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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 (창 17:15~22, 1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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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 (창 17:15~22, 18:9~15)


(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 (18: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웃음의 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웃음을 좋아합니다. TV도 많이 웃는 프로가 인기가 있고, 설교도 많이 웃어야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게 웃을 형편은 아닙니다. 천안함 침몰 사고가 있었고 엊그제 실종되었던 젊은이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온 국민이 슬퍼했는데 1년 만에 또 이런 비극적 사건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웃음이 필요한 것은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인간은 늘 긴장하고 살 수 없습니다. 지치고 피곤할 때 적절한 유머는 사람에게 활력소가 됩니다. 우리 민족이 웃음을 좋아하는 이유도 삶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웃음의 힘은 웃을 때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 행복해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행복해서 웃는다는 말이 당연하겠지만 웃으니까 행복해지더라는 말도 말이 됩니다. 

실제 웃을 때 우리 몸 안에서 엔돌핀이라는 효소가 분비되는데 이 효소는 통증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웃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여러 의학 보고서가 있습니다. 크게 웃을 때는 몸속의 근육 650개중 231개가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15초간 박장대소하며 웃는 것은 100m를 전력 질주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웃는 것은 특히 우리 내장에 있는 기관들의 운동을 돕고 마사지하는 효과가 있어, 심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고 폐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며 항암효과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예부터 일소일소(一笑一少一怒) 일노일노(一怒一老)라 하였습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는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하루 평균 400번 정도 웃는 데 반해 어른들은 평균 6번 정도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른보다 오랜 사는 것 같습니다.(?)

천안함 사태가 오래 지속되니까 우리 아이들이 짜증이 났습니다. 아이들은 무엇보다 TV에서 재미있는 주말 프로가 사라진 것에 분해합니다. 고통에 동참하고 나누는 것은 좋지만 온 국민이 오래 동안 이렇게 심각한 얼굴로 이 사태를 지켜보아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옛날에 초상집은 소란스럽고 한 편에서는 도박도 하고 술에 취해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좀 볼썽사나운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한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잊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상주들도 이 소란 때문에 고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사람들은 대단한 자선가라 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코미디언 김미화 씨가 유언으로 자기 묘 앞에 세울 비문을 미리 정해 놓았다고 하며 그 비문을 읽어 준 적이 있는데  크게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비문은 이러했습니다. “웃기고 자빠졌네.” 죽어서도 다른 사람을 웃기고 싶은 코미디언의 본능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엎드리어 웃으며

우리가 읽은 오늘 말씀에서 유달리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웃음’이라는 단어입니다. 17절에서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었다”고 말씀합니다. 100세 된 자신의 몸과 이미 90세가 되어 죽은 자와 같은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보였던 반응입니다. 하나님 앞이기 때문에 엎드렸기는 하였지만 그 말씀은 믿을 수 없었기에 보인 냉소적인 웃음이었습니다. 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한 기한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사라는 속으로 웃습니다. 

12절입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는 도무지 불가능하고 이제는 포기해 버린 꿈을 다시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었기 때문에 웃었습니다. 이 웃음 또한 그냥 밝은 웃음이 아니라 냉소적인 웃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속마음을 알아보신 하나님께서 사라가 어찌하여 웃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엿듣고 있던 사라가 하나님 앞으로 뛰쳐나가며 “내가 웃지 않았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아니라 네가 웃었다” 하며 진실게임이 벌어집니다.

