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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이 전하는 부활은? (요 20:19 - 요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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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전하는 부활은? (요 20:19-21:23)


부활주일 이후로 지난 주일에는 누가복음에서 누가가 전하는 부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전하는 부활에 대하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부활의 역사적이고 단회적인 사실에만 치우쳐 왔던 우리의 부활신앙에 대하여 성경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중요한 포인트를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 역사적이고 단회적인 면을 말하려는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언약의 성취로써 부활을 성경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에 중심을 두고 부활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도 이러한 점은 역시 그 중요성을 아주 크게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인할 수가 있게 되실 겁니다. 2009년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여러분과 제가 이제까지 알아왔던 부활신앙에 대하여 다시 재고를 하여 성경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중심에 맞게 새롭게 정립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부활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 15:1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며 세상의 구경거리로 사는 자신이 제일 불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15:19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이렇게 부활이 기독교 전 신앙의 근본이며, 이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제일 불쌍하게 살아도 될 정도로 중요한 것인데, 여러분과 저는 부활의 일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만 매달려 우리의 부활신앙을 가져온 것이 아닌지 함께 깊게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에서 어떻게 부활을 성경저자들이 전하는 지 알게 되면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서 부활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며 우리의 신앙토대를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가 가지는 주제와 목적을 따라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정립하게 되면 신자로써 사는 삶의 토대가 잘 갖추어지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요한복음의 저자가 어떻게 부활을 전하고 있는지 함께 듣고 우리 모두 새롭게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선 요한복음은 그 주제가 20:31절에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그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제적인 말씀은 요한복음 다른 곳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3:36절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6:40절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제가 신앙을 가진 분들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기독교는 그냥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까? 다른 종교는 그냥 그 신의 이름을 믿는다고 하면 되는데, 불교 같으면 부처를 믿어야 한다던가 그렇게 말하는데 왜 기독교는 굳이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도 이런 질문에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요한복음의 기록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는데 깊이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냥 ‘예수천당’하니까, 너도나도 “그냥 예수 믿어요!” 하고 답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행위가 아니라 단지 믿으면 된다니까 ‘예수 믿쉽니다!’고 너무 쉽게 대답한 것은 아니십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하여’ 요한복음은 장장 21장에 걸쳐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세례를 너무 쉽게 주었다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연구한 예배학 교수를 만나고 나니 더욱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그렇게 쉽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요한 사도께서 ‘예수를 믿게 하려고’ 쓴 책인 요한복음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제일 순탄한 방법일 겁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여러분이 읽으셔서 아시겠지만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내심을 세 번이라고 말해줍니다. 21:14절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그런데 이 세 번 나타나심을 사도 요한은 그냥 나란히 일, 이, 삼 순서대로 기록하지를 않았습니다. 앞의 두 번 나타나심과 세 번째 나타나심 사이에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목적을 써서 두었습니다. 20: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마 저 같으면 세 번의 나타나심을 다 기록한 후에 마지막에 목적을 기술했을 것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거의 일반적으로 그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물론 21장은 부록으로써 나중에 다른 사람이 편집해서 첨가한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경을 기록된 대로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세 번의 나타나심을 살펴보니 앞의 두 번의 나타나심의 결과는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첫 번에 뵙지 못한 도마를 이야기하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고, 29절에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시므로 결국 믿음으로 결론을 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앞의 두 번의 나타나심을 더 자세히 보십시다. 우선 첫 번째 나타나심은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나눌 수가 있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어도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이 다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20:17절에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저녁 때에 오셔서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즉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과 올라가셨다가 다시 오신 후의 교제가 서로 달랐습니다.

특히 저녁 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은 예배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는 말씀은 예배언어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은 예배책이라 할 정도로 예배의 내용이나 모습이 다른 복음서보다 훨씬 잘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앞의 두 번째까지 나타나심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예전의 말씀예전의 내용과 흡사합니다. 즉 말씀을 통해 만나시고 세례를 주시는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축복 인사를 하고 부활하신 영광을 보이시니 제자들이 기뻐하고 평강을 선포하시며 제자들에게 주님처럼 세상에 보낸다고 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동행하도록 성령을 주시고 새 창조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일은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부활하신 영광을 보고 기뻐하며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타나심은 듣고 믿지 않았던 도마에게 부활하신 영광을 직접 보이시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마로 하여금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보고 믿는 자 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치 두 번째 나타나심은 우리의 예배 예전에서 세례를 연상시키게 합니다.

여기까지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두 번째 목적인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나타나심은 실제 조반을 먹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먹는 장면이니 결국 생명과 관계된 내용입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여도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시고 함께 잡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찬예전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조반을 먹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눈 대화가 있고 베드로의 앞날을 미리 말씀하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따르는 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처럼 일찍 순교하여 주님처럼 십자가에 팔을 벌려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처럼 오래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와 같은 새로운 교제는 무엇을 뜻합니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곧 생명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누리는 생명입니다. 어떤 믿음이요?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며 주님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나타나는 생명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은 바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일어나신 분이 이제 자기 백성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새 창조는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처럼 성령을 호흡하셔서 이루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새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새 창조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첫 아담처럼 처음 창조된 세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스려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을 뵙고 죽음에서 일으키는 주님의 일을 하도록 새롭게 교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바로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함을 받고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믿음으로 화답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왕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식사하여 그 영광의 일을 따라 사는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서로 양국의 정상이 만나서 합의하면 정상만찬을 하고 그 다음에는 서로 합의한 바를 지켜서 함께 일을 해나가며 그 합의한 바를 이루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일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일에 주님을 따를 것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젊어서는 원하는 바를 따라 살았지만 늙어서는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 팔을 벌리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 삶은 바로 21:19절이 말하듯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한 것 가운데 잘 예견되어 있습니다. 주님처럼 십자가에 팔을 벌려 죽임을 당하는 그 길을 베드로는 따라갈 것입니다. 

