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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소의 힘 2 : 850대 1 (왕상 18: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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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의 힘 2 : 850대 1 (왕상 18:36~40) 
 
 
❚너희가 먼저 해라

지난주일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의 대결이 바야흐로 시작되기에 앞서 엘리야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누구를 하나님으로 섬길 것인지 결단하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본격적으로 엘리야와 우상 선지자 사이의 대결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엘리야 선지자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송아지 두 마리를 각을 떠서 갈멜 산 제단 나무 위에 놓고 각자의 신을 부르자는 것입니다. 너희는 바알 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제단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는 분이 참 신이요 하나님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와 구경 온 모든 백성이 이 방법에 동의해서 이제 모든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두 종교 간의 한 판 승부가 벌어지게 됩니다. 제단에 불을 내리면 그 신이 진짜 신임을 인정받게 될 것이고 불을 내리지 않는 신은 가짜 신이니 모든 백성 앞에서 공개 망신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확실하고 공평한 방법입니까?

자, 그렇다면 이제 경기 방법은 정해졌고 정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순서입니다. 누가 먼저 도전하겠냐? 누가 먼저 송아지를 제단 위에 놓고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떤 쪽을 택하겠어요? 먼저 하는 것이 유리할까요? 나중에 하는 것이 유리할까요? 우리는 지난 밴쿠버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 스케이팅 경기에서 우리나라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가 대결하는 장면을 정말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습니다. 

기억나세요?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아사다 마오가 먼저 연기를 했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아사다 마오가 자신의 최고 기록을 넘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니 그 뒤에 연기한 김연아 선수가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상대방이 넘어지고 실수하면 뒤에 하는 내가 마음이 편할 텐데 경쟁자가 워낙 잘하니까 얼마나 긴장됩니까? 그런데도 그 어린 김연아 선수가 너무나 침착한 경기로 오히려 아사다 마오보다 더 잘했습니다. 더 놀라운 장면은 다음날 프리 스케이팅 경기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는 김연아 선수가 먼저 했는데 너무너무 잘 했어요. 그런데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사다 마오 선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연발해서 결국 이 경기는 김연아의 한판승으로 끝나고 맙니다. 보세요. 누가 더 유리합니까? 먼저 하는 것이 당연히 유리하지요.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먼저 잘하고 나면 뒤에 하는 사람은 정말 엄청난 압박감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예외가 있습니다. “너는 나하고 상대가 안 돼” 하고 확신하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먼저 해라.” 왜요? 절대 바알 선지자들이 응답 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세요. “너희는 많으니 먼저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아무리 숫자가 많으면 뭐합니까? 바알은 살아있는 신이 아닙니다. 바알은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일 뿐입니다. 그러니 결코 응답이 있을 수 없지요. 

엘리야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너희가 먼저 하라고 한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먼저 하든 나중에 하든 상관없이 그렇게 담대하고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실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아무리 잘 해도 나를 이길 수 없어,”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 확신을 가지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왜요? 너희가 믿는 신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내가 믿는 신은 살아계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자시오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응답 못 받는 기도

이제 먼저 도전하게 된 바알 선지자 450명이 제단 위에 송아지를 올려놓고 자기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들이 바알 신에게 제사한 방법을 한 번 살펴볼까요? 26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참 요란도 합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바알 신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릅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런데 아무리 불러 응답이 없으니까 이번에는 그 제단 주위에서 뛰며 춤을 춥니다. 얼마나 요란하고 정신없습니까? 그런데도 바알 신이 응답하지 않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합니다. 27절을 보세요. “야, 더 큰 소리로 바알 신을 불러라. 아마 바알 신이 잠깐 묵상 중이든지 아니면 잠깐 외출했나보다. 아니면 잠깐 아디를 가는 중인지 혹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니 더 큰 소리로 불러서 깨워라.” 하고 말입니다. 

참 기막힌 조롱입니다. 어떻게 신이 외출을 하고 잠이 듭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조롱한 것은 너희가 부르는 신이 참 신이 아니고 살아있는 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바알 선지자들은 얼마나 열이 받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더 열을 올리며 큰 소리로 바알 신을 부르면서 아예 자기 몸을 칼과 창으로 찌르고 베어 피가 줄줄 흐르게 합니다. 이것은 바알종교를 비롯한 우상종교의 특징입니다. 신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응답 없으면 더 크게 부르지요. 길길이 뛰면서 요란하게 부르고 그래도 안 되면 아예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흐르게 하면서까지 응답을 받으려 합니다. 

