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의심을 정직하게 드러낸 사람 (요 20:24~29)

  • 잡초 잡초
  • 252
  • 0

첨부 1


의심을 정직하게 드러낸 사람 (요 20:24~29)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4)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5)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29)
<요한복음 20장 24~29절>

할렐루야!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제한된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이 끝이 아님을 선언해 주신 
승리의 날입니다.
부활절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래 사는 이들을 보면 대체로 잘 웃는다고 합니다.
옆의 분 얼굴을 보면서 웃으며 인사합니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으로 사심을 축하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정(情)이 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 용기있는 대단한 분입니다.
- 매사에 분명한 것을 좋아하고 정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2000년 가까이 
‘의심 많은 사람’으로 불려 지고 있습니다.
그는 디두모(Didymus)라 불리는 “도마(Thomas)”입니다.
도마는 히브리어, 디두모는 헬라어로 둘 다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도마가 누구와 쌍둥이 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마 10:3, 막3:18, 눅 6:15 … 등에 도마의 이름이 
마태와 나란히 소개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마태와 쌍둥이 일 것이라고 하지만 별로 신뢰할 만한 주장은 못됩니다.

요한복음 21장 1~3절을 보면
도마의 원래 직업은 어부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도마”라는 이름은 
항상 “의심 많은”이란 말과 함께 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를 ‘의심’이란 단어로만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마도 한 가정의 기둥이었을 것입니다.
그도 가족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어부였을 것입니다(요21:2).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고
물고기를 잡던 삶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다른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마 19:27 참조)

도마는 조용히 예수님의 뒤나 따라 다니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확실한 제자/예수님 편에 분명히 서 있는 제자였습니다.

‘나사로 이야기’에서의 도마

도마가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이야기’에서입니다(요11:1~16).

그때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품었던 적개심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요 8:59, 10:31)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 8:59)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요 10:31) 

그래서 예수님은, 잡고자 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요 10:39)
요단강 너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비교적 안전한 곳에 머무르셨습니다(요10:40).
그런데 그곳으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 
‘나사로가 병들었으니 와 주시기를 바란다’는 소식이었습니다.(요 11:3)
급한 연락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고(요11:6)
나사로가 사는 마을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요 11:7)
예수님이 가자고 하신 베다니는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고 붙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베다니로 가자’는 말을 들은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하며 막아섰습니다.
제자들은 그 위험하고 살기등등한 곳으로 
다시 간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도마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요11:16)
이 말 한마디를 보면 도마가 ‘예수님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사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불확실했던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평가 절하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더라도 예수님 가시는 곳에 가자’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가서 죽자’고 용감하게 말했던 사람입니다.

분명한, 확실한 것을 좋아한 도마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도마는 분명한 것/확실한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날이 다가왔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이유와
그 후에 생길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계셨습니다(1~6절).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

그토록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시자 근심하고 있었습니다.(1절)
그런데 도마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절)
사실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때 도마는 가만히 아는 척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퉁명스런 한 마디의 질문은
“모든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어서 그와 같이 발생한다고 
고집하는 모든 지성인을 대표”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상훈 지음. “신약의 열 두 제자와 그밖의 열 두 사람”
서울: 종로서적, 1996. p.82. 참조]

비록 ‘의심 많은 회의론자’라는 소리를 듣는 도마지만,
그가 다른 동료들의 궁금증까지 포함하여 했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성경의 중심 진리’가 되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죄 값을 치루시고(롬 6:23)
구원의 길, 부활과 영생의 길을 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그 구원의 길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 질문 했던 사람입니다.

