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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예수에 대한 반응 (눅 24:3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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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예수에 대한 반응 (눅 24:36~49)


내 용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활동하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 활동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나 만나지 않으시고 만나볼 사람만 만나보는, 숨어 다니신 듯 한 분위기의 사역을 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이때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면 효과가 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주변이나 우리 국민 전체가 다 기억하는 인물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사람이 분명히 죽어서 장사 지낸지 오래 되었는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나타났다면 국민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아마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세상은 뒤집힐 것입니다. 그 사람은 대형 집회 주강사가 되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그 사람이 설교하면 제일 효과가 있고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 한마디로 그는 언론 매체에서 중요인물로 취급되고 가는 곳마다 그를 보기 위해서 많은 인파가 몰려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를 죽인 자들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말한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면 이전보다 국민적 소요가 더 크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군인들을 시켜서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 하지 못하게 굳게 지키게 하라.” 이런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예수가 살아났다고 하면 온 나라가 뒤집힐 것을 염려한 걱정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온통 나라를 뒤집지 않으시고 몰래몰래 다니셨을까요? 박정희 대통령이 지금 살아나서 시청 앞 광장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다 생각해 보세요. 대한민국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굉장한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보고 가장 기절할 사람은 빌라도일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대제사장, 로마 군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혼란으로 온 세상이 뒤집힐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세상 만나게 되겠지요? 아마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대중 집회를 하셨다면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이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벌벌 떠는 빌라도를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자고 했을지도 모르고, 야고보와 요한은 평소 세운 계획대로 “아! 우리 때가 왔다. 헤롯 정부 다 물러나라.” 좌편, 우편에 미리 가서 앉아있을 것입니다. 숨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나와서 혁명 주체세력과 같이 임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은 약삭빠르게 돌변을 해서 예수 환영대회를 열어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왜 안하셨을까요? 그럴까봐 안하신 것입니다. 이미 그런 일은 다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군중집회에 온 예루살렘 시민들이 다 나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서 “호산나” 했잖아요? 그동안 메시야의 영적 권위도 보여줄 만큼 보여주었고 기적도 행하실 만큼 다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꼭 필요한 사람들만을 만나고 계십니다. 

