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II) (요 21:15~19)

  • 잡초 잡초
  • 275
  • 0

첨부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II) (요 21:15~19)
  

한 20년 전 쯤에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우리나라에 잠시 다니러왔을 때 집에 와보니 제 동생이 읽던 만화책 몇 권이 방에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오랜만에 보게 되니까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당장 펼쳐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만화책은 프로 야구를 소재로 한 것으로서 제목이 '공포의 외인 구단'이란 것이었습니다.
  
제가 또 야구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야구를 그 좋아하는 만화책을 통해 보게 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습니다.
'참 기특한 동생이다. 오랜만에 태평양 건너서 찾아온 형님을 대접할 줄 아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제 기억에 아마 한 일곱, 여덟 권 쯤 시리즈로 된 그 만화책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밤잠도 자지 않고 단숨에 끝까지 다 읽어치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화책 속에서 아주 멋있는, 정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할 만한 멋진 대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공포의 외인 구단'이란 스토리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엮어가는 데에 결정적인 열쇠의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한 대사로서 거기 주인공으로 나오는 까치머리의 오혜성인가 하는 친구가 했던 "난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라는 유명한 말입니다.
나중에 그 만화가 영화로도 나왔었다는데 그 영화의 주제곡도 역시 바로 그 대사를 가지고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진솔한 사랑의 고백이겠습니까?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 정말 풋풋하면서도 절로 가슴이 찡하게 저려오는 말입니다.
그 주인공은 고등학교 야구부 시절에 한 여학생을 우연히 만난 바로 첫 순간에 그녀를 향한 사랑에 빠지게 되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이 사랑의 고백을 던집니다.
이미 다른 남자 친구가 있는 그 여학생, 그리고 나중에 가면 바로 그 다른 남자 친구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그 여인에게, 그 주인공은 평생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는 그 사랑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그 '공포의 외인 구단'이란 만화의 전체 스토리를 엮어 가는 테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혜성은 자신의 사랑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교 야구 선수 시절 때에도 그 여학생의 남자 친구가 상대팀 타자로 타석에 등장했을 때 일부러 한 가운데 직구를 던져 주어 홈런을 치게 해 줍니다.
비록 사랑의 경쟁 상대이기는 하지만 그 선수가 홈런을 치는 것이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기쁘게 만들어 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프로 야구 선수가 된 후, 즉 '공포의 외인 구단'에 소속되어 드디어 한국 시리즈 최종전을 맞이했을 때에도 이제는 이미 그 여인의 남편이 된 그 상대방 타자를 또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는 오혜성이 투수가 아니라 일루수가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 타자가 친 타구가 자기 앞으로 라이너로 날아 왔을 때 일부러 에러를 범해서 러닝 홈런이 되도록 해 주어서 자기 팀이 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 사랑의 힘은 이처럼 대단합니다.
사랑의 힘은 이처럼 자기의 전 인생이 걸린 순간에도 오직 사랑하는 그 상대방이 좋아하는 일만을 위하여 간단히 결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만나 일대일의 면담을 하실 때에도 바로 그런 '사랑의 헌신 서약'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하여 이미 베드로의 과거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신 것을 그로 하여금 확신하게 해 주신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랑 확인을 통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위한 결단' 또한 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주일에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장차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저질렀던 행위는 단지 예수님 앞에서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동료인 다른 제자들 앞에서도 평생 지우기 힘든 수치였습니다.
그래도 지난 3년 동안 명색이 수제자라 하면서 살아 왔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제자들 중에서 정식으로 '열두 제자'의 명단이 발표될 때부터 제일 첫머리에 그 이름이 올랐던 베드로였습니다.
  