이 장면에서 ‘하나님 웃기시네’ 하는 듯한 사라의 실소와 그 내면을 들키고 발뺌하고 있는 사라의 당황한 모습이 코믹하게 들어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흔히 예수님의 초상화하면 근엄하거나 진지하거나 고통과 슬픔에 가득한 표정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상 중에 아주 파안대소하고 있는 웃는 모습의 예수님 초상이 있습니다. 지난 번 우리가 보았던 “JESUS”란 영화에서도 예수님을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제자들과 장난을 잘 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실제 예수님이 많이 웃으셨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라는 고통과 적대자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 주신 아름다운 세계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더 많이 접하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웃음과 신성을 잘 결합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것은 어쩐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우리는 ‘경외’라는 단어로 규정짓습니다. 경외라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 평화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웃는다는 것은 왠지 경망스럽고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도하면서 웃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더 웃기시려는 듯 사라를 추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냉소에 가까운 웃음인데도 하나님은 허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아마도 이슬람교일 것 같습니다. 하루 세 번 메카를 향하여 고개를 땅에 붙이고 엉덩이를 쳐들고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이슬람 교인들을 상대로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해 히트를 쳤습니다. 이 상품은 기도할 때 사용하는 카페트에 나침반을 단 것이었는데 이 나침반은 자동으로 메카를 향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실제 코란에 묘사된 알라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알라는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시이며 이 세상을 엄격한 법칙에 의해서 이끌어 가는 신입니다.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엄격한 율법을 제시하기에 사람들은 그 법칙대로만 살아가면 그들이 말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은 더 이상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신이 아닙니다. 머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그 앞에 부복해야 하는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우리 행위를 엄격히 심판하기 위해서 저울을 들고 있는 신이요 천국과 지옥으로 위협하는 신입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그런 권위를 포기하신 하나님입니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엄숙한 기념식에서 웃는 것은 경박해 보이고, 무채색 계통의 정장으로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있어야 예의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대로 웃어도 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만만히 대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이 넓고 넓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심지어 반항하는 것조차 하나님은 허용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대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담은 자기가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도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가인은 자기 아우 아벨을 자기 손으로 죽여 놓고도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오히려 짜증을 냅니다. 하나님이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 생활하면서 용기와 기상은 다 사라져버린 모세에게 하나님이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무려 다섯 차례나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하고 거부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3)하고 문제를 돌립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줍니다. 세번째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4:1) 하며 사람들의 거부를 예상하며 자신은 못한다고 발뺌합니다. 하나님은 그러자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에서 문둥병이 났다 사라지는 기적들을 보여줍니다. 네 번째는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고 하고 버팁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네가 할 말을 주겠다고 하며 다시 격려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에는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4:13) 하고 노골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도 화가 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4:14) 결국 모세는 억지로 끌려서 애굽 땅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의 이런 항거도 대단하지만 이런 인간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대로 싣고 있는 성경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이에 반한 인간의 항거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넓으심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온갖 하천으로 쓰레기와 더러운 물들이 흘러들어오지만 바다는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강물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나 심판자 이전에 바로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탄식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설사 그 면전에서 아브라함처럼 웃어도 그대로 봐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사장이나 왕의 말을 듣고도 그 자리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진지하게 설교하고 있는데 누가 웃고 있으면 저도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옹졸하신 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왜 저렇게 실소할 수밖에 없는지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나이 100세 된 사람이 아이를 낳는다고 하니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실수하고 많이 넘어지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였다고 하여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 눈물을 닦으시고 우리 한숨을 받아주십니다. 

