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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가가 전하는 부활은? (막 1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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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가 전하는 부활은? (막 16:1-20)

  
부활주일 이후로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에 대하여 계속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부활은 ‘내 증인이 되어라’는 것이며, 요한이 전하는 부활은 ‘내 양을 먹이라’이고, 마태가 전하는 부활은 ‘가서 제자 삼아라’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가복음이 전하는 부활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부활을 전하는 내용은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무덤에 향품을 바르려고 갔다가 무덤 안에 흰 옷을 입은 청년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과 부활하신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시골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나 보이셨는데 이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보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였으나 믿지 않았다는 것과, 그리고 예수님이 11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지 않음을 책망하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제자들이 그 명령을 따를 때 함께 역사하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무덤에서 이제 주님을 뵈올 수가 없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전하였으나 믿지 않았으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승천하신 뒤로도 함께 하셔서 확실하게 하셨다고 마가는 부활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여러 번 마가복음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것처럼 마가복음의 주제는 1:1절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들의 나라가 건국되었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모세의 율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고 하면 이제 하나님 아들의 복음이 통치하는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곧 마가복음의 주제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나라가 출범하게 되면 국민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게 무엇입니까? 이 정권이 들어서서 무언가 새로움이 나타나는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권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그 정권을 돌아보면서 그 정권이 이루었던 치적에 대하여 생각하고 되새기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군사정권이 통치하다가 문민정권이 새로 들어서게 되면 이에 따라 국민들에게 행해지는 정책도 아주 판이하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저의 청년시절에는 군사정권 때 장발단속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길면 파출소에 끌려가 가위로 아무 곳이나 듬성듬성 보기 흉하게 머리를 잘렸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짧게 깎인 제 친구 하나는 장발단속을 당한 뒤부터 머리를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감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감느냐고 물으니까 그 친구 대답이 머리에 수분을 많이 주어야만 일찍 머리가 자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머리를 짧게 깎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제 청년으로서 머리를 아주 길게 길어보고픈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즘 보면 젊은 사람들 중에 아예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저희가 젊었을 때는 스님이 아니면 그런 머리를 볼 수가 없었는데 이제 절에 다니지를 않아도 머리를 면도기로 밀어 반짝반짝 빛이 나게 밀고 다니는 것입니다. 저희 때는 장발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고 어찌하든 도망하거나 숨거나 했는데 이젠 아예 자발적으로 머리를 짧게 깎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밀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도 새로운 나라와 새 정권이 들어서서 우리에게 가져온 변화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새 나라가 출범했다는 것은 항상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고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단 국가적인 모습에서 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를 테면 제가 항상 비유를 자주 드는 결혼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후의 삶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우선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집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여보’라고 부부사이에 새로운 호칭을 씁니다. 실상 ‘여기 보시오’라는 말이 줄어서 그리 된 것인데, 그리고 원래는 적당히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여 그리 부른 것인데, 아주 가까운 사이에 부르는 말로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호칭 뿐이 아니라 아내로써 음식을 준비를 할 때에도 달라집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는 항상 자기 몸을 치장하거나 가꾸는데 마음을 쏟았는데 이제 결혼하고 나서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나 아닌 다른 식구를 더 꾸며주려 애를 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되면 새로운 호칭과 생각과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새로운 만남과 삶도 시작이 됩니다. 

