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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증인 (행 5:27~32, 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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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행 5:27~32, 40~42)


주님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교단총회에서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오늘 장애인주일로 정하고, 지킵니다. 오후찬양예배시간에, 장애인주일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15일(木)에 천안함 함미를 인양하면서, 그동안 애태우던 실종자 46명 중 36명의 주검을 수습했습니다. 천안함 사태가 터졌을 때, 나타났던 일차적인 반응은, 군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이 해군입대 기피현상이 일어났습니다(아들 가진 부모심정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저도 아들을 둔 아빠인데,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 아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사실 많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16일(금)자 신문에, 큼지막한 사진 한 장이 보도 되었습니다. 울산시 신정동에 있는 울산공업고등학교 로봇전기과 학생들이, 학교선배인 천안함 戰死者 신선준 중사를 애도하는 사진입니다. 한겨레신문은, 그 사진에 “선배님 못 잊을 겁니다”는 제목을 붙여 놓았고, 조선일보는 동일한 사진을 보도하면서 “선배님처럼 멋진 군인이 되겠습니다”는 제목을 썼습니다. 비록 사진 한 장에 지나지 않지만, 저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컨퍼런스 강사로 내한한,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 박사가, 오늘의 교회를 가리켜 重患者라고 진단했습니다. 病名은, '예수 결핍 장애증(JDD : Jesus Deficit Disorder)'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예수’가 없는 병입니다(백혈병; 혈액 속에 비정상적인 백혈구가 생성되면서 적혈구와 혈소판이 감소, 혈액기능마비). 어느 교회가 그런 病을 앓고 있는지 궁금하시지요? 자가 진단도 가능합니다. 멀리 가 보실 필요 없습니다. 자신을 진단해보면, 진단결과가 금방 나옵니다. 혹, 내가 ‘예수 결핍 장애증’ 患者인지, 아닌지 진단해 보면 압니다. 만일, 내가 예수 결핍 장애증 환자라면,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라는 이야기입니다.

한 때 립싱크 하는 가수들이 많았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공연장에서 공연할 때, 라이브로 노래하지 않고, 최상의 컨디션에서 녹음한 음반을 틀어놓고, 입술 모양을 음반소리에 맞추는 기술을 립싱크라 하지요. 최근 중국에서는 립싱크 하는 가수에게 벌금을 매겼다고 합니다. 예수 결핍 장애증을 앓는 그리스도인은, 립싱크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립싱크 하는 가수는, 입 모양은 벙긋거리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레너드 스윗 박사님은, 립싱크만 하는 교회,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벌금을 매겨야 하지 않느냐 했습니다. 

예수 믿는 이유가 항상 행복한 삶, 항상 성공하는 삶, 항상 잘 되는 삶에만 있다면, 그런 사람 립싱크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요즘 좋아하는 노래 가만 보십시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복음송만 좋아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나와 福音을 위하여, 집이나 兄弟나 姉妹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子息이나 田土를 버리는” 고난, 희생, 자기 부인에는 관심 없습니다(막 10, 29-30). 그저 사랑만 받아야 하고, 그저 위로만 받아야 하고, 그저 성공해야만 하고, 그저 형통해야만 하고, 무조건 잘 되어야만 합니다. 그 의미는 世俗的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지난 주간, 부목사님 몇 분과 전라남도 신안군 소재 천사의 섬에 다녀왔다, 증도 주민 95%가 예수 믿는다, Slow City지정, 담배 술 없는 市; 문준경 전도사 순교자영성; 요한삼서 2절 삼박자구원).

우리는 부활신앙 하면, 부활절 아침,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女人들,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절망하던 불신앙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마치 復活信仰의 全部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런 면이 있습니다. 우선은, 女人들과 弟子들이 그런 과정을 밟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 틀림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빈 무덤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사실이 곧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빈 무덤이 그들에게, 온 인류에게 새로운 역사적인 희망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까? ‘두려움’에 떨던 그들에게 ‘평안’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에게 일시적인 ‘침묵’을 가져다주었지만 부활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 도리어 ‘변증’하기 시작합니다(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노라 증언; 復活證人). 그리고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다시 갈릴리로 갑니다. 갈릴리로 가서, 무엇을 합니까? 다시,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시작하는 使徒들로, 새 출발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이, 復活信仰의 全部일까요? 그렇잖습니다.

사도행전에 오면 부활신앙은, 그저 단순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부활신앙이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부활신앙은, 단순하게 예수님 부활을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 받는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 그 분의 십자가 사건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전파합니다. 그러다가 유대종교 당국자들로부터 아주 위험한 抵抗을 받습니다. 고난당하기 시작합니다. 投獄됩니다. 채찍 맞습니다. 凌辱당합니다. 단순한 부활사실을 믿는 신앙에서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證人으로 섭니다. 

부활신앙의 질이 바뀐 것입니다. 그 바뀐 부활신앙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고 즐거워하는 삶의 방식도 바뀝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과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苦難의 意味가 바뀌고, 苦難의 理由도 바뀌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단순하게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이름, 그 분의 나라(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도 받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우리의 부활신앙 수준이 여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사도행전 4, 34이하 말씀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主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中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者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대표적인 인물, 구브로 출신 요셉이라는, 바나바),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부활의 증인 된 사도들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표적을 행합니다. 그 때, 예루살렘 교회 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事件’이 터집니다. 사도들에게 인정받은 ‘바나바의 리더십’을 탐한 사건입니다. 그들도 땅 팝니다. 땅 판 값 얼마를 숨기고는, 일부를 사도들에게 가져옵니다. 가져온 底意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얻은 ‘바나바’의 명성(名譽)을 탐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말을 한 셈입니다. 땅 판 값 일부를 가져오고는, 땅 판 값 全部인양 속입니다. 결국, 사도들을 속이는 죄가 아니라, 성령을 속이는 죄가 되고 말지요. 

