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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보셨습니까?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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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셨습니까? (행 3:1~10)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저도 당신처럼 될래요!>
 유명한 성형 외과 의사 가운데 맥스웰 맬츠(Maxwell Maltz)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 「Psycho-Cybernetics」(영혼 인공 두뇌학)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를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맬츠 박사가 직접 경험한, 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어떤 여자 한 분이 자기 남편 문제로 맬츠 박사를 찾아 왔습니다.  이 남편은 집에 불이 났을 때 자기 부모님을 구하려다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효성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구하지 못했고 두 분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죄책감으로 시달리는데다가 남편의 얼굴은 아주 흉측스럽게 일그러져 그 날 이후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고 골방에 갇혀 지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조차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맬츠 박사는 이 여자를 안심시키려고 했습니다.  "현대 성형 외과 기술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남편의 얼굴을 보기 좋게 고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나 부인이 정말 걱정하는 것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자기 남편은 불에 타 죽어 가는 부모님을 구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셔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문불출, 심지어 자기 아내조차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남편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 여인은 한 가지 매우 충격적인 제안을 맬츠 박사에게 했습니다.  "선생님, 저도 제 남편과 똑같이 되도록 제 얼굴도 일그러지게 만들어 주세요!  제가 남편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 이가 예전의 삶으로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제 남편을 정말로 사랑해요.  저는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요.  제 얼굴을 흉하게 만들어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저는 그 길을 택하고 싶어요."  

물론 맬츠 박사는 이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크게 감동을 받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결국 맬츠 박사는 자신이 직접 남편을 만나서 수술을 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남편이 갇혀 지내는 작은 골방문 앞에 가서 열심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맬츠 박사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나는 성형 외과 의사 맥스웰 맬츠랍니다. 나는 얼마든지 당신의 얼굴을 예전과 똑같이 고칠 수 있답니다."  그래도 방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맬츠 박사는 부인이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 부인은 당신이 밖으로 나올 수만 있다면 당신 얼굴과 똑같이 흉측스럽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이 끝나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무섭게 잠가져 있던 골방문이 삐꺽하고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남자의 고집스러운 마음을 풀어 준 것은 아내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남편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심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이웃을 고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관심과 사랑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옵니다.  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이와 같은 관심과 사랑을 가졌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사도 행전에서 베드로가 최초로 행한 치유 이적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걸인 한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쳤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변에 길 잃고 방황하는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우리가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제일 먼저, 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발견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대체적으로 하루에 세 차례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전 9시와 제 구시, 즉 오늘 우리 시간으로 하면 오후 세시, 그리고 해질 무렵에 각각 정시기도를 올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불쌍한 앉은뱅이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매 주일 아침, 매 주일 저녁, 매 주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 없이 고통 당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올 때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은 그저 늘 그렇듯이 똑같은 거리를 운전해서, 똑같은 곳에다가 자동차를 세워두고, 똑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예배당에 앉아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민감해지면 이 세상에는 우리를 향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성전에 올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령열에 불타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당에 올 때마다 여러분의 도움을 구하는 불쌍한 이웃들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열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② 미문(美門)이라는 성전 문 앞에는 앉은뱅이 거지가 세상의 은과 금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미문'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성전 문' 앞에 앉아있는 '불구자,' 얼마나 극명한 대조가 됩니까?  성전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데 그 앞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불쌍한 병자가 있다니, 이보다 더 오늘의 교회와 불신자들의 형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들것으로 날라다 주어야지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걸 행위를 해야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불쌍한 거지였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다른 사람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갈 때 손을 내밀어 구걸을 해야지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요 무엇보다도 내일에 소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름다운 성전 문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앉은뱅이처럼 추하고 불쌍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6절에 나온 베드로의 외침대로 이 사람은 은과 금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얻게되는 날은 이 사람에게는 횡재하는 날이요 재수 좋은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오는 시간에도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이 세상의 은과 금을 구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더 귀한지 잘 알지 못합니다.  땅에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은과 금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올 때마다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그들을 영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이 은과 금의 노예가 되어 산다면 더 귀한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을 것입니다.  6절에서 베드로가 크게 외쳤던 것처럼 은과 금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훨씬 더 귀하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그들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셋째로, ③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 거지를 주목했고(looked straight at him with intense purpose),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했고(trusted the power of God), 그의 고통에 직접 손을 댔습니다(touched his pain).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걸인 앉은뱅이를 주목했습니다.  주목했다는 말은 그냥 무심하게 쳐다봤다는 말이 아닙니다.  희랍어 원어로는 'athenisas'로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 NRSV는 'Peter looked intently at him,' 즉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는 말로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행 1: 10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하늘을 자세히 쳐다 볼 때 이와 똑같은 희랍어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행 7: 55에서 스데반이 순교 당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도 동일한 희랍어 동사를 사용합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구걸하는 소리를 듣기는 듣되 건성으로 듣고 대개 못 본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 앉은뱅이의 영혼의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주목해 보았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 불쌍한 거지 앉은뱅이를 향한 자비심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면 주목해서 그 영혼을 지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영혼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브라이언 브릿드웰(Brian Bridwell) 중령이 국방부 건물 복도로 걸어 들어가다가 테러범의 비행기 자폭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도착했을 때 브릿드웰 중령은 전신의 40%가 불에 탄, 2도 내지 3도 화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피부 이식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틀이 지난 후 대통령 영부인인 로라 부시(Laura Bush)가 브릿드웰 중령을 방문해서 부인인 멜(Mel)을 포옹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누군가가 브릿드웰 중령 부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부시 대통령이 병실로 걸어 들어 왔습니다.  대통령이 먼저 거수 경례를 했습니다.  

