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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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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행 3:1~10)
  

오늘 교회는 장애우와 함께 예배를 드린지 1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실로암 대학을 통해 참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장애우와 함께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장애라고 하는 것은 정말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애인 전부 가운데 6%~10%에 불과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6-10% 범주 안에 장애인들이 있어요. 또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인구의 10%이상은 장애인이란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라면 우리나라에 장애인이 얼마나 될까요? 500만이 장애인이라는 통계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장애인 문제를 함께 나누기 앞서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장애인의 운명을 살아가고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육신은 멀쩡해도 영적인 장애를 가진 분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대지’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의 외동딸이 자폐증이면서 정신 지체아였습니다. 여사가 딸에 대해 쓴 글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지 모른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내 딸 아이가 지금 죽어준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대와 실망, 끝없는 고통. 그러나 그 딸에게서 배운 점이 있다. 나는 그 누구에게라도 존경과 경의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능만으로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음도 배웠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결코 체념하지 않고 내 딸아이를 자라지 않는 아이로 만든 운명에 저항할 것이다.”      그리고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환경 속에서 자기 아이를 통해 다시금 겸손하게 인생을 들여다보는 깊은 영적인 통찰력이 생겼노라고, 새롭게 열리는 삶의 신비로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들을 보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편안했다면 혹은 비장애인이었다면 보지 못했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장애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속의 발자취를 보면 그 분과 장애인의 접촉이 그의 생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장애인들은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면 앉은뱅이가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나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남의 도움이 아니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걷지도 못합니다.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한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앉은뱅이로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한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나타난 많은 이적기사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한 가지 들어서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중년 남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내용자체가 지닌 의미도 대단한 것이지만 예루살렘 교회에 미친 영향 역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2절 말씀을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매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은 자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구걸하는 장소에 스스로 올 수조차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구걸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거지였고, 사도행전 4장엔 그가 40여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40여 년 동안 장애자로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버려졌습니다. 

그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태어나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자신은 꿈을 펼칠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외적인 장애와 함께 내적인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좌절하며 살아왔습니다. 그의 삶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얼마를 적선해주느냐에 따라서 그 날 하루 삶의 질이 결정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있는 장소가 ‘미문’입니다. '미문'은 한자어로 '아름다울' 미(美)자와 '문' 문(門)자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문'이란 뜻입니다. 

그 아름다운 문 앞에 가장 대조적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채 구걸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앉은뱅이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40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40여 년을 살면서... 하체가 마비된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희망이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때는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20년 세월이 흐르고, 30년 40년을 살았지만,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그는 절망하다 못해... 체념한 체로 하루 하루를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의 원망과 탄식을 들어야만 했을 것이고,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비아냥도 참고 많은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비록, 성전 문 앞에까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그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길거리에서 동냥이나 해서 먹고살라고... 그를 길거리의 거렁뱅이로 방치했습니다. 

어떤 장애인 문제 연구소를 보니까 장애인들이 제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입니다. 제일 큰 불편 가운데 육체적인 불편은 맨 마지막이예요. 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이예요. 장애인이 되면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의 발생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예요. 상당히 사회적 책임이 커요. 우리 사회가 이런 산업재해를 발생시키고 그리고 교통 시설도 그렇고 그렇다면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돼요. 교회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소외감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심합니다. (은혜 자매) 

여기 이 장애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성전 미문에 누군가가 데려다 놓으면 늘 상 해왔던 대로 구걸하는 인생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 3절에 보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여기 ‘구걸’했다는 단어는 우리말로 ‘동냥’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어떻하든 좀 더 애처러운 모습을 하고 수간 순간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서 자신의 빈 그릇에 돈을 채우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보세요 그가 앉아있는 현장은 성전 문 앞입니다. 성전에 나가면서도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거나 영생을 얻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물질만을 원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 중요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에 나가는 사람들의 돈주머니였습니다. 사실 그들이 던져주는 돈이 앉은뱅이에게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책임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향하여 예배를 드리려 가지만, 어느 누구하나 이 구걸하는 병든 영혼에 대하여 부담을 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그가 원하는 돈 한푼을 던져주며 그의 형편에 동정할 뿐이지, 어느 누구도 이 불쌍한 영혼을 일으키려는 열망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장애인들의 영적 회복을 돕는 일입니다. 

1.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구체적으로 땅을 바라보고 돈을 바라보는 그에게 ‘우리를 바라보라’라고 외칩니다. “우리를 보라,” 참으로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합니다. 주목은 다른 데를 보지 않고 한 곳만을 집중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쳐다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바라봅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이렇게 눈과 눈이, 마음과 마음이 마주칠 때에 베드로가 말문을 엽니다. 