그럼 우리 모두가 베드로처럼 순교를 해야만 합니까? 그게 아니라고 20-23절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순교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게 요한복음이 기록한 목적을 이루는 삶입니다. 

이렇게만 보아도 부활을 전하는 요한 사도께서는 그냥 부활의 일회적인 역사적인 사실로만 알리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배예전이 언약식의 형태를 나타내듯이 부활을 전하는 요한도 언약적인 형태를 띄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 사도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언약의 성취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잡히심부터 재판을 받고 고난을 당하사 죽으시며 다시 부활하시는 이 모든 과정을 요한 사도는 하나같이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동산에서 잡히실 때 18:9절에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또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18:32절에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옷을 나눌 때 19:24절에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19:28절에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다리를 꺾지 아니할 때에 19:36절에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심도 20:9절에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 언약을 성취했다는 의미는 바로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했구나를 알리는 데 있습니다. 새 언약으로 새 사람이 새 삶을 사는 새 시대가 나타났구나 하는 것을 알리려 함입니다.

즉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아니 부활의 주님이심을 듣고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새로운 언약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식사하며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자로써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바로 부활의 주님을 듣고 보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믿고 나면 천국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의미로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죄많았던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확증도 아닙니다. 믿음은 곧 언약을 맺음이요 그 언약을 따라 사는 삶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이 믿음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서두에 이미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1:12-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혈통으로 낳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은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주님의 양을 먹이며 주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처음에 생명의 빛으로 증거합니다. 그 생명의 빛이라는 말씀은 무슨 태양빛이나, 서치라이트의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첫 창조 때 하늘의 광명이 있기 전에 빛이 있으라고 하셨던 것과 같이, 새창조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도대체 어떤 빛인가? 요한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 속에서 나온 독생자의 빛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믿음의 표현도 16:30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나이다”라고 하고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17:8절에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로서 나왔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였다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설교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왜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는가? 특히 요한복음은 독생자임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 독생자는 아브라함과 독자 이삭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관계를 알아야만 독생자 예수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말할 때 항상 아버지와 하나임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도 결국 참람죄였고 그 참람죄는 자기를 아버지와 하나이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된 병자를 고치시고 나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심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도 모두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처럼 아들도 살리신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말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직무적 칭호는 어떤 뜻이냐면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나되어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5장부터 11장까지 예수님이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즉 아버지와 같은 권세와 아버지와 같은 말씀을 표적을 통해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백성은 그를 믿지 아니했다고 12장에 말합니다. 12:37절에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하면서 그 원인은 12:43절에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증거합니다. 

그럼 이렇게 표적으로 증거하고 나타내었어도 저들이 믿지 아니하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포기를 하고 마셨는가? 모두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게 버려 두셨는가? ‘아니다!’라고 요한복음은 증거합니다. 12:44-47절에 이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나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려 함인가요? 모세를 통해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가나안 땅의 생명을 주려 함이 구원입니까? 그건 있다가 없어지고 썩어질 생명입니다. 죽음 아래 갇힌 생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명하신 것은 모세에게 명한 것과 다릅니다. 12:50절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표적을 통해서도 믿지 않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아버지의 명령인 영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가 있었습니까? 13: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심으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유월절 최후 만찬에서 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13:14-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리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13: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런 후에 베드로의 부인이 예고됩니다. 그런데 이 흐름은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보았던 21장의 조반 먹은 후의 모습과 같습니다. 왜요? 13:3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이렇게 따라올 수 없는 베드로와 예수를 버린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죽으심은 아버지께로 가심이었고 그 아버지께로 가심은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성령을 주시면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일을 함께 따라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17:20-23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부부가 서로 하나가 됨은 사랑함을 통해서입니다. 왜 요한복음은 아들을 믿으라고 합니까? 그가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를 순종해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은 그에게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믿는다는 말은 그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하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하심으로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럼 이제 이 유명한 구절이 해석이 되실 것입니다.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새 집을 꾸미고 새 가구를 들여놓고 신혼살림을 시작합니다. 모두가 새 시대요 새 언약으로 사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이 바로 이런 언약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 가운데, 어두움 가운데 사는 때는 끝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새 시대에 주님을 아들로 믿는 새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떻게 새롭게 살까요?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양을 먹이므로 주님을 따르는 새 삶으로 단장되어 새 신랑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사실을 역사적으로 믿습니까? 거기에서만 그치지 마십시오. 반드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양을 먹이는 주님과 함께 하는 주님을 따르는 삶이 있는 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으로 부활의 믿음을 확증하십시오.

연약하고 무력하고 부족한 형제들을 위하여 오늘도 그들의 발을 씻겨주어 주님이 이들을 사랑하심처럼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에 거하므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이것 저것 비난하고,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여 발을 씻기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가 형제보다 더 높고 낫구나 하며 살고 계십니까? 아직 부활의 새로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둠에 속한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양을 먹이며 삽니다. 표적적으로 아니라 사랑으로 수고하며 먹입니다. 일시적이 아닙니다. 행사와 절기 때만이 아닙니다. 끝가지 사랑합니다. 이게 요한이 전하는 부활신앙입니다. 

양을 이용하여 털과 고기를 취하려 하는 자는 삯군입니다. 예수 믿음을 이용하여 오병이어의 배불림을 얻었던 것처럼 사는 것은 삯군입니다. 그렇지 않고 선한 목자로 자기 살과 몸을 형제를 위하여 내어주어 ‘내 양을 먹게 하는’ 삶을 사신다면 여러분은 부활의 시대에 맞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양을 먹이고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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