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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의 자녀교육 (신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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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의 자녀교육 (신 6:1~9)


오늘 본문은 모세에게 이끌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를 통해 받은 말씀으로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으로 들어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데 그때 그들이 기억하고 지켜 행해야 할 일을 이제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그 일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즉 그 일을 행하는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자손손 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절 끝부분과 이어지는 3절에서는 그 일을 행함에 따르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그 약속이란 장수하며 크게 번영하는 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두고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하여 행할 그 일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본문 6절 이하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4-5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4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란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곧 야훼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에 그를 경외하며 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5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 일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그를 경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그에게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드리지 않으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자손대대로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며 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누리는 백성이 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란 무엇입니까? 이제 6절 이하의 말씀을 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6절에 보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 합니다. “마음에 새기라.” 한 것은 쉽게 지워지도록 써넣으라는 정도가 아니라 끌과 망치를 가지고 날카롭고 정확하게 새겨놓아서 지워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합니다. 여기서 “가르치라.” 한 것은 6절의 말씀과 연결시켜서 이해하면 부모가 먼저 마음에 새겨 넣은 것과 같이 자녀의 마음에도 각인시키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 한 것은 가끔씩 어쩌다 한 번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귀에 못이 박히게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귀에 못이 박혀야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르침이 마음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과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함을 자녀들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지시하는 것이 그 이하의 말씀입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우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다시 말하면 어디서든지 자녀에게 말씀을 강론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즉 언제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말씀을 몸에 항상 달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떠나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나가나 들어가나 언제나 그 말씀을 잊을 수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온 가족뿐 아니라 집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믿으며 오직 그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백성임을 밝히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녀교육에 대한 명령이고 책임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오늘날까지 주일의 교회학교에서뿐 아니라 주중의 학교교육에서까지 자녀들이 그런 교육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반 학교에서는 신자들의 자녀들이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준행하고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자녀교육을 원하는 부모들과 교회는 그러한 자녀교육을 실천하기 위해서 별도의 학교들을 세운 것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 6년 동안 다닌 학교도 그런 학교입니다. 목사님이셨던 할아버님의 철저한 신앙교육의 원칙 때문에 다른 학교를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지원서를 써야 하는데 제가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저보고 당시 서울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학교 둘 가운데서 아무데나 골라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학교는 못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님이 교감선생님을 만나서 우리는 자녀들을 기독교학교에 보내는 집안의 신앙원칙 때문에 다른 학교는 갈 수 없고 우리 아들 우리가 원하는 학교에 보내겠다는데 왜 지원서를 안 써주느냐고 장시간 싸운 끝에 겨우 지원서를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저희 집안의 자녀들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그랬습니다. 제 형님, 제 삼촌, 사촌, 육촌, 외사촌까지 제 집안 남자들은 모두 같은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제 고모님들을 위시해서 제 집안의 여자들도 다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아내까지도 그렇습니다. 

제가 나온 학교는 본래 북한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 월남한 평안북도 출신 피난민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세운 학교입니다. 저는 이 학교를 너무나 귀하게 여깁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매일 전교생 예배가 있었습니다. 또 매일 첫 시간 수업 시작하기 전과 마지막 수업 끝난 후에 반별로 모여 또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실이 있어서 30분 일찍 등교해서 기도실에 먼저 들려 기도한 후에 반교실로 가고 하교하기 전에 또 기도실에 들려 기도하고 집에 가는 것이 정해진 일과였습니다. 매 학기마다 며칠간 부흥회를 했습니다. 