정직한 회의의 사람, 도마

요한복음 안에 도마에 관한 세 번째 기록이 
예수님이 부활 하신 이후에 있었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도마는 오늘 본문의 사건 때문에 ‘의심하는 사람’의 대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모두 도망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눅 24:10)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겁에 질린 채 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습니다.(요 20:19)
그러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셨고
“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 20:19) 하며 평강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24장 37절에 보면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눅 24:37) 했습니다. 
‘영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유령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 …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고 하시며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 요한복음에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했고 (요20:27)
- 누가복음에는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고 했다.(눅 24:40)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자리에 없었던 도마

그런데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가 왜 그 자리에 없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주신 
첫 번째 선교명령을 놓쳤습니다.(요 20:21)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복된 자리를 놓친 것처럼 
모여야 하는 자리, 복된 자리, 있어야 할 자리에 빠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하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동료들의 증언을 믿지 않은 도마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날로부터 
8일 뒤에(요20:26) 제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도마가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동료 제자들이 하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1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했지만 … 
(We have seen the Lord Jesus!) (요 20:25)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요 20:25) 
도마는 ‘증거를 확인해야만 믿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도마처럼 ‘내가 봐야 믿겠다, 내가 만져봐야 믿겠다’는 태도는 
천국도 가봐야 알고, 지옥도 가봐야 알지 
안 가보고 어떻게 알겠냐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잘 들으세요.
천국이나 지옥은 ‘한 번 가보고’ 결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거기는 아주 가는 곳입니다. 

여행을 가거나 소풍을 가기 전에 인솔자가 현장에 먼저 가봅니다.
위험하지는 않는지, 교통편은 어떤지? 이것저것 현장을 확인합니다.
그런 것을 ‘답사’라고 합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답사해 보고 ‘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냥 가는 곳입니다.

작년에 아프리카 <모잠비크> '베이라'지역 돈도(Dondo)에 
<돈도우교회>교회를 건축하고 봉헌식을 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모잠비크에 가본 적이 없어, 현지선교사를 통해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때 제 관심은,
- 모잠비크에 잘 갈 수 있을까? 
- 가지고 가는 간판을 끝까지 잘 가지고 갈 수 있을까? 

- 선교용품으로 준비한 볼펜, 사탕, 축구공 … 등을 잘 가져 갈 수 있을까?
온통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봉헌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몇 명이나 모이게 될지 …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잘 갔고, 봉헌식을 잘 끝냈습니다.
봉헌식을 하고 나니까 돌아오는 날까지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틀 동안 특별한 일 없이 그냥 지내다 돌아왔습니다.

금년에도 모잠비크에 2개의 교회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7월말에 봉헌식을 하기 위해 가려고 합니다. 
작년에 가본 경험에 의해 이번 봉헌식이 끝나면 이틀이라는 여유시간동안
아프리카에 있는 세계 3대 폭포중의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를 가든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있는 ‘희망봉’에 가 보던지 
현지사정에 따라 정하려고 합니다.

현지선교사에게 제 뜻을 전했더니 
“빅토리아 폭포에 가는 것은 비행기 연결이 잘 안되니 
희망봉 가는 일정을 잡겠다고 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작년 봉헌식에 갔다 왔던 분들에게 얘기했더니
“왜, 작년에는 거기에 … ” 안 갔었느냐면서 속상해했습니다.

그땐 제가 몰라서 그랬지만 
금년엔 작년에 가보았던 경험을 참고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운 것이지요.

천국이나 지옥은 여행하듯 가보고 ‘갈지 말지’를 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한 번에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여 판단한 것이 아니면
믿지 않겠다는 사람은 사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물의 일부분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보다, 못보고 못 만지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내 손으로 만져보고, 
내 발로 가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습니다. 못 가보는 곳이 이 세상에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눈으로 확인하고, 자기의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겠다고 하는 
도마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여기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저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헤아리기 어려워 
의심하고 투정부리고 몸부림치며 부르짖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 어떤 부부는 눈물로 기도하고 
그토록 사모하며 아이를 기다리는데 아이가 없습니다.
인공수정도 해봅니다. 그런데도 소식이 없어 안타까와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원치 않는 임신이 되었다며 탄식하고
태연하게 낙태를 합니다.
저는 왜 그런지 답답하고 이유를 알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착하게 살던 권사님이 새벽기도하시고 집에 가시다가 
음주운전에 과속/속도위반 차량에 치어 돌아가셨는데 … 
운전자는 태연히 멀쩡하게 돌아다닙니다.
그 권사님 입관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데 
동네사람들과 믿음 없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 했다는데, 착하게 사셨는데 … 
왜 예수 믿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새벽기도하고 오다가 사고가 났을까?’… 
저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그럼 우리교회 권사가 캬바레 갔다 오다 죽어야 되나?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권사가 기도하러 갔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신 건 슬프지만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술 먹고 운전하다 사람을 치어 죽인 사람은 멀쩡하게 돌아다니는데 
그 권사님은 그 새벽에 돌아가셨습니다.

