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3)

  • 잡초 잡초
  • 282
  • 0

첨부 1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3)


I. 부활의 종교

어떤 분이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인생 살만큼 살다가 아내를 잃었건만 눈을 뜨나 감으나 아내 생각뿐입니다. 고독감에 매일같이 눈시울을 적시다 일기장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오늘 아침도 6시가 되었다. 행여 그이가 새벽기도 갔다가 돌아오지나 않나 대문 있는데를 기웃거려 본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하루종일 심방하고 지금쯤 돌아오지나 않나 하고 내마음은 동리 골목을 헤매게 된다. 손주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는 그이의 목소리가 섞여 있고 그이가 읽던 붉은 줄친 성경을 보면 안경낀 흰머리 그 모습이 떠오른다. 아낙네들이 우중우중 서 있으면 행여 그 속에 서 있지나 않나 다시 한번 두리번거리게 된다. 

오 주여! 제가 죽는날 꼭 하늘나라에 가서 그이를 만나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밑에 추사 「김정희」가 아내를 잃고 쓴 한시를 한줄 쓰고 이렇게 토를 달아 놓았더랍니다. “저 세상에 가서는 당신과 나의 처지가 서로 뒤 바뀌어져서 나는 먼저 죽고 당신은 천리밖에 혼자 외로이 살아 이 내가슴 아픈 마음을 당신으로 하여금 맛보게 해 보고 싶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얼마나 아프게 느껴지고 죽음의 이별이 얼마나 서글프고 그리웠으면 이런 글을 썼을까요.

이땅의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종교는 없습니다. ‘사망아 너를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사망을 이긴 인간은 없었습니다. 이땅의 종교 창시자들이 많은 업적을 남기고 죽었습니다만 결국 그들도 사망을 이기지 못하고 무덤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유교의 교주 공자는 73세에 죽어 중국 청평양에 무덤을 남겼고,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는 80세에 죽어 인도 참수서당에 무덤을 남겼고,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63세에 죽어 아라비아 메카에 웅대한 무덤을 남겼습니다. 

누군가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이 묻힌 무덤을 찾아내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승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 땅의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부활에 관하여 사백 번이상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논쟁의 주제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학문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설명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언했고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선포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종교도 흉내낼 수 없는 사실이 있다고 하면 바로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하는 이 부활의 소식입니다.

기독교를 흉내내 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도시 내에도 불교사찰들이 많이 서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도심에 절간을 세우고 기독교 신앙을 모방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니까 저들은 염불대신 찬불가를 만들어서 노래합니다. 우리가 성경학교를 하니까 저들도 아이들을 모아놓고 불경학교를 합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합니다. 저들도 주일마나 정기 예불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방을 한다. 구역조직까지 갖춰 논 모양입니다.  다 흉내를 낼 수 있지요. 그러나 흉내낼 수 없는 분명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천지를 창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지 아니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한국교회는 부활절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 가족이 복음을 안고 이땅에 들어왔습니다. 해마다 새움이 돋는 봄날 이때가 되면 우리는 부활절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부활의 소식을 나무잎새에도 새겨 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절이야말로 우리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축제요,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사실 아니었습니까? 때문에 이 부활주일은 기독교 여러 축제 가운데 최고의 축제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없는 종교가 영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종교가 구원을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시대든지 부활주일이 형식적으로 지나가던 시대는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받아들이고 믿고 예수를 부활의 주님으로 인정하는 시대는 부흥의 시대였습니다. 

II. 평강이 있을지어다

본문 시작하는 19절 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저녁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이미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이순간부터 이 여인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빨리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인들은 이골목 저골목 이마을 저마을을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외치고 다녔습니다. 이 엄청난 때에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계속되는 성경말씀을 보십시요.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다락방 깊숙한 곳에 모여 앉아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요?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로마 정부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잡아들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터였습니다. 본문에서 “문들을 닫았다” 복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중삼중 겹겹이 걸어 잠궜다는 뜻입니다. 문이란 문들은 다 닫아 걸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신앙인이요 제자라 할지라도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면 이렇습니다. 

걸어 잠근 것은 다락방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쇠빗장을 걸어 잠그고 앉아 있으니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겠습니까? 오직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우뚝 서 계신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부활했을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단서이지요. 시공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니 오죽이나 놀랬겠습니까? 마음이 얼어붙고 눈이 얼어붙고 영혼이 얼어붙어 있었으니 주님이신 줄 몰라 뵙지요.

