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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멀지 않은 하나님 나라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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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하나님 나라 (마 6:25~34)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모든 것을 지배했습니다. 정치 ․ 학문 ․ 예술 ․ 음악, 비록 봉건적인 사회였지만 기독교 신앙 속에 모든 것이 통합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믿음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이 발달하면서 이 통합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깨진 것이 과학과 신앙의 조화였습니다. 갈릴레오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발표했을 때 교회는 그것을 가르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갈릴레오는 교회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갈릴레오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어요. 그 사실을 이후에 가톨릭교회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마음속에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라는 양분이 불가피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교회에 충실해야 했지만 과학자로서는 과학적인 증거와 실험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분화라는 것이 처음으로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양분화는 서로 영역이 다른 것이 공존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영역이 있고 다른 영역이 있어요. 한 사람의 삶에도 여러 영역이 공존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 주변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의실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지만 교회에서는 ‘참 아름다워라 주님이 세계는~’ 이런 찬송가를 부릅니다. 거기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옛날 중세 시대에는 교회와 정치가 하나였어요. 지금 이슬람 근본주의국가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샤리아, 즉 이슬람 율법에 의해서 국가를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고 그 이외의 대부분의 나라는 세속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국가가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지만 방해하지도 않고 신앙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personal place-개인적인 영역에 보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양분화는 여러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정치는 정치라는 생각은 예컨대, 사람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당이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야당이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 정책을 반드시 지지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지만 자기의 개인적인 정치 성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신앙이 반드시 어떤 특별한 노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것은 유익한 생각입니다. 특별히 요즘 종교 때문에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시대에 종교가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분화는 오히려 신앙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만 생각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든가 예컨대 그리스도인은 다 창조론을 믿어야 된다고 요구한다든가, 공화당을 지지해야 된다고 요구한다든가, 또 의료개혁을 지지해야 된다고 요구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 교회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앙을 개인적이고 또 내면적이고 또 사적이고 영적인 영역에 담을 때 그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부담 없이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이것은 당연한 얘기지요.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양분화가 많이 일어날수록 신앙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솔로몬 왕이 죽은 후에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열한 지파가 떠나서 별도의 나라를 세운 것과도 같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가 만든 국가입니다.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에요. 

예수님에게도 열두 제자가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은 후에 르호보암이 임금이 되니까 그 열두 지파 중에 열한 지파가 떠나가 버렸어요. 그리고 유다 지파만 남아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전에는 막강한 열두 지파가 있었는데 이제는 한 지파만이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게 됐으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과거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지만 점점 양분화 과정을 통해서 신앙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것들은 떠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과학이고 신앙은 신앙, 정치는 정치이고 신앙은 신앙, 이런 식으로 양분화가 어디까지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영국이 과거에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자랑했는데 그 많던 식민지가 다 독립한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이런 저런 분야가 신앙의 지배를 떠나서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아마 성도님들 중에는 신앙을 이런 양분화의 개념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좀 생소하게 들리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안해서 그렇지 양분화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누가 병이 들어서 입원할 때 우리는 의학적인 부분과 신앙적인 부분을 별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학적으로는 이 병이 나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지라도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도 양분화에요. 의학을 부인하지 않지만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앙적인 영역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양분화가 없었다면 아예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실 텐데 뭣 하러 병원에 가느냐,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건 극단적이고 광적인 신앙이지만 적어도 일관성은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원도 의지하고 하나님도 의지하고 의학도 의지하고 기도도 합니다. 

또 자식이 수능시험을 볼 때 어느 누구도 기도만 하지 않아요. 기도만 하는 부모 없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공부시킵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유치원 보내고 학원 보내고 과외공부 시키고 논술 과외하고 이렇게 공부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교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기도 같은 건 안해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반대로 ‘나는 우리 아이를 위해서 사십일 금식 기도를 했기 때문에 공부 따위 안해도 시험 잘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못 봤어요. 공부는 공부대로 하지만 기도는 기도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것을 부인하지 않고 저것이 이것을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에 양분화에요. 