부흥회기간 중에는 수업을 전폐하고 하루 종일 말씀 듣고 기도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요즘 신학교보다 훨씬 강도 높은 신앙훈련을 받는 학교였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닐 때 이 학교의 축구부가 아주 강했습니다. 그래서 전국고등학교 축구대회에 나가서 결승까지 진출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결승전이 늘 주일에 열리곤 했습니다. 그러니 성수주일 해야 하는 원칙 때문에 늘 결승전을 포기하고는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또 우리 축구부가 결승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선수들이 출전을 포기하는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기독교학교가 우승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 하며 출전을 허락해달라고 학교에 간청을 했지만 여지없이 거부당했습니다. 그러자 선수들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결승전이 있는 주일 아침 다 함께 영락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는 학교 허락 없이 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승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 자랑스럽게 우승기와 트로피와 상장을 받아가지고 학교에 갖다 바쳤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수 전원에게 즉시 퇴학처분을 내렸습니다. 나중에 반성문을 단단히 받고 전원 복학시키기는 했으나 신앙이 그 무엇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모든 학생에게 단단히 가르쳐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학교에서 일반학교에서 하는 수업을 안 받는 것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다 받았습니다. 매년 졸업생 절반 이상이 당시의 국내 삼대 명문대학교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 바로 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삼도록 가르쳐준 학교입니다. 나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심어준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도 천 명에 가까운 목사를 배출했습니다. 제 동기동창 가운데는 십분의 일 이상이 목사가 됐습니다. 십일조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한 신앙교육을 하는 학교가 지방에도 있습니다. 대구의 계성, 순천의 매산 같은 학교가 그런 학교들입니다. 경신이나 정신 같은 학교는 우리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긴 전통을 가진 학교들입니다. 

이렇게 기독교교육을 통해 오랜 세월 사회와 나라 발전에 기여한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기독교학교들이 지금은 마음대로 신앙교육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기독교학교에서 한 학생이 예배에 참석하기를 거부하고 학교를 상대로 예배 때문에 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벌였는데 이틀 전 대법원이 그 학생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기독교학교에서 예배드리기와 성경 배우기를 거부할 학생들이 속출하게 될 것이고 지나간 예배 때문에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하게까지 될 터이며, 그러면 기독교학교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굳이 기독교학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각 교육청에서는 끈질기게 기독교학교에 예배를 선택사항으로 만들라고 하며 성경이나 기독교를 가르치려면 다른 종교도 같이 가르치라고 압력과 온갖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믿는 믿음을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데 우리 보고 다른 신이나 다른 종교를 가르치라고 강요하는 것이 교육청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것이 무슨 자유민주주의며 종교의 자유입니까? 대법원은 개인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기독교학교에 패소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의 종교자유만 중시하고 다른 한쪽의 종교자유는 무시한 행위입니다. 

자녀의 철저한 신앙교육을 원하여 기독교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다른 많은 부모들의 뜻이 한 학생의 저항으로 좌절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 월남한 피난민 교인들이 자녀들에게 철저한 신앙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세운 학교의 설립이념을 완전히 짓밟은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인구의 0.5퍼센트에 불과한 일본에서도 기독교학교들은 100퍼센트 학교가 원하는 대로의 신앙교육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기본권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는 자녀들의 종교교육의 완전한 자유를 포함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로 키우겠다고 모인 학교에 믿지 않는 학생 하나가 들어와서 그 학교의 존립이유를 부정하게 만들도록 하는 법이 무슨 법입니까? 그런 학생은 예배 안 드리는 다른 학교로 보내주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다른 학교에 가서 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예배 안 드리며 공부할 수 있는데도 전학가기를 거부하고 기독교학교의 문을 닫게 만들려는 처사는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법은 그 사람 편을 들어주고 만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대법관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행법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교육평준화라는 정책에 따른 사립학교법의 테두리를 넘어설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학생과 부모의 학교선택권을 제한하고 학교에게 학생선발권을 불허하는 교육평준화정책이 근본원인인 것입니다. 뺑뺑이 돌리기 입시정책 때문에 민주주의가 뺑뺑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학교에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기독교신자가 아닌데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기독교학교에 배정되게 만든 교육평준화정책이 폐지되거나, 아니면 교육평준화정책은 공립학교에만 적용하고 사립학교에는 설립이념에 따라 학생선발권과 교육의 완전자유를 보장하는 법개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종교의 자유는 교육평준화라는 하나의 정책에 우선하는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사실을 법관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대통령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거나 제한하는 정책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합니다. 

시편 1편의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자녀들을 기독교학교에 보내는 부모들은 이 말씀을 따라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원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자녀들을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기를 원해서 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데 그 자유를 박탈하고 기독교학교가 타종교까지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교육하지도 못하게 하는 정책에는 마땅히 저항해야 합니다. 저항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권리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에게서 이 자녀교육의 자유와 권리가 완전히 박탈된 오늘날 어디 가서 하나님의 백성의 자녀교육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놓고 합심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와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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