하게 될 경우에 가만히 분석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 최면, 자기 위신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더 많이 드린 것처럼 보여지기 위해서, 자기 희생을 가장하기 위해서 이런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만 의식했더라면 이 거짓을 범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식하십니까?  과연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나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내 언행일체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기나 하십니까?

우리가 만약에 정말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지금처럼 이중적인 삶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거짓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저들이 과연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더 의식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의 그 조잡스러운 작은 거짓의 실수들의 상황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의식했던 그런 자기 방어.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아니면 나를 과장하기 위해서, 혹은 나를 겉치레하기 위해서, 내 체면을 위해서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때 우리는 좀 더 정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좀 더 진실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친구가 주변에 많아야 정직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 정직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했다고 하십시다.  인생에서 실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실수를 교정하기 위해서 "그때 내가 사실은 진실을 말하지 못했어."  "야 너 거짓말했구나.  그럴 수가 있니."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 네가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은 정직한 것이야.  그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야."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보다 용기 있는 행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직한 자기 토로, 이것은 용기 있는 일입니다.  잘못할 수도 있으니까, "잘못했습니다."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격려해 주는 분위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다시 본문의 사건으로 돌아와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사람 중에서 만약 한 사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령, 남편이 그렇다고 하십시다.  그러나 아내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1절에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더불어 소유를 팔았다.  그리고 2절에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아마 주도적으로 남편이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누가 알았습니까?  "그 아내도 알더라"  아내도 알았습니다.  이때 아내가 "여보, 우리 정직합시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결국은 부부가 닮는다고 하지만 나쁜 것을 닮으면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진실한 신앙에 대해서는 서로가 건전한 야당도 되어야 합니다.  올바르지 못한 신앙에 대해서는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더라도 지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가 똑같이 무너지고 넘어지면 그러면 이들 부부처럼 가정이 망하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름다운 부부는 밀고 당겨주는 협력자적인 관계이어야 합니다.  바르지 못할 때는 바른 길로 가도록 당겨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른 길을 갈 때에는 끊임없이 밀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그 가정은 무너집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이 교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함께 꾀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부부는 아주 환상의 콤비였습니다.  죄도 같이 짓고….  그러나 부인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여보 안돼요. 우리 하나님 앞에 정직합시다."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바른 길로 가고자 하는 도전을 했더라면 이 사건은 얼마나 달라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바른 길로 가고자 하는 거룩한 도전,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서도 동일하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믿음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 유익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한 인생의 길을 함께 갈 수가 있는 친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달으셔야 합니다.

바른 신앙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의 영혼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또한 내가 그릇된 죄악의 길로 빠지지 않고자 하는 거룩한 결단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로서 필요로 할 때 우리는 그만큼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하셔야 합니다.

뭔가를 감추기 시작하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부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이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날 목사에게 뭔가를 감추기 시작할 때 결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협력적이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목사와 숨김이 없는 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이 거짓을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했어야만 했던 것은 회개할 수 있을 때 곧 바로 회개를 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시간을 더 끌어서는 안됩니다.  회개는 빠를수록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3절에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때 아나니아가 "맞습니다. 베드로님!  제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오리발 내밀지 말고, 자기 변명하지 말고 "예,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때 실수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을 했더라면 분명한 것은 오늘 이 사건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아나니아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주책'이라고 합니다.
'주책', '주님이 책임질 수 없는 사람' 말입니다.

그 다음에 삽비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에게도 결정적인 때가 찾아왔습니다.  7절에 보면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절에 "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이것은 기회였습니다.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거짓이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허영이 섞여 있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회개했다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양심의 소리를 묵살해버렸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묵살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은 끝났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마지막 종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을 말할 때마다 이런 강조를 합니다.  "성령을 속이지 말라"  혹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이럴 때 성령님이 역사합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를 떠난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내가 거짓을 중단하고 있는 것만으로 아직 회개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언제 또 다시 거짓이 튀어나올는지 모릅니다.  내가 거짓말을 중단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거짓을 말하던 내 입술에서 이제는 진실한 말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먼저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나와서 나의 거짓의 범죄와 나의 모든 범죄를 짊어지고 보배로운 피를 떨구신 그분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보혈로 씻음 받고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받고 일어나 이제 거짓으로 지배되던 내 입술 속에 진실의 새로운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미움의 언어 대신에 사랑의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이웃들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파헤치던 죽음의 언어 대신에 내 입술에 사랑의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생명의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창조의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말을, 새로운 언어를, 정직한 말을, 거룩한 언어를 담고 이 언어 속에 복음을 담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는 거짓을 벗어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거짓이 유행하는, 거짓이 편만한 사회의 분위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정직해야 되는데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오늘 우리의 체면 때문에 정직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정직하셔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나머지 인생만이라도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거룩한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입술에 거룩의 언어, 생명의 언어, 사랑의 언어를 담아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내 입술이, 내 언어가, 내 마음이, 내 존재가 되고자 하는 거룩한 도전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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