우리 모두에게 양분화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합니다. 신앙을 위해서도 불가피하고 현실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도 불가피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만일 갈릴레오가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과학을 위하여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서라도 양분화가 필요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믿음이 좋은 과학자가 강의 시간에 성경만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강의할 때는 자기가 배운 학술적인 지식을 가르쳐야 됩니다. 이것도 양분화가 없이는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만 신앙에 해가 되는 양분화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도 집중해서 들으셔야 됩니다. 저도 집중하지 않으면 설교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이건 너무 어렵다고 밀쳐버린다든가 이건 내 마음이 안 든다고 거부한다든가 이건 내 생각과 다르다고 배재한다든가 아니면 이건 하나님도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든가 아니면 나는 이건 믿지 않겠다고 거부한다든가 아니면 이건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단정 지을 때 이러한 양분화가 우리의 신앙을 괴롭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우리의 가슴이 차가워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일 정치인이 신앙은 신앙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전혀 비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정치활동을 한다면 그건 양분화가 아니고 이중성입니다. 그건 이중적인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다. 만일 직장인이 현실은 현실이고 신앙은 신앙이다 라면서 그의 신앙을 전혀 직장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이중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 우리의 주인이라고 부를 때 우리 삶의 모든 것의 주님이 아니시라면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 아닌 것입니다. all or nothing, 전부 아니면 전무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전부의 주님이 아니라면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본문을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채택했느냐면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양분화 식으로 생각하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요. 반대로 이방인들과 심지어 믿는 사람들도 평소 그들의 일반적인 관심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요즘 시대에는 어느 학교를 보낼까, 무슨 과외를 시킬까, 무슨 차를 살까, 이런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관심사와 일반 사람들의 관심사가 분명하게 대비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양분화 됩니다. 예수님은 양보 없는 말씀을 하셨어요. 예수님 말씀이 ‘너희는 이방인처럼 생각하지 말라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님은 양보 없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관심사를 하나님 나라와 의에 돌릴 것을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말씀이에요. 어려운 주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고 거절하게 되면 우리 생각 속에 어떤 양분화가 발생하느냐면 ‘주님의 관심사는 주님의 관심사이고 내 관심사는 내 관심사다.’라고 아예 담을 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다. 나는 땅에 살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고 주님은 내가 원하고 내가 갖고 싶고 나의 관심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나대로 살겠다.’ 

이렇게 아예 주님의 뜻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겠지만 남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이것은 신학이 아니고 실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을 하다보면 어차피 하나님은 내 사정, 나의 관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나도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하나님은 내 삶에 무관한 분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에게는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는 사람보다는 하나님과 내 삶이 무관하다고 정리해버리는 사람이 사실은 더 큰 문제에요.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32절입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없어도 될 줄 아시느니라’라고하지 않고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무소유를 가르치시지 않았어요. 무소유를 가르치셨다면 없어도 된다고 하셨을 텐데 예수님은 분명히 ‘이 모든 것이 있어야 될 줄을 아신다’고 했어요. 있어야 됩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구절이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이 모든 것을 너희로부터 빼앗으시리라’라고 읽습니다. 더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인간의 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애를 써서 얻으리라는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나에게 보태주시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싸우시고 하나님이 나를 대신하여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 그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어차피 내가 애쓴다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도 구할 수 없게 됩니다. 둘 다 잃어버리는 거예요. 둘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나에게 더해 주시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하나님이 더해주신다면 결코 실패할리가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나 대신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껏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습니다. 선비 문화에서 선비는 일하지 않습니다. 운동하지도 않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임금님은 스스로 걷지 않습니다. 남들이 가마에 태워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임금님은 다 성인병에 걸렸을 겁니다. 자기 발로 걷지도 않아요. 그게 철학에 의한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일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위해서 육일동안 일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지만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이제껏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살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것입니까. 

영국의 기독교 학자인 C. S 루이스는 세상에는 결국 두 종류의 사람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사람. 둘째는 하나님이 ‘네 뜻대로 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주님이 네 뜻대로 해라, 이렇게 내버려 두는 사람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전자입니다.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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