이와 같이 마가복음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무덤에서 만나는 관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무덤 안에 시체에 향품을 발라 죽음의 권세 아래서 교제하던 때는 끝났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완공하고 성전의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성별한 후에 하나님과 교제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런 교제는 끝이 났습니다. 무덤 안에서는 살아나신 주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갈릴리로 가야만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럼 부활하신 주님과 어떤 만남을 하는 것일까요? 그보다 먼저 누가 어떤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수가 있었습니까? 마가복음은 부활하신 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를 제일 먼저 만나셨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전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만날 수가 없었던 자들이 이제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제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낮고 천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버림을 당했던 자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게네사렛 사람들이나, 수로보니게 여인, 벳새다 소경같은 이가 주님을 보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시골로 가던 두 사람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들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들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다가 실망하고 예루살렘에서 시골로 가던 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옆에서 동행하였어도 알지 못했었는데 성경을 풀어주시고 함께 식사할 때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부활을 전하는 강조점은 이렇게 살아나신 예수를 보고 전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믿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에게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새로운 교제는 마음의 완악함을 제거하고 듣고 믿으므로 가능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이 증거했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나라를 새롭게 건국하면 죄 아래서 교제하는 때는 끝나고 새롭게 즉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고 교제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죄 아래서 살던 나라의 삶은 끝이 나고 죄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탈북한 사람이 남한에 와서 사는 삶이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여전히 북한에서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동무’라고 부르면 어떠하겠습니까? 공동작업장에 가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나누게 되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면 어찌 남한에서 연봉을 각기 다르게 지급하는 것을 따라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보고 믿으면 제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그 주님을 천하 만민의 구주로 알고 그의 명령을 따르게 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어떤 복음입니까? 부활의 복음입니다.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죽음의 나라는 끝났고 이제 죽음에서 살아난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뵙고 전하였고, 두 사람이 부활의 주님을 보고 전하였듯이 가장 먼저 부활의 주님을 알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현상인데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에 없었던 새롭게 나타난 일입니다. 

그럼 왜 복음을 전파합니까? 16절에 말씀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은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직접적으로 이렇게 이해하도록 강요를 받아 왔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데.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죽어서 가는 구원으로만 생각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제까지 들어서 아시는 바와 같이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언약적인 표현입니다.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고백하여 맹세한 후 함께 한 집에 산다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이 다음에 마가복음에서는 하늘의 천당에 올라갔더니 황금보화로 꾸며진 집이 어떻게 생겼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살면서 새로운 삶이 나타나 보였다고 그 구원을 말합니다.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의 나라와 새 시대가 되었는데도 그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구원의 삶에서 제외되어 정죄받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믿고 구원얻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마가는 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새 정권이 출발하면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고 새로운 삶이 나타나듯이, 결혼을 하여 새 언약의 삶이 시작되면 새로운 삶이 나타나듯이 표적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살면 그게 무슨 결혼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새 언약을 맺은, 즉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는 새로운 표적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약혼의 언약을 맺으면 약혼에 속한 삶이 따라나오고, 그 약혼을 결혼의 언약으로 완성하게 되면 결혼에 속한 삶이 따라나오게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약혼의 삶이 한 집에 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면 결혼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삶은 한 집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결혼에 속한 삶을 약혼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새로운 삶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표적이 따른다’라는 마가복음 오늘 본문의 뜻입니다. 

