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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메아의 믿음, 우리의 믿음 (단 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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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메아의 믿음, 우리의 믿음 (단 3:8~18)


어느 기독교대학의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여러 역사적 사상들이 검토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좀 뻔뻔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쉬는 시간에 교수가 잠시 나간 사이 당돌하게 교단 앞으로 걸어 나가 칠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God is no where!’(신은 아무 데도 없다) 그리곤 의기양양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 곳에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경건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교단으로 걸어 나가 앞의 학생이 칠판에 써놓은 문장을 이렇게 고쳤습니다. ‘God is now here!’(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 
그곳에 있던 학생들은 그 기막힌 반전에 모두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데도 없다고 믿는 사람과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모두는 ‘God is no where! 신은 아무데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God is now here 하나님이 여기에 계심을 믿는 성도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믿음대로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만나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여 주신 놀라운 축복과 은혜로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 속에는 다 하나님이 여기에 계심을 믿는 자들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이 여기에 계심을 분명히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데도 없다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가 본문을 통해 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단3:1절에 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왕 느브갓네살은 높이가 60규빗넓이가 여섯 규빗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금신상을 만듭니다. 
이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규빗은 사람의 팔꿈치부터 손끝까지의 거리로 일반적으로 45cm로 계산합니다. 자 그럼 느브갓네살왕이 세운 금신상의 높이는 60규빗이니까 약 27m이고 넓이는 6규빗이니까 2.7m 정도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청나게 큰 금 신상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5절에 보니 모든 악기가 울려퍼질 때에 그 금신상앞에 모든 백성이 절하게 하기 위하여서였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니 그 금 신상앞에 절하지 않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넣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7절에 보니 모든 백성과 나라와 방언하는 자들이 악기 소리를 들으며 금 신상앞에 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사람이 금 신상앞에 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금 신상앞에 절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2절에 보니 이 사람들은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미 단2장에 소개되는 대로 생명이 경각에 놓이는 최악의 위기 상황속에서 다니엘과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오히려 그 최악의 위기상황을 최선의 축복의 상황으로 바꾸었던 믿음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최악의 위기의 상황을 기도함으로 최선의 축복의 상황으로 바꾸었던 이 세 친구에게 오늘 또 다른 불과 같은 시험이 찾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시험을 통과했구나 하고 좀 안심할만하면 어느 순간엔가 더 크고 두려운 시험이 우리를 업습 하곤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발자국조차 떼기 어려운 절벽 가까이로 부르셔서 조심스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더니 절벽 끝까지 더 가까이 오라고 하시고 그래서 절벽 끝으로 더 가까이 갔더니 이제는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아예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과 같은 느낌일 수 있습니다. 
살얼음판을 걷듯 겨우 겨우 한 순간 한 순간 믿음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오히려 매몰차게 절벽 아래로 내던져버리시는 것과 느낌을 우리는 삶 속에서 받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랬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벽 아래로 내동댕이 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벽 아래로 내동댕이 치는 것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늘의 왕자 독수리는 새끼가 아직 날개 짓을 할 수 없는 연약한 상태에서 새끼를 하늘에 내동댕이칩니다. 그럼 새끼 독수리는 우리 엄마가 미쳤나? 왜 나를 이 하늘에 내팽개치지? 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서운해 하고 한편으로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으며 아직 채 펴지지도 않은 날개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다가 힘에 부쳐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땅바닥을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는 순간 어미 독수리는 어느새 날아와 다시 새끼 독수리를 등에 업고 올라갑니다. 그럼 그렇지 새끼 독수리가 안심하고 휴 이제 살았다 하는 순간 또 다시 새끼 독수리를 이번에는 더 높은 하늘에다 내동댕이 칩니다. 뭐야 장난치는 거야 뭐야? 우리 엄마 정말 미쳤군 왜 자기 새끼를 이렇게 죽이려고 몸부림치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또 날개짓을 하고 그런 수 없는 과정을 통해 결국 새끼 독수리는 하늘의 왕자로서의 위엄을 뽐내는 어미 독수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꾸만 절벽 끝으로 인도하시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아예 그 절벽에서 밀어 버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만큼 힘겹고 어려운 삶의 순간들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그 순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그와 같은 고난과 시련에는 반드시 뜻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늘의 왕자를 만들기 위한 어미 독수리의 마음처럼 우리를 진정한 하늘나라 왕자요, 공주로서 만들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벽가운데 내어 밀지만 우리에게 날개를 주셨습니다. 하늘을 향해 비상할 수 있는 믿음의 날개를 주셨습니다. 하늘을 향해 비상할 수 있는 기도의 날개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위험과 고난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과 기도의 날개를 통하여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멸망하지 않고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요, 왕자와 공주로서 만들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이런 믿음의 날개가 있었습니다.13절에 보니 느브갓네살왕은 노하여 자신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를 불러 들여 왜 절하지 않았느냐고 이제라도 절하면 용서해주겠다고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6절에 믿음의 사람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왕을 향하여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믿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첫 번째 분명한 대답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가졌던 믿음은 분명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1000도가 넘는 풀무불속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지 않고 겁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무섭고 겁나기 때문에 한번 쯤 생각해보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말할 수도 있고, 셋이 의견을 통일할테니 시간을 달라고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이 이야기하는 과정속에서 우리 그냥 절하는 척만 하고 절은 하지 말고 절하겠다고 말하자라고 정하고 느브갓네살왕에게 절하겠다고 말하면 얼마든지 풀무불의 뜨거운 고통을 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런 신앙의 회색지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뜨뜨미지근한 신앙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세상과 하나님, 우상과 하나님중에 어느쪽이 더 유리한쪽인가를 저울질하고 줄타기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맞으면 맞는 것이고 틀리면 틀린다고 대답할 수 있는 분명한 용기를 가진 신앙인 것입니다. 
