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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넉넉한 하늘을 품자! (요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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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하늘을 품자! (요 14:1~6)


동물 마을에 한 새끼호랑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자기가 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엄마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는 내가 개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정말 호랑이 맞아?"
"그럼 아가야.  넌 백수의 왕 호랑이란다.  자부심을 가지렴."
그렇지만 새끼호랑이는 여전히 자신이 개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는 아빠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전 정말로 호랑이가 맞나요?  개가 아닌가요?"
"아니란다.  너는 백수의 왕, 호랑이야."

아버지로부터 왕이라는 말을 들은 새끼호랑이는 기분이 아주 좋아 콧노래를 부르면서 산기슭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선녀와 나무꾼에 등장하는 나무꾼이 선녀의 옷을 훔쳐 급하게 뛰어내려오다가 호랑이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나무꾼이 산길을 가로막고 있는 새끼 호랑이에게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그만 새끼호랑이가 자살해버렸다고 합니다.
나무꾼이 한 말은 바로 이 말입니다.
"비켜. 이 개××야."

사람이 살아가면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 자기 정체성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면 결국 인생 전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입니다.  이 사실은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저와 여러분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가장 중요한 까닭, 예수를 믿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왜 이와 같은 질문을 드리는가 하면, 그와 같은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일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또 무엇을 위해서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분명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결코 올바르게 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의 신앙은 습관적인 신앙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믿기는 열심히 믿는 듯 하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유익과 축복들은 별로 받지를 못하는 허수아비적인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착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부자가 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일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부자도 되고 건강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들보다 훨씬 더 부유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입니다.  구원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일들은 꼭 예수를 믿지 않아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은 예수를 믿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천당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들이 살아야 할 궁극적인 세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망쳐 놓은 세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해 주시고 궁극적으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을 우리는 천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당은 꼭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미래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현재를 포함하여 미래에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오늘 속에서 영원을 살고 이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오늘과 그날을 위해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지금 이 순간을 말하고, 그날은 역사의 마지막날 주 앞에 서는 그 날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역사의 마지막날에 있을 그날을 오늘의 삶의 자리에 놓고 여기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천당, 즉 하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기독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땅과 현실을 중히 여기며 지극히 긍정적으로 여기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과 세상은 우리들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은 아닙니다.

땅과 세상은 우리가 축복해야 할 소명의 대상이지 우리가 즐기고 누려야 할 축복은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은 하늘이고 땅은 우리가 축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땅을 하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땅에 살든 하늘에 살든 상관없이 언제나 하늘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믿는 우리 크리스도인들은 하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행복과 구원을 논할 때 땅은 우리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에 살지만 땅을 초월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땅을 초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저들은 땅에서 살았고 땅을 사랑하여 땅을 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기 자신들은 땅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들은 땅에서도 늘 하늘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늘을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땅은 저들에게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하면 부 한대로, 비천하면 비천 한대로 언제나 기뻐하며 언제나 감사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땅이 흔들리고 어려워지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을 초월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땅에 얽매여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얽매여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서 살 천당을 이 세상에서는 살아 내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땅이 편안하고 형통할 때에도 우리의 삶은 제법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삶에 점점 익숙해지면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땅에서 얻을 수 없는 만족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고통하며 외로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세상은 편안해도 문제이고, 편안하지 않아도 문제입니다.  땅과 세상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본시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나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얻어도 만족하지 못할 세상에 욕심을 두고 그것 때문에 싸우고, 그것 때문에 다투고 범죄하며, 그것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더 가지려고 합니다.  더 가지려고 하다보니 다투게 됩니다.  다투다 보니까 관계가 악화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원죄 때문입니다.  원죄란,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할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입니다.  그 어리석은 원죄적인 욕심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땅에 얽매여 땅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사람의 본성은 자기 스스로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적절하게 즐기며 살라고 준비시키신 하나님의 선하신 것들을 무절제하고 과도한 방법으로 탐하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적인 용어로 현세욕이라고 합니다.  무절제한 욕망을 통해 아담은 모든 후손들에게 현세욕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죄는 형벌을 부를 뿐만 아니라 형벌 그 자체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이 현세욕을 아담이 범한 첫 번째 죄인 '교만'이나 '자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그 원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거듭 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에 살아도 땅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땅에 얽매이게 하는 그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는다면 마땅히 땅에서 풀려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을 땅에 묶어두는 것이 바로 죄의 뿌리가 되는 죄된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 우리는 땅에서 자유 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것들을 무절제하고 과도한 방법으로 탐하는 현세욕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의 결박을 풀어서 이 땅에서도 하늘을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후에도 땅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서만 땅을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서만 천당을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땅에 살면서도 누릴 구원의 축복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죽어도 다 천당에 갈 사람들입니다.  죽음으로써 이 땅을 떠나게 될 때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영원한 하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서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도 땅을 떠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하늘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땅을 떠나십시오.  땅에 대한 욕심을 끊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땅의 종이 되고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복된 삶을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땅을 버리지 못하면 평생 피곤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땅에서 편히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꾀가 있어야 합니다.  적당히 죄도 지으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봤자 행복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것들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확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내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세상의 것은 돌고 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을 돌지 못하도록 내가 붙잡으려고 집착을 하다보니 결국에는 내가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출세를 하고 세상적으로 성공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땅에 얽매여 산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별로 소용이 없고 효과가 없습니다.  땅에 얽매여 산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세상적으로 말했을 때 정말로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은,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출세를 해야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하늘은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그 누구도 갈 수 없습니다.

