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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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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1~12)

 
내 용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지금은 ‘첨단 과학시대’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일 년 만에 세상이 변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제일 유식한 사람은 정보가 빠른 사람입니다. 이제는 신문도 우리 집에 배달되는 신문을 보고 말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미 신문이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신문 내용을 다 알고 말하는 빠른 속도의 정보 세상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아마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은 기계 계통의 기술 지식이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뭐든지 기계로 해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스마트 폰’이라는 전화기가 나와서 인기 절정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 가지고 다니면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화, 카메라, 알람, 신문, 방송, 메시지, 일기장, 수첩, 은행업무, 내비게이션, 앨범, TV…. 못하는 것이 없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사용할 줄 아는 사람만 소용이 있지 기계 동작 못하는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젊은이들 앞에서 별안간 무식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외국에 거주하는 가정에서는 최소한 아들, 딸을 화상 통화로 불러내서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지, 보고 싶다고 말만 하면 “화상으로 보면 되지 않아요?” 이것이 자녀들의 대답합니다. 하지만 할 줄 알아야 하지 못한다고 하면 무시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즘에는 금방 금방 세상이 변합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지금 상상도 못하는 세상이 오도록 속도가 빨리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절대 현상이 뭔가? 과학이 아닌 것은 안 믿게 됩니다. 

20세기 과학 발전 시대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 서구 기독교 인구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아닌 것은 다 미신이다.” 과학적 사고가 끼친 하나의 영향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는 과학으로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증거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사람들 마음이 많이 떠났고 이 교회와 학교, 과학과 신앙 사이의 마찰에서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이중성 고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 교회 잘 다니는 신앙 좋은 학생이 공부를 잘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과학 시험을 보는데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우리 신앙적으로 답변하려면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답입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그렇게 써냈다가는 정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 썩다가 그 썩어버리는 원자 세포들이 재수집 되어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말이 효과가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겁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인격 형성의 요소가 이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이성을 포기하고 자기 분열증에 걸릴 때에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정상적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어서 썩던 사람이 어떻게 재구성을 해서 살아서 걸어 돌아다니느냐?” 과학과 신앙 사이에 의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과 저는, 그리고 온 세계는 바로 주님이 그렇게 무덤에 계시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이른 새벽부터 야단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면 우리는 이성이 자기 분열증에 걸린 사람들인가요? 아닙니다. 기독교 진리를 패러독스 진리라고 말합니다. 역설적, 혹은 역리적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풀이하면 말의 논리는 합리성이 없으나 사실입니다. “죽어 무덤에서 썩고 있던 사람이 살아서 걸어 다닌다.” 무슨 합리성이 있는 말입니까? 일반성이 없는 말이며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이것을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하나의 사실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연 법칙만을 진리로 규정하는 것이 과학이요, 그 이상 우리의 이성과 진리를 초월하는 영적 능력이 있다는 힘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경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두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구약이 하나는 증거인데, 구약에 아주 여러 군데 메시야는 이 땅에서 부활하실 것을 미리 예언해 놓았습니다. 시편 16편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이사야 26장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의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라.” 이 메시야의 부활성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다 예언되어져 있는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49편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제일 신빙성 있는 믿음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예언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성에 국한된 제자들의 머리가 이 말을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예언되어진 것이 이루어진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제자들과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다음에 이 부활 사건을 사건대로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의 증거가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증거는 우리가 관계할 것이 없고 예수님에게 핍박을 가하던 사람들의 증언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제일 신빙성 있는 증언이 뭐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고 지키던 로마 군인들의 증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무덤을 굳게 지키던 자들이 예수님이 무덤에서 사라지신 것을 보고 그들이 나가서 “우리가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라나셨습니다.” 과학적이 아니지만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사실적 증언을 합니다. “살아난 것을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살아났느냐?”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과학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패러독스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당황에서 예수를 죽이라고 명령하던 사람들이 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었다고 성경에 나왔습니다. “돈을 많이 갖고 그런 말 하지 말라.” 돈은 확실히 힘이 있나 봅니다. “너희는 가서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해라.”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뭐냐?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절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시던 날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절은 오순절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봤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믿었습니까? “의심하는 자가 있더라.” 왜? 과학적이 아니니까 못 믿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만나 후에도 제자들은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갔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으면 고기 잡으러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여기 있으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실 것이다. 그때 비로소 너희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가 너희에게 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믿게 되었는가? “성령께서 나에게 믿게 하여 주심으로” 이것이 대답입니다. 현상인데도 제자들마저도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믿고 나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순교를 당하면서 전도하러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초과학 시대에 예수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나에게 임재 하여 주셔서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하심으로 믿음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지금까지 예수의 부활은 그렇게 되어서 믿게 되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사명과 교훈이 무엇인가? 이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다 똑같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망을 권세라고해서 사망 권세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 권세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사망을 사망시킨 권세, 이것이 부활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3일 동안 꼼짝 못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 기간이 사망의 권세가 승리의 자축을 즐기는 시간이었습니다.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던 예수를 죽여서 무덤에 가두었노라.” 사망이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3일입니다. 여러분도 살아가시면서 명백한 죽음의 패배가 올 때가 있습니다. 악마가 승리했다고 빈정거리는 웃음으로 나를 조롱할 때가 있습니다. 마귀에게 부여된 3일간의 그 권세를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부활의 아침이 오도록 하나님께서 하나님 믿는 자를 그렇게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망이 궁극적인 승리자였다면 인간의 역사는 지금 빌라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 안에는 빌라도의 후예들의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서 예수의 후예들은 무수하게 핍박하고 피를 흘려왔습니다. 