주님처럼 생겼으니 더욱 놀랄 수 밖에요.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24장 37절에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젊잖게 표현해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했지,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면 “귀신 아닌가?” 그 얘기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얼마나 제자들이 듣고 싶은 말씀입니까?

이에 더하여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못박힌 손을 내밀어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신 것을 확인하고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 놀랐습니다. 체면 없지요 면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체포되던 그 시간에 제자들은 겁이나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 신음하며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마음껏 목놓아 울지도 못했습니다.  가냘픈 여인들과 이름없는 제자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루는 그 현장에 제자들은 얼굴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배신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꾸중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불안에 신음하는 제자들,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 이들을 향하여 21절 재차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반복되는 이 샬롬! 평강의 축복은 단순한 인사도 형식적인 위로도 아닙니다. 부활을 체험한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요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26절에서도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왜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한마디에 제자들의 모든 과거는 용서 되어졌습니다.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은 눈 녹듯이 녹아졌습니다. 의심의 먹구름은 깨끗이 끝났습니다. 이 샬롬! 평강은 영적인 충만함과 정신적인 평안과 육체적인 건강 그리고 삶의 풍요로움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믿음을 잃어버리고 환란과 시련 가운데 불안에 떨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말씀을 듣고 살아가노라 하면서도 말씀의 능력을 상실한체 무력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주님 부활하신 이 시간에도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분 계십니까?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죽음 소식이나 나누며 장탄식을 늘어놓는 못난 제자들의 모습을 하고 이 자리에 계신 분 계십니까? 주님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 주일 이 아침, 한소망 가족 여러분!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III. 평강을 잃어버린 이유

사람들이 평강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죄 때문입니다. 이땅에 샬롬을 잃은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에덴 동산의 낙원을 인간의 죄가 파괴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샬롬을 잃었습니다. 인간들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인류 역사는 끝없는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 또 인간의 악이 분쟁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죄는 개인의 심령의 평화를 파괴하고 사회의 평화를 파괴합니다. 

오래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0-21).

악한 사람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왜요? 죄악은 평화를 파괴하는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케이체프 노이드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여섯 가지 감옥이 있다는 겁니다. 이 감옥으로부터 탈옥하기 전에는 누구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만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기도취의 감옥, 공주병 감옥입니다. 자기만 잘난 것 같습니다. 자기만 예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소중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도취의 감옥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 자꾸 생각하게 되는 비판의 감옥입니다. 많은 장점은 보지 못하고 꼭 단점만 봅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녀들까지도 장점이 많은데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꼭 나쁜 점만 보고 그것만 지적하고 그것만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는 겁니다. 이것이 비판이라고 하는 감옥입니다. 

셋째, 항상 세상을 암담하게만 보는 절망의 감옥입니다. 만사를 절망적으로만 보는 사람입니다. 희망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넷째, 옛일만을 황금시대로 생각하는 과거지향적 감옥입니다. 항상 오늘은 나쁘고 어제는 좋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합니다.

다섯째, 다른 사람의 것만 무조건 좋게 보는 선망의 감옥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은 좋지 않고 남이 가진 것은 다 좋게 보입니다. 

여섯째,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증오와 시기와 질투의 감옥입니다. 이런 것에 매여있는 동안은 절대로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때 비로소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마지막 한 가지를 더한다면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평안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면 죽음의 감옥입니다. 이 불안과 공포를 깨뜨리는 신비가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거지요.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한 어촌마을에서 늙으신 아버지가 배를 몰고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례를 마친 아들이 그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갑니다. 마을 사람들이 만류를 합니다. “자네 부친의 목숨을 앗아간 그 바다로 다시 나가려는가?” 이때 젊은 아들이 하는 말이 퍽 인상적입니다. “당신네 부친은 어디서 별세하셨습니까?” “침실에서 돌아가셨지.” “그렇다면 당신들은 침실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부활신앙은 죽음을 초월하게 해 줍니다. 