우리가 죄 아래 살던 때 나타났던 삶은 끝이 나고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를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은 삶은 죄의 권세를 밟는 새로운 삶으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표적이 따라나옵니까? 17-18절입니다.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런 구원의 표적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으면 여러분은 혹시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까? 여기 귀신을 쫓아내 본 경험이 있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새 방언을 말하여 본 적이 있는 분들 손을 들어보세요. 뱀을 집어보고 독을 마셔본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니까 병이 싹 달아나고 그런 체험하신 분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니까요? 이런 표적이 없었으면 여러분은 마가복음에서 말씀하는 구원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놀라거나 불안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제 말을 의심하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아마 믿는 사람들마다 이런 표적이 나타났다면 신약성경은 온 천하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세계 각지에서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 이것을 기록하느라 바빴을 것입니다. 물론 복음이 전파되는 초기에는 이런 표적들이 항상 나타납니다. 새로운 왕조가 건국이 될 때에는 왕조가 계속될 때와는 다른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는 건국시에는 이런 건국공신들이 나와서 표적들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과 병행하는 출애굽기 4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어 놓은 성전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르고 멈추는 것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진행하거나 진을 치고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광야생활에만 존재했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항상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개인이나 나라나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곳에는 이런 표적이 함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오래 전에 세워졌고 진행되었을 때에는 평화시에 함께 하는 나라의 일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에는 그 나라나 대륙에 이러한 표적이 따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 일어났으며 한국교회에도 이런 표적이 나타났었습니다. 또한 개인도 이러한 표적을 경험하실 수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 믿게 될 때 이런 표적을 동반하여 그 개인의 집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때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나라가 세워지는 건국초기를 지나게 되면 그런 표적 보다는 나라가 안정되게 나라를 세운 이념과 정책들이 잘 시행이 되어 평화롭게 백성들이 삶을 누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기독교가 세워지는 건국 초기에 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두드러진 표적 보다는 하나님 나라 안에 사는 권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적들은 ‘왜 내게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죄 아래, 즉 죄의 종노릇을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염려해야 합니다. 즉 예수 믿기 전의 삶과 예수 믿은 후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이방인으로 세상에 속하여 살던 때와 이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사는 때가 달라야 합니다. 이게 일차적으로 표적입니다. 구별되게 하는 사인(sign)!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했는데 어떻게 귀신을 쫓아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주님과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 올라가 안 계실 때 산 아래 있었던 남은 제자들 앞에 귀신들린 소년을 데려와서 귀신을 쫓아내어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 때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쫓지 못하고 귀신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주님이 내려오셔서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고, 귀신을 쫓아냄은 기도함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고 세상에 아니 계실 때도 주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럴 때 백성들은 주님과 함께 함을 기도로써 나타내어 귀신을 쫓아냅니다. 귀신과 사단의 권세를 꺾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함은 기도 밖에는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주님을 의뢰하고 도움을 구하여 주님과 함께 함을 나타낼 때 귀신은 도망갑니다.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했는데, 물론 이 방언은 알아들을 수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 말씀하는 의미에서 보면 저는 새 방언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그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만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비밀, 그리고 누가 우리 중에 큰 자냐고 다투었을 때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의 종이 되는 자가 주님의 나라에서 큰 자라고 가르치셨던 주님의 말씀이 곧 새 방언이라고 봅니다. 즉 세상의 원리와 가르침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오직 주님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처럼 그 교훈을 따라 사는 자들이 새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한 것은 죽음의 권세 아래 무서워 떨며 살지 않는 표적의 삶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바울이 외쳤던 것처럼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새 시대 주님의 부활을 보고 믿는 자들이 나타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사건이나 일에 근심하며 두려워하며 염려와 근심이 가득한 자들은 구원의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도 모든 믿는 자들이 이런 표적을 행하면 세상에 질병이 없어졌고 병원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질병이 있어도 질병의 권세 아래 자기 자신을 약하게 하지 않게 믿음으로 강건하게 사는 자들이 표적이 나타나는 구원의 삶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질병의 권세를 밟는 자들이 표적을 나타내는 구원의 백성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이러한 구원의 표적을 하늘로 올리우사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부활의 주님께서 행하십니다. 이제 만왕의 왕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영광의 왕으로 오르셔서 그 나라 백성에게 이러한 구원의 생명이 함께 하도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비록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세상에 계시지 않으셔도 그는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때 함께 일하십니다. 제자들만 보내심이 아니라 그들과 하나님 나라를 함께 완성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을 나타내어 주님이 주신 말씀을 더욱 확실케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부가 결혼의 서약을 하고 부부가 함께 하여 신혼의 삶 속에서 그 사랑의 맹세를 표적을 통하여 확실히 나타내며 가정을 완성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보고 믿으셨습니까? 그럼 자연스럽게 구원의 삶이 따라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맺은 사랑의 언약을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표적으로 나타내어 확실히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와 같이 죄 아래서가 아니라 죄를 이기신 주님과 함께 새 나라의 경영과 새 시대의 삶의 표적을 나타내어 복음을 전파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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