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 (마 1:18~25)

  • 잡초 잡초
  • 380
  • 0

첨부 1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 (마 1:18~25)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요셉은 마리아가 어려움을 처하게 될 것을 생각해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 때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고 말하고 마리아가 잉태 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고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난 후에 주의 사자의 지시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드립니다.
저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신앙생활에는 기적이 나타날 때가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18절에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 되었습니다. 23절에 보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예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처녀’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르데노스’인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순결한 처녀를 말합니다. 이 말씀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가 사용한 ‘처녀’라는 단어는 ‘알마’라는 말인데 이 단어 역시 남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순결한 처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를 경험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일에 기적을 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고 기적이 일어나서 많은 소출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열매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전교에서 1등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것에서 거두게 하시지 심지도 않았는데 거두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풍성한 결과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열심히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분입니다. 국민일보에 영동농장 김영복 회장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양식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좌절하고 절망하여 술에 절어 미친 사람처럼 방황하다가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는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다시 일어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고 이제부터는 인간적인 잔꾀나 오기로 살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받고 살겠다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하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임했습니다. 중동 사막지대에 노무자들이 먹는 김치용 배추를 사막에서 재배해 보자는 꿈이 생겼습니다. 

모래땅과 섭씨 50도의 뜨거운 햇빛에서 채소를 가꾼다는 것은 모두 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거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고 뛰어들었습니다. 땅을 찾아 빌리고 농부들을 데려다 배추를 심고 키웠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의 백성이니 너의 일은 모두 나에게 맡겨라’ 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크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 기적같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우디 현지 농장에서 무와 배추가 생산되자 엄청난 주문이 밀려들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대지주들이 수십만 평의 땅을 개발해 달라는 주문을 하여 농장 네 개를 더 개발해 주자 사우디 정부에서는 녹색혁명 기수란 칭호를 주었고, 개인 외화 송금액 1위로 한국에서 산업 훈장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절망의 자리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보고 열심히 기도해서 다시 일어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지금 절망 중에 계신 성도가 있다면 열심히 기도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서 주시는 또 다른 교훈은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마리아의 몸에 예수님이 잉태 되신 것은 마리아에게 초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18절에 보니 “성령으로 잉태 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말씀합니다. 20절에서는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되신 것만 아니라 성령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이끌림을 받으셨습니다. 심지어 눅 10:21에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성령님을 따라 말하면 예수님처럼 말할 수 있고, 성령님을 따라 일하면 예수님처럼 일할 수 있습니다. 
요 14:16, 26에 보면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혜사는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가르치시는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반드시 승리하고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생의 네비게이션입니다. 운전을 할 때 네비게이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은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되시는 성령을 따라하는 것이고 성령을 따라 살다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까?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려면 네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음성에 순종하면 됩니다. 

직진하라고 하면 직진하고 좌회전하라고 하면 좌회전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에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때로는 감동으로 때로는 생각으로 때로는 부담감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받는 감동이나 생각이나 부담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닌지는 성경 말씀으로 분별하면 됩니다. 성경 말씀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부분은 양심이 가르쳐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는 주로 양심이 평안으로 반응합니다. 하나님이 뜻이 아닌데 행하려고 하면 우리의 양심이 불안감이나 답답함 죄책감 등으로 반응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비결을 배우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삶에 엄청난 유익이 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분은 운전하면서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얘, 너 왜 그리 속력을 내니? 조금 천천히 가라. 앞차와 안전거리를 유지해야지.’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음성이 들린 것은 아닌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세미한 음성을 듣고 난 후에 바로 ‘주여!’ 하며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 차 앞에 가던 트럭이 빗길에 미끄러져 뱅글뱅글 돌았습니다. 만일 목사님이 속력을 내어 달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 한번은 터널을 통과하는데 속력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속력을 줄였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성령님께서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때 맞은편에서 오던 자동차 한 대가 갑자기 앞차를 추월하려고 목사님 차선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박지 않았답니다. 그때도 목사님이 천천히 달려서 괜찮았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 사고를 당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감동도 주시고 생각도 주시고 부담감도 주시면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감동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은 잘 받습니다. 그런데 순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찮은 일에는 잘 순종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 생각대로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잘 받는 사람입니다.