손해를 볼 걸 알면서도 고통을 당할 걸 알면서도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는 신앙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실패한 사람 같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이 사람은 패배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위기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대답한 사람에게 하나님 역시 그의 위기의 상황속에 내가 여기 있다고 분명히 대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한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위기의 상황속에서 역시 그 사람을 반드시 선택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이런 분명한 대답의 신앙인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은 능히의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단3:17절 말씀을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이 능히 풀무불에서 건져내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음을 믿는 확실한 신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음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어떤 한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다 줄을 매달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긴 장대를 하나 들고 걸어갑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채 고개가 빠져라 곡예사를 쳐다봅니다. 조심 조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무사히 건너간 곡예사를 향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집니다. 
곡예사는 밑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건너오는 것을 보셨죠? 자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겁니다. 저를 믿으십니까? 네 믿습니다. 다들 난리가 났습니다. 
신이 난 곡예사는 이번에는 이 끝에서 외발 자전거를 타고 저쪽으로 다시 건너갑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손에 땀을 쥐며 지켜봅니다. 곡예사는 이번에도 무사히 이쪽으로 건너왔습니다.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큰 박수와 환호성으로 곡예사를 응원합니다. 무사히 반대쪽으로 건너온 곡예사는 이번에 또 다시 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이번에도 외발 자전거를 타고  그리고 이번에는 저 혼자가 아니라 제 어깨위에 한 사람을 태우고 건너갈 겁니다. 제가 건너갈 것을 믿으십니까?  그 어떤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환호성과 박수속에 믿는다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곡예사가 조용히 말합니다.  자 그럼 제 어깨위에 타실 분은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그토록 믿는다고 떠들어대던 수 많은 사람들중에 어느 한 사람도 곡예사를 향하여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곡예사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라고 수 없이 고백하지만 그 하나님께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그 하나님이 걱정 말고 올라타라고 하여도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나는 못 올라갑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그런 입술의 고백이나 환호성이나 박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떠한 위험 요소속에서도 그 분이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어맡길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롬4장17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이런 능히의 믿음을 가진 위대한 믿음의 사람 한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다함께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롬4:17-24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몸의 죽은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동일한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를 위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죽음속에서 생명을 믿는 것입니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믿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믿는 것입니다 . 끝에서 시작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계산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산과 계획속에 갇혀 계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 소년이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이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타래에 묶인 실이 곧바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연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소년을 쳐다보며 "연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구나. 너는 아니?"라고 물었다. 소년이 대답했다. "그럼요. 이 줄을 잡아보세요. 팽팽하잖아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제 머리 위쪽에서 푸른 하늘을 날고 있어요. 줄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키시고 복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압니다. 우리의 '연줄'인 믿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명히 이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의 연줄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의 연줄을 끊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원수마귀는 어떻게든 이 믿음의 줄을 끊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롬8:39절 말씀과 같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심을 잊지 않으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1834∼1892)가 하루는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가 기차표와 함께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맞은편 좌석에서 본 신사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걱정하자 스펄전은 "나는 집회를 인도하러 가는 목사인데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터이니 걱정없다'고 말했습니다. 조금 후 차표를 검사하던 차장이 이 자리에 왔다가 신사가 몇 마디 하자 정중하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신사는 말했습니다. 
"저는 철도국장인데 목사님 말씀에 감명받았습니다. 편히 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켜 주실것 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지켜주시고 도와주실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신줄로 믿습니다.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1000도나 되는 풀무불과 같은 죽음의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능히 건져내 주실 것을 믿으십니까? 100세에 아이를 낳는 것은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면 그것도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믿었던 아브라함처럼 도저히 희망도 기대도 없는 그 일이, 그 사건이, 그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고 변화되고 회복되게 될 것을 믿으십니까? 

