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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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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 (마 28:16~20)

십자가 전과 후의 차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  모든 삶의 중심, 예루살렘의 입성은 좋은 분위기의 절정을 이루었다.  우리는 이를 종려주일로 지키는데, 온 성이 소동하도록 사람이 길로 몰려 나와서, 자기들의 옷을 벗어 레드 카펫을 만들고 그 위에 종려나무가지를 던져 깔았고, 또한 손마다 환영의 표시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고, 아마 즉석에서 찬양대가 조직되었을 것인데, 앞뒤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노래하는 대단한 행진이 벌어졌다.  왕의 행차 같았다.
그런데, 그 왕이 어이없게 십자가에 죽어갔다. 예루살렘 입성하는 길과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골고다의 길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특별한 구경꺼리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망과 좌절, 허탈과 실의에 빠졌다. 

시소타기 인생

인생이 때로는 시소타기와 같다. 올라가는 좋은 것이 계속 될 수 없다.  언젠가는 내려오게 되어 있다.  아픔도 있고, 실망도 있다.  내려온 것이 정말 나쁜 것인가?  때로 생각대로 안 된 것이 정말 망한 것인가?  좋으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완성해 나가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을 알게 된다면 십자가는 절망과 실패가 아님을 알 것이다.

먼저 되어야 할 것들

우리의 삶의 정황에 십자가 전과 후의 모습과 같은 때가 많다.  시소타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진정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지상 대명령을 다시 보게 되었다.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고 제자 삼으라”는 것을 다시 전하라고 하시나 보다 했다.  본문을 붙잡고 새벽 기도마다  엎드렸다.  그런데 주님은 뜻밖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다.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알지만 잘 되지 않는 지상 대명령은 주님의 섭리와 계획이니 주님이 하실 것이다. 베드로를 처음 부르셨을 때, “내가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넘어지기만 하던 베드로는  실지로 사람낚는 어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아이들도 공부 잘하고 싶다. 그런데 거기에다 공부 잘하라고 계속 말하니, 잔소리로 들리고 더 중압감이 찾아오고 반발감이 생겨진다.  우리교회의 5대비전 3대사역이 잘못되지 않았다. 가야할 곳임을 알고 흔들 깃발임도 안다.  그런데 비전30333만 보면 숨고 싶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물을 길어 올리도록 하셨다. 비전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단지 주님 주신 생수만 먹으면 된다.  우리의 영적 갈함이 해결되면 저절로 되는 기쁨을 누리며 선순환의 역사가 일어난다. 

갈릴리로 가라

십자가의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갈릴리로 가라”   
왜 갈릴리로 가야 하는가?  갈릴리는 주님과 함께 했던 순간이다.  주님의 주 활동 부대는 가버나움, 벳세다 등인데 갈릴리의 마을들이다.  주님은 세례를 받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마4,13),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마4,12),  성경의 예언대로 이방의 갈릴리(마4,13-16)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마4,18) 3대 사역을 하신 곳도(마4,23) 갈릴리였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은혜의 현장들을 목격하였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큰 권능으로 만져 주시는지 매일매일 알게 되었다. 
식사하고 주무실 겨를도 없는 사역이었지만, 주님은 결코 제자들을 일 시켜 먹으려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막 3:13-14, 개정)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웨슬리 목사님은, 평생에 가장 좋은 것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 것’이라고 유언했다.  대지도자 모세가 죽은 후에,  백성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과 싸워야 하는 일을 맡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 주셨는데,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마1,21-22).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항상 함께 하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요 16:7-10, 개정)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13-14, 개정)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만물의 주인이 함께 하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 옆에 계셔 다 알려 주시니 얼마나 신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갈릴리로 갑시다. 

지시하신 산에 올라가라

또, 지시하신 산에 올라가면 된다. (시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말씀한다.
지시하신 산은 어떤 산일까요?  성경에는 지시하신 산이 어디인지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그 산이 어딘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오는 ‘산’은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 -특별하게 만나 주심
성경에서 말하는 산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  하나님 임재 앞에 서면 모든 인생이 달라진다. 바뀌어진다. 갈릴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때로 함께 하는 것을 잊을 때가 많은데, 임재는 강력한 만나주심, 곧 특별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일이 그런 날이다.  예배 때 임재를 놓쳐서는 안된다. 

 ①에덴동산.  (창 2: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사람을 두시려고 지은 곳이 바로 동산이었다. 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만났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생의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②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때,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만나신다. (출 3: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③시내산.  곤고한 광야 길을 가고 있을 때,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 이스라엘을 세우실 때, 시내산에 임재하신다.  

(출 19:2-6)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④갈멜산 . 열왕기상 18장은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우상 선지자들 850명과 대결하여 불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보였다. 

(왕상 18:36-39)『[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지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지금 우리와 함께 일하심을 보기만 하면 주저 앉은 인생이 일어서게 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지시하신 산으로 올라가라. 

⑤변화산.  마17장에서 주님은 3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랐다. 그 산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셨다. 모세도 엘리야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진정한 도움의 손길이 아님을 보여 주셨다.  5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8절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산에서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오늘 본문에서도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반드시 되어지는 지상 최대명령을 받고 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하나하나 이루어져 가고 있다.  상황을 역전하는 것, 전세를 변화시키는 것,  시소같은 인생에서 내려왔을 때 창공을 향하여 올라 가는 것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요1,14) 예수님,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으니 자기 땅에 오셨고(요1,11) 그러하기에 세상 일은 그 말씀대로 되어진다.  그러므로 쫓겨난 에덴동산의 회복은 말씀자체이신 예수님을 우리 모시어 들이는 것이다(요1,12).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민족을 울부짖는 종살이에서 건져내는 하나님 말씀을 받는다.  입이 둔한 자이고, 80 노인이고, 가진 것은 지팡이 하나였지만,  하나님 말씀 “내 백성을 보내라, 저들이 나를 예배하리라!”만 선포했더니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시내산에서는 친히 돌판에 하나님 말씀 십계명을 써 주셔, 그 말씀을 붙잡고 사는 위대한 민족, 제사장 나라가 되게하셨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심을 보여 준 엘리야는 영적 전쟁에 탈진했다.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그를 어루만지시며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마시면서 쉬게 하면서 40일을 가게 하시더니 다시 산에 오르게 하신다. 무엇하러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 말씀 듣게 하려고! 

(왕상 19:11-12, 개정)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별 오란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진짜다!  말씀 앞에 서, 말씀을 듣는 엘리야는 새로운 힘을 얻고 새로운 비전을 찾고, 새로운 역사를 이룬다. 

그 유명한 말씀,  인도의 간디를 사로잡은 말씀, 무저항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룬 사상적 근거가 된 주옥같은 말씀 마5-7장은 산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지시하신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을 믿는 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그 시작이 7교회에게 편지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매 교회마다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성도가 그 말씀에 붙잡혀 사는 성도가 세상을 이긴다.  하나님 말씀에 더하거나 빼면 바로 그것 때문에 재앙이 더하고, 생명에서 버려진다고 했다(계22, 18-19).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어떻게 하든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 살려고 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계 2:7, 개정)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11, 개정)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 2:17, 개정)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서연교회 이명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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