흥분하고 떠들어봤자 똑같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일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예수가 부활한 것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자기 상관들에게 가서 보고했습니다. “그 예수가 정말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봤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많이 주면서 “너희들이 잠자는 사이에 시체를 도둑질 해갔다고 소문내라.” 그래서 군인들이 보따리로 돈을 받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제 예수는 예루살렘 광장에 얼굴만 내밀어도 세상이 뒤집힐 거 같은 분위기인데도 안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본질적 진리가 있습니다. 본질적 진리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교회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교회 본질이 있습니다. 본질만 따라가면 교회는 잘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들의 생각의 차이 때문에 언제나 갈등스럽게 나타나는데 예수의 부활사건에 대한 반응을 우리가 몇 가지로 규정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류 역사 초유의 사건을 통한 예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이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습니다. “메시야의 영광은 언제 나타날 것입니까?” 마지막 승천하실 때도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때를 자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벌써 요한복음 17장에 “나는 이때가 되었다. 벌써 왔다. 때를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내 영광의 때는 이것이다.” “그게 뭡니까?”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그것인데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적 판단을 하면 가장 처참하고 실패한 십자가 사건으로 봐야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때가 나의 영광이다. 이것이 아버지에게도 영광이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세상에 왔고 이것을 위해서 사역했다.” 제자들과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인류 초유의 사건인 예수의 영광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망의 권세 앞에 굴복 당하고 살아왔는데 인류의 가장 큰 문제인 영생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로 완벽하게 해결하시는 사건 “이것이 내 영광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아주 확실하게 나타난 것은 십자가 사건 전 까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는데 십자가 사건이 다가오니까 예수의 영광은 끝났다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때부터가 내 영광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인류 초유의 사건을 통해서 인류가 그토록 갈망한 영생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는 예수의 영광이 부활 사건과 십자가 사건에 조명되어 있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예수 믿고 살아왔는데 나의 영광은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하지만 우리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때를 시작으로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철학으로, 어떤 사람은 종교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가까운 중국의 진시황 같은 사람은 생약을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불로초도 있을 것이고 불사약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먹고 내가 불로장생하리라.” 그러나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사에 나왔던 몇 사람이 성인의 칭호를 받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가장 훌륭했다고 평가합니다. 소크라테스라든가 공자라든가 석가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평생을 통해 말한 진리성을 우리는 학교에서 다 배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Who am I?”의 문제를 들고 나와서 그를 가리켜 “내면 철학의 시조이다. 형이상학의 시조이다.”라는 평가를 하고, 공자는 인간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도덕률을 만들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의 가장 바른 길이다.” 도덕론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서 우리가 존경했고, 석가는 “인간의 고뇌의 문제는 초월할 수 없는가?” 그래서 이 고뇌의 문제에서 해탈하는 수양을 인간들에게 가르쳐서 존경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근래에는 공산주의 칼막스가 “빈곤에서의 해방과 계급 없는 평등 사회가 인간 구원이다.”라고 로맨틱하게 깃발을 드니까 젊은 청년들이 공산주의로 몰려간 것 아닙니까? 결국은 다 망했지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이 모든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목적으로 한 것이 영원히 인간이 존재하는 영생의 문제이요, 생명 불멸의 진리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선물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창조 이후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예수 이외에 인간 죽음과 영생의 문제는 아무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초능력적 성취의 부활은 영광된 예수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지구 안에는 이렇듯 예수 믿는 기독교 신자가 많아졌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그 당시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가장 가깝게 예수 곁에 존재했던 제자들마저도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아무도 믿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일은 모두 허무했고 꿈이라고 생각하고 누구도 예수님의 그 진리를 위해서 계속적 노력을 사역화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다 사라졌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3일 만에 부활하리라”고 수차 예언하셨지만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왜 믿지 않았는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 지낸 사람이 다시 소생해서 살아난 사건이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이 부활 사건은 바로 영광된 예수를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인간의 가장 궁금한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의 부활은 현실적 대답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는 아마도 히브리 민족 사이에 이야깃거리로 우리나라에서는 ‘전설의 고향’ 같이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난의 예수를 통해서 온 영광된 예수를 조명하는 부활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초이성적 사건을 접하는 제자들의 갈등이 조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간 것이 아니잖아요? 그 나라에 흔히 있는 장례 문화에 의해서 유대 나는 납골당 문화로 관 뚜껑을 열면 시체가 그냥 있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장례 문화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며칠이 지난 다음에도 향유를 발라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은혜가 고마웠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그 일밖에 없기 때문에 찾아갔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 이 사건을 접하는 제자들은 아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음이 오늘 성경에도 조명되어 있습니다. 

왜 심각한 갈등인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초이성적 사건이 현실적으로 자기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사건이 눈앞에 왔습니다. 오늘 말씀에 제자들의 갈등이 “이 말을 할 때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런데 그 예수를 바라보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지나간 3년 동안 자기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그 예수님이 현실적으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자연 과학을 초월하는 이 사건 앞에 제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을 합니다. 37절에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이 영으로서의 출현은 예수 아니고라도 어느 사회나 많이 있어온 이야기들입니다. 제자들의 이성적 판단은 “이것은 영의 출현이다.”라고 지금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이런 영의 출현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제자들의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 이성적 판단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을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있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영은 물질이 아닙니다. 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물질인 육체를 부활했다. 만져보라.” 이성과 초이성의 갈등이 온 순간입니다. 도마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이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즉 이성적으로 내가 믿을 수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내가 믿을 수 없다.” 이것이 이성 판단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만지게 해주셨잖아요? 이때 제자들은 “이 사건을 믿어야 옳은가?” 아니면 “우리들이 도깨비가 홀린 것인가?” 순간적으로 굉장한 이성의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물질적 육체의 예수를 확인한 제자들은 기뻐하면서도 오히려 의심이 많은 표현이 오늘 말씀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가지 증거를 더 확인시켜주십니다. “여기 혹시 먹을 것이 있느냐?” 이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이나 죽은 사람은 먹는 일이 없습니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제는 제자들이 안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너희에게 말한바 살아난다고 말했지 않느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살아나리라고 예언되어 있음을 내가 이미 가르쳤는데 왜 믿지 않고 이렇게 의심들을 했느냐? 