웃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르라 합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바로 다음해 90세 되던 해에 사라가 아들을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사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시편 126편에서 고백하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시편 126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돌아오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126:1-2)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함박웃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납니다. 지난 번 우리 부흥회를 인도하셨던 목사님이 나이가 60세 가까이 되셨는데 손주가 아니라 이제 갓 돌을 지난 딸 아이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강사님과 같이 식사를 했는데 자기 딸을 보고 있는 이 분의 표정이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곁에서 보는 우리가 신기해서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이래 봐도 신기하고 감사하고 저래 봐도 신기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웃게 하시는 분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웃을 일이 참 많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주위에서는 흉흉한 소식들이 많아 답답합니다. 이웃과의 왕래도 별로 없고 자녀나 배우자들의 안전이 매우 염려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합니다. 세상을 보면 답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풀려나는 일은 졸지에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힘들고 언제 이 고난의 터널을 벗어날지 앞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현듯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 순간 마치 우리는 꿈꾸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며 조금만 더 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일시에 우리 모든 고통을 가져가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순간순간에도 우리에게 웃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웃어야 인생의 고비 고비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정말 함박웃음과 같은 은혜를 내리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어렵고 민주주의는 후퇴하는 것 같고, 또 남북 간에는 서로 으르렁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통일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총과 대포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 것이며 군함을 어선으로 바꾸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금강산도 백두산도 마음대로 관광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천안함 문제로 가슴이 아프지만 이것이 통일과 평화의 길로 가는 발판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독일에 갑자기 통일이 주어졌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통일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은 갑작스럽게 맞더라도 준비는 해야 합니다. 준비된 자에게 축복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갑작스럽게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그들은 그 포로기간 내내 말씀을 정비하며 말씀으로 정결케 하며 준비했습니다. 독일 또한 동독 사람들을 품을 마음의 준비와 경제적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도 찾을 수 있는 교훈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사태에서 두 가지 교훈을 깨닫습니다. 첫째는 다시 한 번 통일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갖게 합니다. 천안함 침몰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기뢰 등의 사고사일 수도 있고, 적에 의한 어뢰공격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어쨌든 그것은 남북 분단 상황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왜 그들이 그 시간에 무장한 채 그곳에 있어야 했습니까? 분단 상황이 아니었다면 대학과 사회에서 한창 젊음을 꽃 피워야 될 청춘들이었습니다. 이미 서해상에서는 1, 2차 연평해전과 지난해 대청해전까지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남북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고 이번에는 46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그것을 자신들의 승리로 미화하려 하고 보복하려 하고 조금만 허점이 있으면 공격하려 합니다. 얼마나 더 많은 목숨들을 잃어야 정신을 차릴 것입니까? 

불과 6개월 전인 작년 11월에는 대청도 부근에서 우리 해군과 북한군의 교전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해군은 4척이 1척을 향하여 5천여 발의 함포와 총을 발포하였습니다. 이 결과 북한 군함은 반파되었고 다수가 사망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군은 승리를 자축하며 대청해전이라고 명명하고 훈장을 추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역전되었습니다. 아직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어떻게든 응징해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쟁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한편 요즘 세대들은 통일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마치 남의 일처럼 귀찮고 번거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근 3주 넘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어둠의 그림자의 이 정체는 무엇입니까?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분단 상황을 인정하고 분단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통일이나 평화의 길로 가는 것은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며 직접적으로는 우리와 우리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북한의 낙후된 경제와 기근, 그리고 그들의 작은 체구나 영양상태, 또 억압을 피해 우리 곁으로 온 탈북민들의 가난한 모습들을 보며 우리는 자만해 있었습니다. 남북 간에도 어떻게든 경제적인 이익을 취해 가려는 그들의 가난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 우월해졌습니다. 말만 앞서고 말만 과격하지 실제는 허장성세라 하며 그들을 무시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최전선을 지키던 전투함이 어느 날 밤 맥없이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그 침몰 원인도 밝히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북한의 어뢰에 의한 것이라면 더 심각합니다. 도대체 정박 중에 있었던 것도 아니요 작전 수행 중에 있던 중무장한 전투함이 적이 언제 어떻게 공격하고 또 어떻게 유유히 사라졌는지도 모른 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까? 사고사일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허망한 것에 걸려 넘어진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잠언서는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절대 겸손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보수적인 호전론자들은 전쟁하면 우리가 곧 승리할 것처럼 보복공격하자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천안함 처럼 우발적인 사태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또 경제적으로 우리가 앞선다고 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형님일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가장 꼴 볼견은 돈 좀 있다고 거만 떠는 친척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겸손은 힘을 가진 자의 언어입니다. 그래야 북한 형제들의 마음을 얻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통일의 선물을 주심으로 함박웃음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빨리 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겸손하면서도 넉넉한 큰 형님의 마음이 없이 어찌 그들을 품에 안을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웃고 있는 사라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의 몸이 죽은 고목과 같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불가능성만 생각했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시기에 오래되고 낡은 것을 고쳐 새 기계처럼 만드시는 것은 오히려 간단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는 이런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온전한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건강한 웃음 갖기를 원하십니다. 냉소적인 웃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정말 기쁜 웃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웃을 일이 많습니까? 어렵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또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기대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이 즐거움으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이루신 일들로 인하여, 또 이루실 것을 기대하며 함박웃음이 가득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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