오늘 그것을 믿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대로 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은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었습니다. 
18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능히 건져내실 것을 믿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이 아니기에 그렇게 건져내주시지 않을 지라도 나는 절하지 않겠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능히의 신앙보다 한 차원 높은 신앙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능히는 내 믿음대로 되길 원하는 간절한 믿음의 표현이지만 그리아니하실지라도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되어진다면 어떤 길이든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며 따라가겠다는 참된 믿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던 가장 높은 수준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으시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믿음은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시는 죽음의 길을 선택하시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는 길도 담대히 걸어가겠다는 순교자적 신앙이요 믿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처럼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이런 순교자적 신앙을 가지고 피 뿌리며 쓰러져 갔던 수 많은 순교자들을 통하여 이어져 온 순교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피로부터 시작된 피의 역사가 바로 기독교회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의 길이라도 담대히 걸어가겠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어느 순간부턴가 한국 교회는 편리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왜 작은 교회는 자꾸 작아지고 큰 교회는 자꾸 더 커지고 있는 것일까요? 왜 회개를 외치는 선지자적 설교를 싫어하고 격려와 위로의 설교에만목말라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현상자체가 다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피의 역사로 이어져온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 저를 포함한 오늘날 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편리주의와 안일주의는 반드시 문제가 있는 부분이요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순교자적 신앙을 회복하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순교자적 신앙이란 단순히 주를 위해 정말 피를 흘리는 것을 넘어서는 신앙입니다. 
순교자적 신앙이란 죽음앞에서도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참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때 우리는 아직 건강을 잃기에는 너무 해야 할 일이 많은 아까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중병에 걸리는 안타까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 
또 어떤 때 우리는 아직 죽음에 이르기에는 너무도 아깝고 안타까운 그리고 쓰라린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가슴 아픈 일도 경험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있는 지,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의심이 들기도 하며 심지어 원망스럽기까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십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시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시다고 이사야 55:8절-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에 이해할 수 없어도 지금 우리의 생각에 납득이 되지 않아도 지금 우리의 생각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도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생각이요, 가장 좋은 길이요, 가장 축복임을 우리는 인정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정말 믿을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이요, 순교자적 신앙인 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의 퀼른에 있는 한 지하감옥에 들어갔다가 벽에 새겨진 시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 구절은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어떤 이름 모를 유대인이 쓴 시 구절이었습니다.  
그 유대인은 이미 처형을 당한 다음이었기에 지은이도 모르고 제목도 모르는 시, 투박하고 짤막한 시입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더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구름에 가린 것 같고,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다고 하여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운데 숨 쉬고 있으며 우리가 숨을 멈추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멈추지 않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사랑으로 변함없이 이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이며 순교자적 믿음이기에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믿음이 임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이와 같은 분명한 대답의 신앙 능히의 신앙 그리고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국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속에 던져집니다. 22절에 보니 심지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태워 죽이기 위해 풀무불속에 던져 넣었던 사람들이 먼저 태워 죽임을 당할정도로 풀무불은 뜨거웠지만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대답과 능히 건져낼 것을 믿는 믿음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함으로 그 길을 따르겠다는 진정한 믿음의 세 사람은 결단코 풀무불속에 죽임을 당치 않았습니다. 
25절에 보니 신들의 아들 즉 예수님께서 풀무불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의 풀무불속에 내버려두신 채 방관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이 평소보다 7배나 뜨거워서 태워 죽이는 사람이 먼저 죽임을 당할 정도로 뜨겁고 고통스러운 죽음과 같은 풀무불이라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십니다. 
사43:2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고난의 풀무불이 아무리 뜨거울지라도 그 고난은 나혼자 외로이 감당해야 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그 어떤 고난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절대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시험속에서도 승리하시는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모택동으로 인해 중국에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추방명령을 받아 모두 중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나던 선교사 한 분이, 제자훈련을 받고 중국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자란 중국 목사님과 차를 마시면서 물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환난과 핍박이 몰려올 텐데 어떻게 견녀내시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중국 목사님이 가만히 차를 바라보면서 말을 잇더랍니다. 
"선교사님, 차가 뜨겁죠?" 그러면서 차 티백을 들었습니다. "이 티백이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 맛을 잃었나요? 아마도 뜨거운 물 속에서 진짜 맛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저는 이 신앙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 환난 속에서 주님 앞에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차의 맛이 뜨거운 물속에서 진정 우러나올 수 있는 것처럼 참된 신앙은 풀무불과 같은 뜨거운 역경속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가졌던 분명한 대답과 능히 그리고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진정한 믿음으로 풀무불과 같이 뜨겁고 고통스러운 역경속에서 오히려 신앙의 빛을 발하고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더욱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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