그의 수제자로서의 자격은 가이사랴의 저 유명한 사건에서 완전히 공식적으로 인가되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그 유명하고도 멋진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그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때까지는 명실 공히 수제자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던 베드로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정말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그저 그냥 "저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만 말했더라도 그래도 조금은 나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라고 곁에 가만히 있는 다른 제자들까지 끌어들여서 큰소리를 탕탕 쳐 놓은 후에 그 모양 그 꼴이 되었으니 이제 와서 그 동료들 앞에서 베드로의 체면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제는 수제자는커녕 그들 앞에서 무어라 한 마디 발언할 면목도 없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를 이끄는 리더가 되기는커녕 동료 제자들과 얼굴을 맞대기도 부끄러운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당신 앞에 불러 앉혀 놓고 계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수제자 베드로가 그 치욕적인 실수로 인하여 도저히 스스로는 제자로서, 사도로서 재기할 염치도 면목도 없이 그저 뒷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 오셔서 '너 아직 날 사랑하고 있으면 그것도 괜찮다.'라고 그가 원래 받았던 사명을 일깨우며 격려해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 "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도 곧 이이서 세 번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해 주신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비록 네가 나를 부인하는 실수, 더구나 수제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네가 나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만 틀림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사랑만 있으면 너는 여전히 내 양을 먹일 수제자의 자격이 있다. 비록 동료 제자들 앞에서 안면 체면 다 구겨지는 꼴까지 보였지만 그래도 날 사랑하는 그 마음만 확실하면 너는 앞으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지도할 사도의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본문 18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어지는 19절에서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기록된 그대로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신 것이었습니다.
  
"네가 너의 용기를 앞세우고 큰소리칠 때에는 오히려 날 부인까지 하게 되었지만, 이제 그런 허영과 자만 따위는 다 접어 두고 오직 날 사랑하는 그 사랑만 꼭 간직하고 있으면 너는 죽도록 충성하는 나의 제자, 아니 십자가 순교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교회의 사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실로 태산같이 깊은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뜨겁고도 강력한 격려를 주시면서 19절 하반절에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 베드로의 배반과 회개, 그리고 회복 후에 그가 더욱 충성하게 될 것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우리 예수님의 섭리와 기도 속에 벌써부터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는데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시험당할 것을 예언하시면서도 이미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그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회개하고 돌이킨 후에는 오히려 형제를 굳게 할 사명에 정말 죽도록 충성하게 만드실 것까지도 이렇게 오묘하게 이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나중에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다고 전해지는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십자가에서 죽게 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비록 성경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는 바로 갈릴리 바닷가의 새벽에 주님께서 그에게 해 주셨던 이 격려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죽는 데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자기 용기를 자랑하던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는 그 사랑을 끝까지 간직했던 베드로는 그 무서운 고통의 십자가까지도 오히려 감사하면서 기꺼이 감당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결단력을 과신했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양을 치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신앙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용기를 앞세웠을 때 베드로는 순교는커녕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조차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확실했을 때, 아니 예수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그 사랑이 자기 속에 있음을 깨닫도록 일깨워 주셨을 때, 그는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교의 자리까지도 넉넉히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단 베드로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자는 바로 그 사랑의 힘만으로도 죽도록 그리고 끝까지 충성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닐 시절에 학교의 경건회 시간에 어떤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구소련 공산주의의 치하에서 박해을 받고 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실제 기록 영화였습니다.
  
소련 공산주의 하에서 러시아 전통의 그리스 정교는 완전히 그 공산주의 정부에 빌붙어서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물론 아무 박해도 탄압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진짜 크리스천들은, 특히 소련에서는 침례교 신자들이 그랬는데, 그 무서운 공산주의의 무신론 독재 정치 아래에서도 그야말로 목숨을 내걸고, 아니 목숨과 바꾸어 가면서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영화 속에는 기독신자들이 산속 깊은 곳에 몰래 모여서 비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 고문 받은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는 신자, 곳곳에서 체포되어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간 성도들의 사진들, 아버지와 남편을 생이별하고 남게 된 가족들의 모습 - 이런 장면들이 연이어졌습니다. 