그러면 지금쯤은 전 세계에 빌라도의 성전이 세워지고 오늘쯤은 빌라도 찬양 예배가 새벽부터 울려 퍼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힘없이 죽어 무덤에 갇혔던 외로운 예수는 이 아침 인류 앞에 부활하셔서 온 세계 가장 많은 인종들이 가장 다채로운 순서로 그의 진리를 이렇게 찬양하고 있고 빌라도는 이름조차 없어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소유한 부활의 진리성이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이 부활에 대해서 설교를 할 때 상대가 누구입니까? 사망 권세였습니다. 그래서 사망을 향해서 말하였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하리로다.” 

사망 권세를 이기는 이성과 합리적인 것을 초월하는 영적 힘을 노래하는 바울의 설교가 있잖아요? 사망에 대해서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다만 잠깐 동안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은 소멸되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명체는 영원히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이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나사로도 죽었다가 무덤에서 살아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죽어서 다시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장례식 하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소생한 것을 부활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또 죽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부활 의미는 예수님과 똑같은 것입니다. 한번 부활하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때 부활하여 하늘에 승천하여 오늘날까지 영원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바로 그 부활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부활은 영생에 대해서 그 약속을 하는가 하면 현실적인 약속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뭐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요셉은 구덩이에 빠져서 형들이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죽었습니까? 살아났습니다. 애굽에 갔더니 시위대장 부인과 간통했다는 누명을 써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죽었습니까? 다시 살아나서 애굽의 총재가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삭은 모리아산 제단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직전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죽었습니까? 다시 살아 180세까지 살았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과 아합 왕에게 핍박을 받아서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죽었습니까? 그는 살아서 승천해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모두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 살아남아서 이 세상에 무시 못 할 백성으로 성장했고 엠마오로 향하는 실망하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 갔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 희망의 빛으로 다시 향하였습니다. 

죽음에서 희망의 빛으로!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찾느냐?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누가 뭐라고 하던 사실적 진리의 패러독스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죽어 무덤에 갇힌 것 같던 공포와 위협의 순간들을 우리가 수없이 만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굴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떨어졌으나” 3천명의 특수 훈련 특공대가 왕의 명령을 통해서 다윗을 죽이려 하고 찾아다니는데 어떻게 살아남습니까? 13년 동안 굴속을 헤맸는데 다시 살아남습니다. 부활하여서 히브리 민족은 지금까지 역사에서 가장 빛난 임금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잖아요?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제가 장례식 때 쓰는 예화 하나가 있습니다. 몇 가지 예화 중에 하나씩 써가면서 장례식을 치르는데 신학교 졸업하고 개척 교회하러 모두 떠났잖아요? 5~6년이 지났는데 친구 목사가 만나자고, 보고 싶다고 해서 만났는데 목회하면서 별 경험 다 했다고 서로 그 동안 목회 생활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자기는 별안간 교회에 문제가 생겼는데 교회 대학부 다니던 학생 한명이 서울대 다니는데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는 겁니다. 문 걸어 잠그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누가 들어오면 나는 자살해 죽을 거라는 겁니다. 

밥도 안 먹고 머리도 안 감고 심각한 고민을 계속 해서 ‘연애하다가 실연당했나? 무슨 일이 있나?’ 모두 궁금해 했습니다. 문을 잠가놓고 열어주지도 않으니까 부모님은 걱정이 되셔서 목사한테 심방 좀 해보라고 밥도 먹지 않는다고 큰일 났다고 연락을 하셔서 목사는 그 말을 듣고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나 목사인데 문 좀 열어봐요.” “목사님,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그제야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먼저 말을 하더랍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목사님 심방 오시라고 했죠?” “그래,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내가 나를 봐도 이상해요. 아버지, 어머니 고민 당연해요.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의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이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책상을 보니 어디서 구해왔는지 사람 해골바가지를 갖다 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매일 고민을 했답니다. 목사가 “대학생이 뭐하는 거야?” “말씀드릴게요. 

목사님! 나 철학 공부하다가 머리가 좀 돌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마지막에 다 이렇게 해골이 되잖아요? 영웅, 대통령, 재벌 할 거 없이 이것을 향해서 가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을 하기 위해서 인간이 세상에서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까? 결국은 내가 이렇게 될 텐데요? 그게 인간이라면 나는 살기 싫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그것이 나의 삶이다. 아니면 내가 일찍 이렇게 해골이 되어 버리겠다. 이것을 초월하는 인간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래서 철학적으로 해결하려고 칸트 철학에서부터 철학 서적을 이렇게 많이 가져다 놔도 어떤 철학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제가 오늘 새벽에 찾았습니다.” “뭔데?”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아! 이런 게 있었구나. 그러면 그렇지. 인간의 마지막이 이렇게 해골바가지로 끝난다면 인간 가치됨의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이 있을 때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인간됨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죽어 무덤에 계시다가 다시 살아 승천하셔서 영원성을 인간에게 선물하시다니!’ 이겁니다. 나는 내 인생의 진리를 이제 발견했습니다.” 학교에 자퇴원서 내버리고 신학을 공부해서 지금은 얼마나 목회 잘하는 목사님이 되셨는지 모릅니다. “내 평생 이 고귀한 인생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서 살겠습니다.”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의미가 뭔가? 바로 죽음을 초월하는 영생의 진리를 예수님이 손수 가르쳐주신 사건으로서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위해서 우리가 생명을 바치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할 때 해골바가지로 끝나는 인생을 뭐 하려 합니까?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으로 인생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왜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실 때 가만히 계셨는가? 3일 만에 살아나신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았고 그 부활 신앙 때문에 현실을 이겨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을 가지고 현실을 이기고 죽음을 초월하는 영생의 진리를 소유하는 축복받은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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