구약 성경에 나온 모든 예언이 나에게 초점되어 있다고 그렇게 많이 내가 가르치지 않았느냐? 그것이 영생의 길이요 인간 구원의 길의 마지막 사역이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인간의 확실한 실체를 예수님이 지금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한 나라에서 그 당시에 제일 비참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천지를 뒤집는 것과 같은 환호성의 승리감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때 희망의 얼굴로 군중들 앞에 나타났는데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그 행렬이 이루어졌지만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에게 최대 절망적 상실을 가져다주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절망과 상실의 자리에서 인생 최대 수확과 희망이 생기는 초이성적 사건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생선을 먹다니! 그렇다면 지나간 3년 동안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모든 이야기는 초이성적 현실로 진리가 아니냐?” 

여기에까지 도달했을 때 예수님은 “그렇다.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다.” 여러분 모두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죄에서 구원받고 천국가고 무덤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살고 하는 이 모든 문제는 초이성적 사건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이것이 이성적 판단으로 믿기 어려운 초이성적 세계의 말이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구원은 믿는 자만이 소유하는 축복이 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일이 이렇게 되니까 이제 남은 일은 한가지입니다. 제자들의 앞으로 사역에 대한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책임감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인간 구원의 지상 사역은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제자들이 하여야만 합니다. “할 것인가?” 지금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이 열심히 해온 일을 분석해보면 축제적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거의 가 다 군중 집회였습니다. 적어도 수천 명씩 모여든 집회를 통해서 부흥회 성격의 사역을 해왔습니다. 

거기서 나타난 기적의 사역도 군중 집회적 사역을 띄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를 먹여주실 때 일만 명 이상이 모였습니다. 기적을 베푸니까 사람들이 식사할 겨를도 없이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모였는지 가는 곳 마다 대중 집회, 군중집회의 성격으로 3년 동안 사역을 해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런 일이 다 지나갔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극히 제한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계신데 그 이유는 제자들의 사역은 이래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 앞에 나타나서 내가 살아났다고 군중집회를 열고 세상을 뒤집는 일을 해봤자 흥분하고 또 다 없어질 것이다. 이제는 제자들의 사역은 목회 차원에서 해야 한다. 조용히 뒷골목을 다니며 낙심된 자 하나를 찾아 용기를 주고 축제적 분위기의 기적적 사건을 연출하는 그런 선교가 아닌 목회적 차원의 고난의 길을 통해서 십자가를 이루어야 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셨다면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2천년 역사에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역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에티오피아 집회를 할 때 그 산을 올라갈 때 1만 명의 군중이 저를 따라 올라왔습니다. 거기서 내가 제일 심각하게 생각한 것이 오병이어였습니다. 

‘아, 하나님! 이런 때에 이 배고픈 군중에게 내가 무엇을 좀 나누어줄 수 있어야겠는데 무엇을 얻을까 해서 올라온 이 수없이 많은 군중들, 맨발로 다니는 이 배고픈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이들에게 예수님의 기적을 한번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빵이 5천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빵 1개 가지고 기도하면 5천명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며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 먹을 빵도 없었습니다. 그런 기적이 안 일어났습니다. 안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봤자 빵 먹고 흩어진 군중들이 그 다음에는 더 좋은 빵 주기 전에는 모이지 않는다.” 사역을 완전히 바꾸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매우 조용해지셨고 소극적이 되셨고 기적 없는 사역으로 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후에 제자들의 사역은 목회 차원입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마지막 때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이제는 예수 믿든가 말든가 한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는 예수와 같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아니할 때는 아니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의 사역이 인류 구원의 사역으로서 “이제는 앞으로 나의 제자들이 온 세상에 나가서 고난의 목회를 통해서 인간 구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대중을 끌어 모으고 세상을 뒤집어엎는 듯 한 이런 흥분된 군중집회보다 하나씩 몰래몰래 찾아다니면서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그래서 목회 사역이 변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주는 진리가 무엇인가?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이 영생의 진리는 이성의 판단인가, 아니면 초이성적 사건인가? 제자들마저도 이성을 가지고 초이성적 사건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당황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선물하시고 “이제 세상 구원은 너희들에게 달려있다.” 맡겨주시고 가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1대 1로 찾아오시고 현실적 목회 사역을 통해서 성령님의 내재성을 이루어 구원하심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조용히 사역하신 그 내용의 진리를 저희들이 잘 깨닫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훌륭하게 사역해 나갈 수 있는 지혜로운 아버지의 사역자들이 되게 하시고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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