29절 보세요. 미친 듯이 떠들며 하루 종일 바알의 이름을 불러댑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응답 안 하고 배기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이런 행위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용돈 달라고 하면서 자해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조용히 말로 하면 되지요. 이렇게 요란 떨며 불러대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조용히 나아가 아뢰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바알 종교의 제사를 보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기도 자세가 단순히 바알 종교 같은 우상 종교뿐 아니라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도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 말입니다. 보세요. 바알 선지자들이 한 기도는 한 마디로 요란하고 정신없는 기도입니다. 게다가 신을 협박하는 기도입니다. 26절을 다시 보세요. 그들이 뭐라고 기도합니까?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좋은 말로 할 때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소리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왜 응답 안 하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피까지 흘리고 자해까지 해가며 기도하는데 응답 안 하고 배기냐는 것입니다. ‘자해 공갈단’이지요. 정말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기도입니다. 내 뜻대로 반드시 들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내 기도에 응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기도를 하나님을 협박하는 기도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이런 기도를 안 하는지요? “하나님, 좋은 말로 할 때 응답하세요. 제가 이렇게 기도하는데 안 들어주시면 됩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제가 복을 주셔야만 합니다. 응답해야만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도 제 기도에 응답 안 하시겠습니까? 정 응답 안 하시면 안 믿을 거예요.” 에이, 설마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할라구요? 아니요. 우리는 의외로 이런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한 번 여러분 자신의 기도를 녹음해 보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 달라” 뿐입니다. 기도 시작할 때 “하나님” 하고 나서 다짜고짜 “주세요” 하고 시작해서 끝까지 달라고만 하다가 “예수님 이름으로 주세요” 하고 끝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치 하나님께 마치 뭔가를 맡긴 것을 도로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처럼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용돈 안 주면 확 집 나가버린다는 아들처럼, 기도 안 들어주면 예수 안 믿어버린다고, 교회 안 다닌다고 하나님을 협박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실 목사가 제일 겁나는 말이 이겁니다. “자꾸 그러면 저 교회 안 나갑니다. 다른 교회 갑니다.” 이런 말 하면 얼마나 겁나는지 몰라요. 목사를 가장 확실하게 협박하는 방법이 이겁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하나님한테까지 쓰면 곤란합니다. 이런 기도는 결코 응답 받지 못합니다. 이런 기도는 우상 종교인 바알 선지자들의 요란한 기도, 자해 공갈형 기도, 협박하는 기도와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 우상 종교의 기도입니다.

❚오늘 알게 하옵소서

반면 엘리야 선지자는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까?

30절부터 보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숫자를 따라 돌 열두 개를 취해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 때문에 무너진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돌 제단을 빙 둘러 제법 깊은 도랑을 팝니다. 그런 다음 제단 위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를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습니다. 그러더니 이상한 일을 시킵니다. 통 네 개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총 열두 통의 물을 부으니 물이 제단에 넘쳐 그 주위에 판 도랑까지 가득 넘쳐흐릅니다. 이렇게 물을 부으면 불이 내리다가도 꺼질 지경입니다. 어째서 엘리야는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요? 그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내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으면 먼저 하든 나중에 하든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이번에는 제단에 물을 가득 넘치도록 부어서 백성들에게 확실히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이렇게 물이 넘치는데, 하늘에서 웬만한 불이 내려서는 꺼질 정도로 부었는데 이제 어떻게 되나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강력한 불을 내리셔서 이 제단을 태우는지 말입니다. 한마디로 확실한 시청각 교육을 한 것이지요. 마치 서커스단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저 아래에 쳐진 안전 그물망을 치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죽잖아?” 아니요. 절대 안 떨어진다고 확신하기에 모든 안전장치를 제거한 것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내리실 강력한 불을 확신하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강력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안전장치를 달지 마세요. 기도에 피해 갈 구멍을 만들지 마세요. 내가 기도하면 들어주실까 안 들어주실까? 들어주시면 좋고 안 들어주시면 할 수 없고 하는 식으로는 결코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제단에 물을 넘치도록 부어도 하늘로서 내리는 불이 태울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지금 내 처지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고난과 역경과 실패가 나를 가로막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그런 확신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이런 기도가 응답 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다음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36절과 37절에 나온 엘리야의 기도를 읽을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알게 하옵소서”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지금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십시오. 그런데 제가 유익 얻고 제 뜻대로 제 욕심 채우려고 응답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에 응답하셔서 저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따라하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내 뜻, 내 욕심을 이루려는 기도가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 세상 만민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습니다. 100퍼센트 응답 받습니다. 

