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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17) : 여리고 (막 10:46-52) - 장애인, 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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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7) : 여리고 (막 10:46-52)


최근 기독교 한 인터넷 언론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한 단체에서 인성 교육의 일환으로 <누가 살아 남을 것인가?>라는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가상적인 핵 전쟁이 일어나서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10명만 살아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측한 과학자가 캡슐을 만들었는데 문제는 그 코쿤이 7인용이어서 10명중 세 명을 빼야 하는데 누군가를 제외할 것인가가 이슈였습니다. 

그 열명은 1.충직하게 나라를 지킨 군인 2.그의 임신한 아내 3.교양 학부의 미모의 여대생 4.월드컵 MVP축구 선수 5.학식이 풍부한 중년 여 배우 6.역사 기술 능력이 있는 소설가 7.캡슐을 제작한 과학자 8.동남아에서 유학 온 의대생 9.경건하고 존경받는 성직자 10.생산 공장에서 단순 작업을 하는 장애인이었는데 그중 어떤 세 사람을 빼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날 토론에 참여한 대부분의 건강한 청년들은 장애인만은 제일 먼저 빼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장애인은 인류 재건에 쓸모가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오늘 날 바로 이런 소위 실용주의적 논리 때문에 이 땅에서 많은 장애인들이 편견과 부당한 처우에 상처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을 쓴 이는 장애인은 어떤 경우에라도 먼저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펼친 논리의 근거는 생명 존중 곧 휴매니즘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는 이런 휴매니즘을 넘어서는 보다 중요한 논거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할 이유는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까닭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약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이야 말로 그분 자신을 대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리고 성을 지나던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한 시각 장애인을 도우신 일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주전 7천년전부터 사람들이 산 흔적이 발견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해 북동쪽 13km 지점에 위치한 이 도시는 샘들(가장 유명한 엘리사 샘)과 종려나무들이 많이 있어 오아시스의 도시로 알려져 왔습니다. 지금은 요르단 가는 암만 도상에 위치한 팔레스틴 자치 도시로 많이 낙후된 인상을 주지만 본래는 아주 천혜의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점령의 교두보로 먼저 이 도시를 점령했고(수5-6장), 복음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자주 여리고로 내려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한 사마리아인이 이 길에서 강도만난 자를 구한 곳이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곳(시험산, Mount of Qarantal)도 이곳이며, 그리고 돌 무화과 나무(뽕나무)위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 주신 곳(눅19:1-10)이 이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무엇보다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장애인 디매오를 만나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 여리고에서 예수님은 한 장애이웃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셨을까요?

1.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장애 이웃을 주목하십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46절에 보면 여리고 길가에 앉아 있던 시각 장애인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바’는 아들이란 뜻,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가 예수님이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칩니다. 47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다음 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면박하며 조용하라고 주문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49절은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라고 증언합니다. 무엇이 그를 머물러 서서 그를 주목하게 하셨을까요? 저는 그것이 바디매오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47절과 48절 두 절에 걸쳐 두 번씩 그가 이 외침을 토해 낸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식의 간절한 기도이었을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마태 7:7)고 가르치신 그가 어떻게 이 기도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오늘도 이 땅에서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장애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을 주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제자들인 우리도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의 인생의 도상에서 도움을 구하는 장애 이웃들의 소리를 듣고 가던 길을 멈출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불쌍한 처지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임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바디매오의 처지가 더욱 주님의 긍휼히 여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그는 맹인이었을 뿐 아니라, 거지였기 때문입니다.(46절맹인 거지 바디매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장애인이 되면 그 장애 때문에 기능을 필요로 하는 직업을 가질 수 없어 결국은 실업의 상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 그래서 대부분의 장애인이 맛사지업으로 연명하는데 그마져 직업 평등의 구실로 내몰리는 위기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 이들을 주목하지 않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여리고 길에서 주님이 머물러 서신 이유입니다.


2. 예수님은 장애 이웃을 친히 그 분 앞으로 부르십니다.