본문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은 감정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약혼자가 잉태된 것을 알게 된 요셉이 얼마나 크게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성질대로 한다면 만천하에 공개해서 마리아를 부끄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의 감정을 절제 합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니 조용히 드러내지 않고 끊고자 합니다. 왜 요셉이 이렇게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만약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남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면 마리아는 율법에 의해서 돌아 맞아 죽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은 뭔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정대로 막 행동해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감정을 잘 통제할 줄 아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는 반드시 대형 사고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과 교제하는 사람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자동차라도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면 타면 안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왔어도 고장 난 자동차라고 생각하고 사귀면 안 됩니다.
여러분, 감정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정탐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정대로 막 말을 했다가 자신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감정대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모세는 감정대로 행동했다가 살인자가 되어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요셉처럼 감정을 절제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또 다른 교훈은 신앙생활이란 예수님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순간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불하신 죄의 값의 능력이 예수님 믿는 순간 믿는 사람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엡 1:7, 요일 1:7). 
죄를 범한 사람은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식당에서 밥을 먹었으면 밥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이유가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었지만 돈이 없어서 밥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식당에 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식당에 찾아와서 “주인장, 여기 저 사람 밥값이요”하고는 밥값을 지불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더 이상 식당에 잡혀 있지 않아도 됩니다. 식당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가 바로 그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그 피가 믿는 그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죄에서 해방된 의인이다”
여러분, 혹시라도 죄를 범하게 되면 즉시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깨끗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일 1:9에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 저는 ...죄를 저질렀어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고백하는 것이 사람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만 해도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이 되었으면 이제는 작은 죄도 용납하면 안 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아주 작은 죄이기 때문에 ‘이 정도 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작은 거짓말, 마음속에 있는 은근한 미움, 입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있는 불평, 불만, 원망, 섭섭함, 시기, 질투 등은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히브리 격언에 보면 “죄는 처음에는 여자처럼 약하지만 내버려두면 남자처럼 강해진다. 죄는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늘다가 나중에는 배를 묶는 밧줄처럼 강해진다. 죄는 처음에는 나그네이나 그대로 놓아두면 나그네가 그 집의 주인이 되고 만다”라고 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것이 못됩니다. 댐에 뚫린 작은 구멍을 과소평가하고 그대로 두면 결국은 댐이 무너집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죄라도 품고 있으면 그 죄가 결국 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의 의지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처럼 위대한 사도도 죄의 법과 싸워보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고백했습니다(롬 :22,23). 바울과 같이 위대한 사도도 자기의 의지로는 죄를 이기지 못했다고 고백하는데 우리가 의지만으로 죄를 이기려고 하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죄는 이겨야 합니다. 이기지 못하면 진정으로 행복한 삶, 승리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순합니다. 죄를 이기려면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무균실 안에 들어가면 세균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주님 안에 거하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영국에 스로스츠란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40 년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는지 교도관들의 말을 듣지 않고 말썽만 피우니 가죽 채찍으로 50번씩 여덟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성하기 보다는 오히려 죄를 즐겼습니다. 그를 누구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그를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구세군 숙박소에서 하룻밤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아 거듭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사명을 받아 구세군 출옥자 보호소에서 18년 간 봉사하며 죄수들을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400번 가죽 채찍을 맞았지만 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40년 감옥생활을 하였지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만나고 나니 1, 2분 만에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진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서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주선을 탄 우주인이 우주에서 살아가려면 우주선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우주선을 벗어나는 순간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경건하게 사는 비결은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비결은 신앙의 연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라는 직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주인이 우주 공간에 나가 일을 할 때도 산소를 공급하는 호수로 우주선과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가 주님과 연결되어 살아가면 죄를 이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죄를 이기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니 예수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건강이 회복되는 것도 자녀들이 잘 되는 것도 다 변두리 복입니다. 진짜 핵심적인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레는 임종할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네”라고 두 번이나 말하고는 평화롭게 임종했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하시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을 랍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랍비가 아이에게 질문을 합니다. “얘야,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 네가 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말을 해 준다면 동전 한 개를 주겠어.” 그런데 이 아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제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시면 저는 선생님께 동전을 두 개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안 계신가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면 분명 하나님은 신자와도 함께 하시고 불신자와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과도 함께 하시고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도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인정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과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김장로님이 백화점에 갔다가 친구와 쇼핑을 하는 유명 연예인 한 사람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생각해 봅시다. 김장로님은 분명히 그 연예인과 같은 공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와 김장로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가 김장로님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김장로님은 그 연예인과 그의 친구와 분명히 한 공간에 함께 있지만 연예인의 친구가 그 연예인과 함께 있는 것과 김장로님이 그 연예인과 함께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는 버스 안에 경찰이 있었습니다. 그 경찰은 시민들에게는 보호자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소매치기에는 무서운 법의 집행자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경찰관이 시민과 함께 있는 것과 소매치기와 함께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불신자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의 목자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응원하고 우리를 돕고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보기를 원하는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그 말씀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처음에는 성육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현몽합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잉태 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고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임마누엘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요셉에게 이 사건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요셉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24절에 보니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대로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 감정 내 생각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아닌 것으로 알고 자기생각과 자기감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시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복이 됩니다. 
20절에 ‘주의 사자’가 나옵니다. 24절에도 ‘주의 사자’가 나옵니다. 여기서 주의 사자는 천사를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a[ggelo"’(앙겔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앙겔로스는 천사로도 번역이 되고 사자로도 번역이 됩니다. 여기서 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messenger)로서 천사가 메신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시기도 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하나님의 종 즉 목회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십니다. 목회자는 앙겔로스입니다. 목사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인 것입니다.