성령을 훼방하는 죄, 사함 받지 못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편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죽임 당합니다. 그 사실도 모르고 의기양양한 모습, 거짓된 마음, 명예를 탐하는 그 마음으로 성전에 들어오던 그의 아내 ‘삽비라’ 역시 거짓말합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예, 이것뿐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너희가(남편과 아내) 어찌 함께 꾀하여 主의 靈을 試驗하려 하느냐 보라, 네 男便을 葬事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두 夫婦가, 한 날에 죽임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임당한 사건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순결성’(原像; 本像)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긴급조치(‘교회 안 가지치기사건’)입니다(비상사태). 예루살렘 온 교회가, 그 사건을 듣고 크게 두려워합니다(행 5, 11). 그러면서, 믿는 사람들이 다, 마음을 합하여 모이면서 더욱 결속하지요.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교회내부적인 사건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 외부적인 사건도 터졌습니다.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자, 사탄도 사력을 다해서 저항했습니다. 유대종교 최고의회인 ‘산헤드린공회’가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근심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5, 17 말씀을 보면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猜忌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獄에 가둡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獄에 가두었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獄門을 열고, 끌어내어, 가서 聖殿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게 하십니다.” 사탄이 저항하는 것이 무서워 보이지만, 하나님도 가만 계시지 않습니다. 獄에 가두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은 잠근 獄門을 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獄門을 여시고 사도들을 옥 밖으로 끌어내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세워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당국자들이 또 어떻게 합니까? 사도들을 (다시) 끌어다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세워 심문합니다. “우리가 이 이름(예수)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嚴禁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十字架에 죽인 죄 값)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이야기지요.

우리가 사복음서 말씀을 읽어서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3년 동안, 하나님 나라 운동 하실 때, 유대당국자들은, 事事件件, 예수님의 말씀하나, 행동거지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의 말대로, 유대당국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파괴주의자의 大家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은, 유대종교 당국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가르치던 율법(토라), 전통, 율례, 규례들을 완전히 허무시는 破壞主義者였습니다. 산상수훈이 그런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신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 가르침은 권세 있는 자와 같았습니다. 저희 서기관들과는 같이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권위 있는 자들의 말과 글을 인용해서 똑똑한 체하면서 “가말리엘이 이렇게 말했는데…, 가말리엘이 저렇게 말했는데…” 하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그렇게 듣고 배웠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But I say to you) 하셨지만, 그 말씀은 곧 권위 그 자체였고, 진리였습니다. 어찌,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런 예수님 가르침이, 유대당국자들의 마음에 들 리가 있겠습니까? 부활신앙을 가진 사도들 역시, 동일한 예수님의 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니, 눈엣가시지요. 핍박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겁도 주고, 회유도 해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順從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悔改함과 罪 赦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세상 나라 임금이 아닌, 하나님 나라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證人이라” 합니다.

결국, 유대당국자들은 怒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使徒들을 없애고자 합니다. 랍비 가말리엘의 중재로, 채찍질당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는 정도로 놓임을 받습니다. 그 때, “사도들은, 그 이름(예수 그리스도)을 위하여 凌辱 받는 일에 合當한 者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公會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聖殿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傳道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 41-42). 아멘.

우리의 부활신앙이, 이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성공하고, 항상 행복하고, 항상 잘 되기 위해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과 그 복음을 기뻐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회사 사무실에서, 학교에서, 공장에서,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기뻐하십시오. 자랑하십시오. 언제까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노래만이 우리의 노래이어야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형용사가 필요 없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립싱크 ‘그리스도인’이 워낙 많다보니, 그냥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사는 인정안 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앞에, ‘참’자라도 붙여야 인정해 줍니다(‘참’ 그리스도인). ‘참’이라는 접두어라도 붙여야,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사가 빛이 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목회자’, ‘목사’면 되지, 그것만으로는 안 되니까, 다른 수식어, 온갖 직책이 나열된 명함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냥 ‘교회’면 되지, 그것만으로 안 되니까, 자꾸 수식어를 갖다 붙입니다(후배 목사님, 교회이름을 ‘교회다운교회’, ‘건강한 교회’, ‘바로 그 교회’, ‘기다리던 바로 그 교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사가 아무런 수식 없이도, 그냥 ‘온전한 명사’는 못 되는 것입니까? ‘기독교’라는 명사가 아무런 수식 없이도, 그냥 온전한 명사가 못 되는 것입니까? ‘목회자’라는 명사가 아무런 수식 없이도, 그냥 온전한 명사가 못 되는 것입니까? 이런 수식어를 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회복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인생을, 단식부기만 하면서 살면 안 됩니다. 단식부기만 하며 살다보면, 스스로 속습니다(앞으로는 버는 것 같은 데, 돌아보면 밑진 인생입니다). 자산과 부채가 한 눈에 보이는 신앙과 인생의 복식부기를 해야, 자신을 잘 진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쪽 눈 감고, 예수 믿지 마십시다. 사도 바울은 신앙의 대차대조표를 두 눈으로 보면서, 주님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생각건데, 現在의 苦難은 將次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하지 않았습니까?(롬 8, 18) 

이제, 우리의 기도를 바꿉시다. “성령을 주옵소서. 예수 그 이름을 높이는 자 되게 하옵소서. 그 이름을 위해서 凌辱 받는 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 속에, 신앙 속에, 이 기도가 성취되는 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믿음 있노라 하지만, ‘예수 결핍 장애증’을 앓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성령을 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자랑하게 하시고, 그 이름 위하여 증인 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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