이런 장애 이웃을 만나면 어쩔줄 몰라 피해감이 최선이라고 우리는 보통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사뭇 다르셨습니다. 

본문 4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여기 한 구절에 3번 씩 반복된 단어가 있습니다. 예,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맹인을 부르셨습니다. 그의 부르심에 편견이 없음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비로소 그에게 “안심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전합니다. 

50절의 맹인의 응답을 보십시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겉옷은 아마도 이 맹인의 전 재산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편견없는 부르심은 그를 한순간에 무장해제를 시킨 것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예수앞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선진 사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장애 이웃에 대한 편견의 극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장애 이웃을 섬기는 복지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고 심지어 길에서 장애 이웃을 만나는 것 자체를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라는 것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요? 

2008년 보건 복지부 장애인 실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등록된 장애인은 모두 210만명(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더 많다약 인구의 10), 그중에 후천적 장애인이 90라는 것을 아십니까? 장애 원인은 1)고령화에 따른 질환 2)각종 사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특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부터 장애 이웃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관심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과 유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고 가르치셨고 그래서 그분은 지금도 장애 이웃들을 당신 앞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3. 예수님은 장애 이웃의 절실한 필요를 채우십니다.

본문 51절에 보면 이제 예수님이 이 시각 장애인에게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맹인은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에게 보는 일보다 더 절실한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결과는 무엇입니까? 

5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인 구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한 중요한 레슨은 우리의 장애인 섬김 사역이 그들의 삶의 필요를 돕는 데서 끝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일어서서 예수님을 따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 인구대비 복음화 비율은 20을 말하는데 장애인 복음화는 3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장애 이웃들을 어두운 환경에서 나오게 해서 밝은 빛아래 복음을 듣게 해야 합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문의 결과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본문에 감추어진 진실은 아마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의 장애인관이 변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이 한 사람의 장애인을 소중히 여기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입혀주시던 예수님의 장애인에 대한 사랑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날 여리고 에서는 그 도시 안에 잠재해 있던 오래 동안의 장애인 편견이 깨어지는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 화두를 <누가 살아 남을 것인가?>라는 토론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만일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이 토론의 주체라면 우리는 이 토론의 성서적 결론을 어떻게 맺어야 하겠습니까? 이 명제를 토론으로 올렸던 분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에 제시된 유사한 상황을 인용하여 그의 장애인 포함의 당위성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장영희씨가 제시한 상황의 주인공은 <눈먼 소년>이었습니다. 장영희 교수가 제시한 토론 상황은 이렇습니다. “곧 핵 전쟁이 일어나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핵 폭발을 안전하게 피할수 있는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 동굴에는 여섯 사람만이 들어 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음 열 사람입니다. 

열 사람은 1.수녀 2.의사 3.눈먼 소년(장애인) 4.일본인 교사. 5.갱생한 창녀 6.여가수 7.정치가 8.여류 물리학자 9.농부 10.아무 기술로 능력도 없는 백수. 앞으로 새로운 미래의 한국 건설을 위해 이 열 사람중 여섯 사람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영어로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토론이 이어지면서 B그룹에 속해 있던 평소 말을 더듬던 진기라는 학생의 감동적인 토론을 하나의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이 (눈먼)소년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아주 크게 공헌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커다란 공헌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고 아주 바쁠겁니다. 좋은 나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신이 없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그 사회에도 경쟁이 생기고 질투와 미움에 사로잡혀 권력을 놓고 싸울 겁니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 이 눈먼 소년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자기 시간을 쪼개 그를 도와야 할 겁니다. 그러면 남을 돕고 남을 위해 나의 작은 것을 희생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잠시 교실은 조용해 졌습니다. 진기라는 학생이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듣는 것은 많은 인내를 요했지만 말더듬 증상 때문에 그가 어렵살이 하는 말은 더욱 진지하고 진실되게 들렸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진기는 다시 입을 열어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위대한 성경적인 결론이 아닌가요? 우리 곁에 한 장애 이웃을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기 시작할 때 우리 사회가 아니 온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애 이웃 섬김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세상 변화의 비전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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