복음성가에 보면,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다같이 한번 불러 보시겠습니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2. 벼슬로도 못 가요.  지식으로 못 가요.
3. 어여뻐도 못 가요.  맘착해도 못 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돈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은 지키려고만 하면 어느 누구도 내게서 믿음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땅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지만 하늘은 언제나 마음만 먹는다면 내 것입니다.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하늘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살면, 그 믿음으로 살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도 하늘이고, 거친 들도 하늘입니다.  하늘을 품고 사는 사람은 부하면 부한 대로, 비천하면 비천한 대로 능히 자족하는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시험과 삶의 역경으로 세상은 잃어버렸지만, 그 시험을 만나도 우리의 믿음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돈을 잃어버렸음으로 땅은 놓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땅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하늘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늘 때문에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 은혜, 이 감격, 이 행복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넘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사람답게 사십시다.  세상은 세상대로 극복하여야 하겠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그것과 관계없이 구원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을 살면 참으로 근사합니다.  참 자유 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평안한 삶, 참으로 만족하고 감사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삶, 담대한 삶, 아름다운 삶,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 얽매여 살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초라해 집니다.  자유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혹여 잠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는지 몰라도 참 평안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만족과 감사 대신에 끊임없는 욕심과 탐욕으로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겁해져야 합니다.  더러워져야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땅에 얽매여 살면 절대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땅은 언제나 좁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언제나 넉넉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언제나 늘 넉넉하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땅은 열심히 침노하여도 얻지 못하는 때가 많지만 천국은 침노만 하면 언제나 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땅의 일을 위하여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천국을 살면서 땅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땅에 대하여 자유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땅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물론 우리가 땅에 살기 때문에 땅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움을 그대로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당할 때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하늘은 품고 사는 사람이 되자는 말씀입니다.  땅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늘까지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이 되겠습니까?  땅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내 믿음까지 포기해 버린다면 그 영혼은 얼마나 불쌍한 영혼이 되겠습니까?

저는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만 했는지 그 초심을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박해를 받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왜 예수를 믿어야만 했는지를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늘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땅에서의 인간적인 삶이 편하든 불편하든 하늘은 늘 품고 살아 하늘이 주는 아름답고 놀라운 축복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땅에 얽매여 땅의 종노릇을 하지 말고 하늘을 품어 늘 자유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좀 오래 되었습니다만, 사진작가 함철훈 선생의 사진에 글을 써서 출판한 김동호 목사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늘을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신천옹(信天翁) 이라고 하는 새가 높은 하늘을 비상하고 있는 사진에 대하여 글을 쓴 것인데, 신천옹이란 영어로 알바트로스(al- batros)라고 부르는 새입니다.  모양은 갈매기와 비슷하지만 갈매기보다 큰 새이고 높은 하늘에서 기류를 타고 비행을 함으로써 가장 멀리 나는 새 중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을 사는 사람'

고려대 기독학생들의 채플에 갔다가 사진가 함철훈 씨를 만났다.  한 번 얼굴을 익힌 적이 있어 반갑게 인사할 수 있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슬라이드의 주제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주제만 듣고도 감동이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상을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그의 의도를 단 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서 그의 사진은 한 장도 보지 못하였지만 본 것 만큼이나 감동을 받았다.  흥분된 어조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하는 사진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러나 분주한 일상에 묻혀 나는 그를 잊어버렸다.  그런데 기독 교수들의 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를 갔다가 거기서 그를 또 다시 만났다.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여전히 흥분하며 나의 설교와 자신의 사진에 대하여 설명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의 사진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그 사진을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응했고 드디어 식구들과 함께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그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평소 늘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왔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만났던 것이다.

그는 실력 있는 사진 작가다.  큰 맘 먹고 일하지 않아도 적당히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을 찍으면서 얼마든지 넉넉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이 찍어야 할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찍고 싶어하시는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거의 3년 가까이를 한 달에 6만원하는 창고 같은 방에서 생식을 하며 버텼다.  모세와 바울, 그리고 다윗과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그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고집을 통하여 그의 사진들이 나왔다.  그의 사진 속에 메시지가 실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사진에 나타나면서 그는 흥분했다.  세상에 없는 부요함으로 부요해지고, 세상에 없는 기쁨으로 들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의 가난함과 인간적인 외로움을 말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전혀 눈치도 챌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찍은 사진 중에 하늘을 비상하고 있는 신천옹(信天翁)의 사진이 있다.  그는 그 사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여 놓았다.  그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다 알아낼 수 있다.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 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히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높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 내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조차 난 이곳에 떠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 먹인 낟알로도 단 한발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 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모든 굴레를 훌훌 털어 버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삶,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그 바울의 삶을 오늘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기쁨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참된 부요함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이 땅에서도 천국, 즉 하늘을 사는 사람이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예수를 아는 순간, 그 분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간, 하늘을 믿는 신천옹이 되는 순간, 그가 믿는 하늘이 자신의 것이 되어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기막힌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삶은 부유할 수도 가난할 수도 있고 높아질 수도 낮아질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

사랑하는 여러분, 땅에서의 삶은 힘듭니다.  솔직히 지금 우리의 경제는 어렵고, 우리의 생활은 고달픈 것이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견뎌내야만 할 시련입니다.  땅에서의 삶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큰 차이가 없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하늘의 소망 때문에 힘든 세상을 살면서도 그 세상을 능히 이겨내며 기쁨과 감사를 누리며 땅에서도 천국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넉넉한 하늘을 품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가득 품으십시오.

정말로 나를 힘들고 짜증나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넉넉하지 못한 내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넉넉한 하늘을 품지 못하고, 잠시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은 이 땅의 문제로 근심하며 걱정하며 몸부림치는 지금의 내 모습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넉넉한 하늘을 품지를 못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힘든 세상을 믿음으로 품고 넉넉한 하늘로 이겨 살아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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