- 그렇게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고 성실하게 일하며, 
낮의 해와 밤의 추위를 견디며 열심히 사는데도 … 
온갖 어려움은 혼자 다 당하고 하는 것마다 안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못된 짓은 다하고 설렁설렁/대충대충/어영부영 일하며 … 
남에게 아픔을 주고 남의 눈에서 눈물을 뽑으며 살아도 
하는 일은 잘 되고 어려운 일 겪지 않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목사인 저도 ‘하박국’처럼
‘하나님 왜(Why… ? 합1:3) 이런 일이?’하며 항변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공평하지 않습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느끼는 불공평까지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 ”(살전 5:18)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크레이그 그로쉘(Craig Groeschel)목사도
그의 책(Confessions of a Pastor)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러나 그분은 공평하지는 않으시다.
공의와 공평은 서로 다르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당연히 내 죄들의 결과를 당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공평하지 않으신 그분을 찬양한다.
그분은 공의로우시므로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한다(롬6:23).
그러나 자비하신 예수께서 친히 무죄한 피를 흘리셔서 
내 죗값을 치르셨다. 자신의 목숨을 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공평하지는 않으시다. 
그분이 공평하시다면 나는 영원히 고통당해야만 한다.>

- 만약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그대로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한다면 … 범죄하다 손이 잘린 사람, 
범죄하다 눈 뺀 사람, 범죄하다 발이 잘린 사람이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 만약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멸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이곳 저곳이 불로 망하는 도시가 있어야 합니다. 
- 만약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슬쩍 감추고 다 드리는 척하다가 
현장에서 즉사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
교회 교회마다 입구에서 즉사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때그때 징벌하시지 않습니다.

시편 103장 10,12절에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0, 12)
[ Craig Groeschel, Confessions of a Pastor, 윤종석 옮김,
「목사로 산다는 것」 서울: 두란노, 2008. pp. 124~125. 참조 ] 

지금 제가 도마의 변호인이 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의심이 들어 확인하고 싶을 때가, 
하나님께 왜냐고 묻고 싶을 때가 많다는 고백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왠지 ‘도마가 저 같아서 … ’,
‘왠지 제가 도마 같은 때가 많아서 … 도마에게 정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복

도마는 의심 많은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거나 안 믿어지는 것을 믿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그러자 도마는 그 자리에서 
“ …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라고 고백했습니다. 

손으로 확인해봐야 믿겠다고 했지만 … 
실제로 손을 만지거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요20:27~29)
예수님을 만난 도마는 만지지 않아도 충분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감탄사로 되어 있습니다. 
“My Lord and my God!”-NIV

도마의 고백에/반응에 예수님은 
“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20:29)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복(福)”의 주인공이 우리들의 것이고, 
우리 모두 그 복의 주인공이 된 것을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가 무의미합니다. 
-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 부활이 없으면 예배의 자리에 있는 우리는 
참으로 한심한 바보들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의심이 갈 때가 있습니다. 

도마처럼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고, 
때로는 실망해서 복된 자리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고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도마를 책망하고 버리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버리시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주변에 믿지 못하고 토라지고, 
모임에서 멀어지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 
참고 또 참으며, 기다려 주고 또 기다려 주며
예수님처럼 …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 있는 8복과 함께 
도마 때문에 말씀해 주신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받을 복도 알아야 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복”
여러분 모두 그 복의 주인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 
보지 못하고도 믿는 믿음의 자리에 있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속상하고 답답하다 해도 …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이 있다 할지라도 …
그래도 결국엔 도마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 
주님을 고백하며 사는 자가 참으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도마가 의심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고 했고, 동료들이 하는 말까지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사람의 증언을 듣는 시간이 아니라
도마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받는 복을 우리도 받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때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고 답답해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의 입이 되어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고백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