같은 기도라도 “하나님, 병 낫게 해주세요”나 “하나님, 돈 좀 벌게 해주세요” 보다 “하나님, 내 병을 고쳐주셔서, 남들은 다 안 된다고 하는 이 병도 고쳐주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게 해주세요.” “제게 물질을 주시면 그 물질로 하나님의 영광 위해 멋지게 쓰겠습니다.” 하는 기도는 더 크고 놀라운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알 선지자들처럼 “내게 응답하소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하옵소서,” “나를 도우소서”보다 “이 기도를 응답하셔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도가 백퍼센트 응답 받는 기도인 것입니다.

❚응답 받는 소수

결국 하나님은 이 엘리야의 기도에 놀랍게 응답하십니다. 왜요? 엘리야의 기도가 하나님을 협박하는 기도도 아니고, 나를 위한 기도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36절부터 보세요. 하늘에서 여호와의 응답의 불이 내립니다. 번제물과 나무뿐 아니라 제단과 흙까지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습니다. 특별히 ‘핥는다’는 표현을 쓴 것은 마치 혀로 물 한 방울까지 싹 핥아먹는 것처럼 불이 그 도랑에 가득한 물을 한 방울도 안 남게 모조리 태웠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강력한 불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로다. 과연 여호와만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모조리 붙잡게 한 후 기손 시냇가로 내려가 다 죽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엘리야는 세 가지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첫째로는 제단과 그 위에 놓인 제물과 거기 부은 물을 다 태워버립니다. 제단과 제물을 태웠다는 것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뜻인데 거기 가득 넘치도록 부은 물도 태워졌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모든 안 좋은 환경, 어떤 방해나 난관도 다 기도로 태워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기도하면 그 어떤 문제도, 그 어떤 방해나 난관도 다 불로 태워 응답 받을 줄로 믿습니다.

둘째,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있던 의심과 불신, 우상숭배를 싹 태워버려서 그들로 하여금 오직 여호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믿게 합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의심이나 불신앙, 하나님께 응답받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엘리야는 불로 응답 받은 후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하나도 남김없이 잔인하게 다 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무서운 우상숭배의 뿌리를 뽑아버립니다. 성령의 불로 죄와 의심을, 우상숭배와 이기심과 게으름과 나약함을 다 죽이고 태워버린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태우고 없애버리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41절부터 보면 비가 내립니다. 3년이나 내리지 않던 비가 내려 가물어 갈라진 대지를 적십니다. 그렇습니다. 불로 응답 받아 근심, 걱정, 의심, 불신앙, 질병과 고통과 모든 난관을 다 태우고 나면 비로소 거기에 능력이, 은혜가,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소낙비처럼 내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의 기도는 “나를 위해 하나님이 응답해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응답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또한 엘리야의 기도는 불로 응답받아 모든 죄와 의심과 우상숭배와 게으름과 나약함을 단숨에 태워버린 기도였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 이런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은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강력한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소수라도 그들을 통해 능력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어떤 기도입니까? 내 뜻대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 원대로 하나님이 맞춰주시고 응답해 달라는 그런 떼쓰는 기도, 협박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비록 내 소망은 이러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기도입니다. 이런 순종의 기도, 하나님 영광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응답을 받은 예수님 단 한 분만으로도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모든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는 공통점이 있어요.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언제나 기도 응답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언제나 불로 응답받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나라와 민족을 세울 수 있을 터인데 이런 소수의 능력자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엄청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불의 역사가 바로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 사업과 이 나라 이 민족 위에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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