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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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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 (왕상 19:1~8)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

• 넘어짐도 때로는 은총이다

가끔 손에 붕대를 감거나 반창고를 붙인 교우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웬일이냐고 물으면 대개 넘어졌다고 말합니다. 어지러워서 넘어지든 뭔가에 걸려 넘어지든, 넘어질 때의 그 당혹스럽고 허전한 느낌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 현관에서 어르신 교우들을 맞이할 때마다 혹시라도 높낮이가 다른 바닥에 걸려 넘어지시지 않을까 싶어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닙니다. 기운이 있는 이들은 뭔가에 걸려도 중심을 잃지 않지만, 기운이 없는 이들은 작은 돌부리에 걸려도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마당이나 운동장에서 뛰고 또 뛰는 아이들을 보면 절로 ‘저 아이들이 곧 생명 덩어리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육신의 기력이 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내면의 기력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시간에 쫓기듯 분주하게 살다보면 마음의 여백은 점점 사라지고, 사고도 경직되게 마련입니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마음의 균형을 잃을까봐 신경을 쓰다 보면, 다른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 곁에 어떻게 오래 머물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들의 품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어느 교우 집에 가서 읽은 성경 말씀입니다만 바울 사도는 자기를 찾아온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사람들은 나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고전16:18)고 말합니다.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 그는 자기 내면에 기운이 생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유연하게 사고하고, 어지간한 위기가 닥쳐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면에 기운이 가득 찬 사람이라 해도 기력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어찌 보면 기운이 빠지는 것은 복이기도 합니다. 기운이 빠질 때라야 자기 외부의 세계가 아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둔 밤을 체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깊이를 모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어둠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빛을 은총으로 체험하겠습니까?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세찬 기운을 가지고 산 사람은 아마도 엘리야일 겁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도 심한고난 앓다가 죽지 않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합왕 때입니다. 

• 건곤일척의 싸움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이세벨은 많은 혼수품과 함께 바알 신앙을 가지고 왔습니다. 풍요의 신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사람들은 평등공동체 수립이라는 출애굽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풍요’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우정과 환대 그리고 돌봄과 나눔이라는 공동체적 가치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흉허물 없이 지내던 마을 공동체가 개발의 바람을 타고 들어온 돈 때문에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아합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힘을 가진 이들은 약한 이들을 윽박지르거나 속이거나 살해함으로써 자기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지키려다가 죽임을 당한 나봇은 그 시대 민중들이 처해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인간 세계의 소통이 막히면 자연조차 황폐해지게 마련인가 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흘러야 할 사랑의 기운이 막히면 땅도 하늘도 막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등장한 예언자가 엘리야입니다. 그는 일찍이 아합에게 나가 여러 해 동안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왕상17:1b)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삼년 가뭄이 있은 후 엘리야는 다시 아합과 만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언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누가 과연 참 하나님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모인 백성들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18:21) 그러나 백성들은 예언자의 시선을 피하며 묵묵부답입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은 어느 분이 참 하나님인지를 한번 따져보자고 합니다.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소를 잡아 각을 떠서 올려놓고 각자의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불을 내려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찌르며 광란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제단 가까이 불러 모으고, 이스라엘 지파 수대로 돌을 모아오게 해서 무너졌던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나뭇단 위에는 각을 뜬 소를 올려놓았습니다. 

제단 둘레에 두 세 말 들이 곡식이 들어갈 수 있을 넓이의 도랑을 파고는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채워다가 제물과 나뭇단 위에 쏟으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일을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아시는 바대로 4는 땅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이고 3은 하늘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12통의 물이 부어지자 도랑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한 일임을 사람들이 깨닫게 해달라고, 그리고 주님만이 주 하나님이시고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다 태웠고, 도랑 안에 있던 물까지 다 말려버렸습니다. 백성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혀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하고 외쳤습니다. 

신적 분노에 사로잡힌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붙잡아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기손 강가로 데려가 모두 죽였습니다. 그런 후 엘리야가 비를 내려달라고 일곱 번 기도하자, 바람이 일고 짙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람과 구름과 비를 다스리는 것은 바알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임을 넌지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 도망자의 고독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옛날에 벌어진 일의 도덕적 정당성을 묻는 일은 적절치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얼마나 크게 흔들렸는지, 그래서 출애굽 정신의 회복을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이 필요했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왕비 이세벨은 이를 갈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언합니다. 만일 그를 내일 이맘때까지 죽이지 않는다면 신들에게서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라면 이런 위협 앞에 흔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야가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고 말합니다.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었던 엘리야에게 적용된 단어들을 보십시오. 

‘두려워서’, ‘급히’,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엘리야는 영웅에서 졸지에 반(反)영웅으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인간입니다. 어떤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고 난 후에는 무력감이나 공허감이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엘리야가 그렇습니다. 그는 고독합니다.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뙤약볕 밑을 터벅터벅 걷다가 그는 로뎀 나무 그늘 아래 앉습니다. 그는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4)

그런데 혼곤한 가운데 잠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던가요? 잠은 엘리야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독의 심연으로 내몰리던 그의 마음에 틈을 만들어줍니다. 팽팽하게 곤두섰던 그의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때 한 천사가 그를 깨웁니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가 잠든 동안 주님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듯 그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계셨을 겁니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릅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감동합니다.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훈계하지 않으셨습니다.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의 절망과 두려움까지도 품어 안으시고 그에게 꿈조차 없는 단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말없이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마치 중력처럼 그를 절망으로 잡아당기던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일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겁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이 장면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 광야의 식탁

하나님의 도움은 이처럼 구체적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떠나온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거리가 미를 창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떨어져서 바라보면 고통스럽던 과거도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현실의 고통이 언제나 가장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먹을거리가 떨어지자, 하늘에서 먹을거리가 공급된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입니다(출16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후 실의에 빠져 옛 생활로 돌아간 제자들은 밤새 바다에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동틀 무렵 해변에 선 어떤 이의 말에 따라 그물을 던지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해변에 서계신 분이 예수님임을 알아차렸습니다. 황급히 뭍으로 올라와 그들이 본 것은 숯불 위에 놓여 있는 생선과 빵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 등을 돌렸던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낙심한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내셨습니다. 그것은 말 없는 용서였고, 너희들은 여전히 나의 사랑받는 제자라는 침묵의 선언이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의 그 식사는 제자들의 마음을 주님께 확고하게 비끄러매는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요21장).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탄 배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의 위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리라고 소망을 불어넣으면서 사람들에게 음식을 권합니다. 사람들은 확신에 찬 바울의 말에 따라 용기를 내 음식을 먹었고, 결국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행27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도망자 엘리야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살아갈 방도를 잃어버린 히브리인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 십자가 사건 이후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던 제자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살아갈 희망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천안호 희생자들과 금양호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애통의 시간이 지나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진정이 담긴 따뜻한 손길이면 족합니다. 낙심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수성찬이 아니라 어떤 시시비비도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형제자매입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기독교인인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이 아름답지만 처연한 봄날, 우리의 닫힌 마음이 이렇게 열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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