6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한푼 동냥에 인생을 걸었던 그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외칩니다. 나는 네가 원하는 돈은 없다. 그것을 구하려면, 너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라. “예수의 이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자 거리에서 베드로가 외쳤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장애시인 송명희 시인의 시중에 ‘그 이름’란 시를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내게 있는 귀한 비밀, 오 나는 말할 수 없네/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렇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비밀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걸고 탐색하고 찾아도 다 헤아릴 수 없는 비밀입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끝나도 저 영원까지 계속될 비밀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구원의 기쁨, 섬김의 기쁨은 그분의 이름이 지닌 영광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증거 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지상의 모든 이름들을 잊을 마지막 순간에도 붙들어야 할 유일한 이름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2. 그런데 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를 외쳤던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여러분, 이 성전 미문을 지나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난 날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전형적인 어부들입니다. 당시 이들은 세상 앞에 소외된 자들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던 천민들이었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제자가 될 만한 어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혈기 부리기가 일쑤이고,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너무 강한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믿음 없는 행동하다가 예수님께 호되게 책망들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길 마음이 일어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시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 마음속에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삶이 변화하기 전의 눈으로 볼 때까지만 해도, 앉은뱅이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넘치기 시작할 때 비로서 그들은 주님의 관심과 뜻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하셨기에,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담은 두 사람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앉은뱅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어떤 사건을 들은 사람은 그 사건을 알고, 어떤 사건을 본 사람은 그 사건을 기억하며, 어떤 사건을 체험한 사람은 그 사건을 진실로 이해한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 지금 성전 미문을 들어서는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뿐이겠습니까? 숱한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갔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의 마음이 그를 송두리째 붙잡고 있었기에 담대하게 앉은뱅이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자! 여기 보세요!! 여기 7-8절을 보십시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여기서 베드로의 놀라운 위대성을 봅니다. 그는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볼 때면 김익두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아주 오래 전, 김익두 목사님이 앉은뱅이를 고친 일이 있습니다. 처음 그를 고치려고 할 때면 먼저 누가 보나 안보나 하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소리쳤답니다. 그랬더니 그 앉은뱅이가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뭐요?"하더랍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의 약한 믿음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며칠 동안을 기도하고 금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렇게 김익두 목사님은 능력의 종으로 평생을 일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을까요? '혹시나 안 일어나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대체로 이런 정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성전 미문 앞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합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은사입니다. 여러분, 나사렛이란 이름은 그렇게 좋은 뜻이 아닙니다. 따돌림 받는 이름입니다. '촌놈, 촌뜨기' 란 뜻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찮은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이름입니다. 

사도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지금도 그 이름을 고백할 때, 약한 자가 강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쓰러진 자리에서 그 이름을 부를 때 다시 그분은 내 인생을 세워 주십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나의 텅 빈 마음, 그 빈 잔에 은혜를 부어주셔서 내 심령에 생수의 강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흐르게 하십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 역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삶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죽어 가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자살하려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혼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인생을 파괴해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어 일으켜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 없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의 계기는 바로 기도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령이 불같이 임한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력으로 말하자면 한번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교인 수로 말하자면 성공한 교회였고, 교회의 재산으로 말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이 교회 수중에 있었으며, 성도들의 가슴에 불러일으킨 헌신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일상적인 모든 생활을 떠나서 함께 모여 기도하며 공동생활을 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 두 사람이 시간이 되매 기도하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절실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며 회심한 성도들은 교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장애우 주일을 우리가 지키면서 요즈음 우리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니까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유일한 책임이 사회봉사인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웃 사랑의 명령에 따라 물질로 사회를 섬기는 책임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좀더 이런 일에 헌신하기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실 사실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회봉사는 교회 아닌 다른 단체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만이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교회의 우선 순위적 사명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부자 되어 전도안하는 교회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가난해져서 전도 많이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중세 교회는 부자 되어 전도 안하는 교회이었습니다. 교황이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불러서 화려한 금으로 장식된 성당을 보여주며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하는 말은 이제 우리가 못하겠구만” 하자 신학자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소리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게 금과 은이 없을찌라도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막대기 하나를 가진 다윗의 손을 붙잡고 골리앗, 삼손, 나귀 턱뼈, 모세 마른 지팡이 하나, ... 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 질 때 세상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교회는 은과 금이 남아도는 교회가 아니라, 전도와 선교를 위해 모든 은과 금은 속히 처분해버리고 스스로 가난해 지는 교회입니다. 다만 예수의 이름만 가득한 교회-나는 그것이 우리 교회의 미래이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이 오직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때문에 상처가 치유를 받고, 질병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질병을 달고 다니면서도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승리를 누리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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