솔제니친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보면 소련의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의 죄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00그램의 검은 빵, 멀건 양배추 국 한 그릇이 그 하루 11시간 중노동 하는 죄수의 한 끼 식사였습니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 속에서 잠시라도 가만히 서 있으면 그대로 몸이 얼어붙기 때문에, 선 채로 꼿꼿한 동태가 되지 않으려면 아무리 배고프고 힘없어도 죽도록 곡괭이를 휘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일과였습니다.
쥐라도 한 마리 잡아서 구워 먹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최고의 몸보신이 될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는 바로 그런 강제노동수용소에 실제로 갇혀 살다가 출감하게 된 한 성도가 간증을 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몇 신자 동료들과 함께 수용소로 이송되던 도중에 원래 지병이 있던 한 동료 신자가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또 자기가 수용소에 있던 중 어느 추수감사절에 정말 모처럼 얻게 된 생선 두어 마리와 양파 몇 개를 앞에 놓고 함께 수감되어 있던 동료 신자들 몇 명과 함께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자기네들로서는 그야말로 '풍성한' 추수감사절 잔치를 했던 것을 간증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그들 주위를 완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그 구소련의 참된 기독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신앙의 싸움을 실로 처절하게 치루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제목이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넉넉히 이기느니라(More Than Conquerors)"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제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화 내용에서는 아무리 보아도 '넉넉히 이길' 만한 무슨 건더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 한 시간 드리기 위해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체포되면 끌려가야 했고 때리면 맞아야 할 뿐 아무 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재판도 없이 그 동토의 강제수용소에 10년 혹은 25년을 집어넣어도 그들을 변호해 줄 사람, 편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일방적으로 비참하게 당하기만 하는 형편에 도대체 뭐가 있다고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습니까?
그냥 '이길 수 있다'라고만 해도 말도 안 될 소리인데 '우리는 넉넉하게 이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남들 듣기에는 그저 실없는 큰소리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그것은 너무 고통을 많이 받아서 정신을 잃게 된 사람의 헛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영화의 제목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말이 로마서 어디엔가 나오는 말이라고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된 제목이었기 때문에 좀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경건회가 끝난 후에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바로 로마서 8장 3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정말 말이 되는, 정말 진실한, 오히려 자신만만한 소리인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대답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였습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 실로 얼마나 놀라운 승리선언입니까?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제갈공명이라 해도 자기편이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에 완전포위 당해 있을 때에는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장담은커녕 실낱같은 희망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최첨단 스마트 전자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군대라 할지라도 아군 병사들의 대다수가 '죽임'을 당하고 겨우 조금 남은 병력조차 다 '도살할 양'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는 그저 백기를 들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성도는 "이 모든 일에", '이 절대적으로 신자에게 불리해 보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재기불능처럼 보이는 절망을 당해도' 오히려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아주 여유 있는 승리의 확신을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혔던 기독신자들이 외친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소리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눈을 똑똑히 뜨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서 예수님 한 분만을 끝까지 사랑하고 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실로 자신만만한 승리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신자가 큰 환난을 당하게 될 때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장 자폭할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던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고 자녀가 사고를 당하고 배우자가 불치의 병에 걸리든지 하면, 불신자들은 그를 향하여 "죽더라도 하나님 욕이나 한 번 하고 죽어라."고 욥의 아내가 욥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성도의 입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 실로 멋있는 역전승, 실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자들의 필승 확신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도는 이처럼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 받음'과 동시에 '미래의 사명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할 수 있게 됩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 한 여인을 향한 짝사랑도 그 정도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어느 정도가 되겠습니까?
이 사랑만 분명히 있으면 우리같이 오점투성이의 죄인도 주님께서 맡기신 직분을 감당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이 사랑만 간직하고 있으면 저와 여러분은 지난날 아무리 부끄럽게 살았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랑만 끝까지 붙잡고 살면 아무리 약하고 겁 많은 졸장부였다 해도 이제는 오히려 순교의 자리까지도 넉넉히 승리하며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주님의 질문에 "예, 그렇습니다. 제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도는 이 땅의 남의 생애를 그 주님의 양떼와 그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삶을 살다가 남이 그를 '띠로 묶어' 원치 않는 곳으로 붙잡아가서 '그 팔을 벌리게' 할 때까지도 넉넉히 이기면서 끝까지 충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6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지를 정말 감동적인 말씀으로 증거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벌써 예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아니 우리가 아예 하나님과 "원수"로 돌아섰을 때에조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과 적대관계로 살던 우리를 오히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우리에게 물어 오실 때, 그 예수님은 이미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실 정도로 우리를 먼저, 지극히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사랑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는 과거의 죄를 이미 완전히 용서받은 '행복한 의인'입니다.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고 한 성도는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찬 512장 1절) 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또한 미래의 사명 완수를 위해 순교의 자리에까지도 갈 수 있는 '충성된 증인'이 됩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라는 고백만 분명하면 그 어떤 시험과 핍박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이 주님의 질문 앞에 '예수님 정말이지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이것 하나만큼은 언제든지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는 '행복한 예수 제자', '충성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