계 1:20절과 2:1에 보면 일곱 교회의 사자가 나옵니다. 여기서 사자도 본문에서 천사에게 사용한 동일한 앙겔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계시는데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한 일곱 별과 주님의 사자는 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말합니다. 목사는 주님이 붙잡고 계시는 주님 나라의 별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앙겔로스 즉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세워주신 하나님의 앙겔로스입니다. 천사는 아니지만 천사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세워주신 메신저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나가서 살다가 주일이면 교회로 와서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앙겔로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나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주의 사자의 분부를 듣고 그대로 행했던 것처럼 저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대로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의 감정, 여러분의 계획, 여러분의 행동 등을 수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생각이 너무나 강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어도, 개인적으로 권면을 받아도 절대 뜻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매를 드실 것입니다. 매를 들어도 듣지를 않으면 결국은 버림받고 마는 것입니다.

엘리제사장이 그런 사람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제사장으로서 귀하고 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귀하게 세워주셨으면 감사하고 잘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과 너무나 거리가 멀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엘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셨지만 그는 돌이키질 않았습니다. 안타까워하신 하나님은 다시 어린 사무엘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경고하셨지만 역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집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맙니다.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는 아들을 낳다가 죽고, 엘리 자신도 그 날 의자에서 넘어져서 묵이 부러져서 죽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돌이키지 않아서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돌이키지 않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 행동과 계획 등을 수정하는 사람에게는 큰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니느웨성 사람들은 너무나 악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돌이키길 원해서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요나가 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자 니느웨성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작정하셨던 심판을 취소합니다. 하나님의 작정마저도 취소시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내가 하나님을 움직여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고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에 기름진 것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늘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시기 복된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마리아는 영광스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신 주님이 마리아의 몸에 찾아오셨으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성령님께서 믿는 우리의 몸을 성전 삼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을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셨던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안예 계시는 주님을 모시고 거룩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