브릿드웰이 답례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데 15초에서 20초 정도가 걸렸습니다.  팔에 입은 화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거수 경례한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브릿드웰 중령이 손을 내리자 비로소 내렸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부하가 상관에게 하는 거수 경례 예법을 브릿드웰 중령에게는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한 영혼에게 이와 같은 관심과 배려를 보였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불행한 이웃에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시면서 여러분들은 누구를 보았습니까?  혹시 늘 그랬듯이 그냥 무심결에 스쳐 지나오지는 않았습니까?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려면 그 영혼을 주목해서 자세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비심이 넘쳐 나서 한 영혼을 자세히 주목한다고 해도 도와 줄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인가를 구했습니다.  아마 먹을 것이나 돈을 구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금방 알아차린 베드로는 자기에게는 은과 금이 없지만 자기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현존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은과 금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은금, 그러나 그 은금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훨씬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과 권위에 의지해서 앉은뱅이를 향하여 외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지는 놀라운 치유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입니다.  오늘 한 영혼이 죄와 죽음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권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철저히 신뢰했을 뿐 아니라 앉은뱅이의 오른 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touch'한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의 고통을 직접 어루만졌던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실천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선언했던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약 2: 17, 26).  베드로는 가슴 속에 불붙는 믿음을 'touch'함으로서 실천했습니다.   

사도 행전이 쓰여지던 시대에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불구자가 된 사람은 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신체적인 접촉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비심이 발동할 때 기껏해야 돈이나 던져주고 "쯧쯧" 혀를 차면서 지나가면 그만이었습니다.  괜히 손으로 만졌다가는 더러운 귀신이 자기에게도 옮겨 붙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유대 관습과는 달리 환자의 손을 직접 움켜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신체적인 접촉이 있었을 때 앉은뱅이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게 된 것입니다.  치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환자를 주목해서 보았고, 예수의 이름을 신뢰했고, 이제 잡아 일으켜 세웠더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이 신체적인 치유를 받은 앉은뱅이는 영적인 치유까지 받게 됩니다.            

넷째로, ④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고 걷고 뛰면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러분, 8절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몸만 일어 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가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기가 치유된 것이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불쌍한 영혼을 자비심이 가득한 채 주목해서 보았고, 예수의 이름을 절대적으로 의지했고, 그의 상처와 고통을 터치했을 때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⑤ 이와 같은 치유 이적을 바라 본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9절과 10절을 보세요.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아무도 하지 못했고 또 할 수 없었던 일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냈을 때 세상 사람들이 경탄스러운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positive impact,' 즉 긍정적인 충격을 세상에 줄 때 복음은 점점 더 활발하게 세상에 누룩처럼 번지게 될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오실 때 길거리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누구를 만나셨습니까?  그들을 어떤 생각으로 보셨습니까?  그저 늘 그랬듯이 무심결에 스쳐 지나왔습니까?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자비심과 긍휼이 가득한 채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 그보다 더 확실하고 능력있는 길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을 확신한다면 그들 곁에 가까이 가십시오.  그들의 상처를 감싸 안고 어루만지십시오!  이렇게 주목해서 보고, 믿고, 어루만질 때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옵니다!  은과 금이 비록 여러분에게 없다고 할지라도 가장 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여러분에게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그 이름을 상처받고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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