IV. 성령을 받으라

“평강을 얻으라” “평강해 지고 싶다” - 그래서 평안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강 - 샬롬은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평강이 충만해 집니다. 
때문에 보십시요. 22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오늘 본문은 평강과 성령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슬픈 자를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냉혈적인 사람을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강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비겁하게 도망가던 반역자들을 다시 불러 영광스러운 천국의 사도로 삼아주시고 순교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그분의 숨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까?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바로 그 생기 아니었습니까? 그 주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니 “living soul -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 창세기에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몸은 흙의 요소가 있고 생기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생기의 요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호흡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인간을 향하여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체가 됨이라”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호흡을 빼버리고 나면 우리는 흙덩이만 남게되는 것입니다. 바로 흙만 남은 이 인간들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온갖 죄악의 짐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부활하신 예수님, 육체만 남은 생기가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창조주의 숨결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며~ 이 말씀은 에스겔 골짜기를 연상케 해 줍니다. 말라빠진 뼈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호흡이 불어닥치면 죽음의 자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숨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코를 그분의 가슴에 대고 그분이 숨을 내쉬며 성령의 호흡을 우리에게 불어주실 때 성령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받지 못하면 예수의 숨을 쉬지 못하면 하늘 호흡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땅에 아무리 영향있는 사람이 된다할지라도, 아무리 권세있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헛바람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을 숨쉴 때에 헛바람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V. 죄를 사하는 권세

“평강이 있을지어다” - “성령을 받으라” 그래서 성령님의 선물로 평강을 얻었습니다. 이제 내가 평강을 얻었으면 다른 사람을 평안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강을 전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사실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지요. 사람이 누구의 죄를 사한다고 그 죄가 용서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지요. 때문에 이 말은 용서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한 성도들은 이제 정죄하던 삶에서 벗어나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율법에 의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삶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부활에 의하여 무죄선언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유죄판결이 내려진 우리의 삶이었으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이미 무죄가 선언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선언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주일 날마다 예배시간에 용서의 선언을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우리의 지었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다. 주님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수많은 죄를 지었지만 너무나도 사악하여 지은 죄마저 다 기억할 수 없는 악한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기억하지 못한 죄까지 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고백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고백한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우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그때 어떤 분은 그런 고백을 해요. 펄펄끓는 물 속에 눈을 한덩이 집어넣으면 스르르 녹아 없어지듯이 그 말씀 한마디에, 그 선언 한마디에 우리의 온갖 죄가 다 녹아진다고 고백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움의 삶에서 이제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도 미워할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할 자유만 있을 뿐입니다. 미워할 권세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제는 용서할 권세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선 여러분 자신에게 “소중하다 귀하다” 자신에게 용서를 선언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내 죄를 다 담당하시고 의롭다 말씀하여 주셨사오니 여러분 자신에게 선언하십시오. “나 류영모는 너 류영모를 사랑하노라.” “나 류영모는 너 류영모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 여러분 자신에게 용서를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소중한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남편 아내 자녀들에게 용서를 선언하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멜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면서 저는 ‘우리의 죄값이 저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 저처럼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으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겠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때문에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의 원수를 향하여 용서를 선언하십시오. 

미워할 자유도 미워할 권세도 우리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에 프로가 된 것입니다. 사죄를 선언하는 프로가 된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어도 아마추어 신앙인처럼 변죽이나 울리는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으면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신앙생활하더라도 프로신앙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더래도 프로기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더래도 프로목회자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죄를 선언할 수 있는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권세있는 주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묻습니다. 사죄함을 선언하는 복음!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습니까? 

VI.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평생 대학생 선교를 위해 헌신해 온 로슈 맥도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사기극이다.  그러나 부활이 사실이라면 부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최대의 비극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4, 19)

일본의 우쭈무라 간조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니고 어느날 눈을 뜨고 보니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부활의 능력이 내 삶을 감동하고 감싸고 부활의 능력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는 것을 나는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그게 바로 저주일 것이다.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은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그 끔찍한 채찍과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끝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 죽음 이후에 더욱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시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안방에 앉아 바둑이나 두고 계신 분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 계셔서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살아 계셔서 역사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부활을 체험한 여러분 모두의 삶을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고 동행하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야말로 거짓 종교와 참 종교의 갈림길입니다. 좌절과 희망의 갈림길이요 죽음과 영생의 갈림길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배신하고 돌아섰던 제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던 그 힘이 무엇입니까? 죽음이 그토록 무서워 떨던 제자들이 생명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전할 수 있었던 그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부활신앙입니다. 

초대교회 역사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했습니다. 안드레는 헬라에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X형의 십자가에 못박혀 온몸이 뒤틀린채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의 칼에 목베임당해 죽었고, 요한은 에베소에가서 전도하다가 체포되어 끓는 가마에 던져졌으나 죽지 아니하므로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외없이 칼에 죽고 돌에 맞아 죽고 불에타 죽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무섭게 변화시켰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신앙은 곧 부활신앙이었고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는 곧 부활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사도행전3:14-15)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이 아침 여러분에게 평강이 넘치시길 축복합니다!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