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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 부활의 증인들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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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의 증인들 (막 16:1~8)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부활주일 아침입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이 부활절이 지금 4월 초 이 계절에 위치한 것도 참 의미가 있습니다. 매년 부활절은 소망의 계절에 맞이하고 새 싹이 트이는 계절에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자연만물들이 겨우내 웅크리고 살다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계절이 이 부활의 계절입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류의 소망이고 희망이고 유일한 대안입니다.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얼마나 큰 복이고 기대이고 복음이고 은혜입니까. 삶에서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일이고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죽음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일대 혁신의 삶을 주었습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은 우리 인생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혜이고 꿈입니다. 그것이 있기에 인간이 값이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인데 또 인간이 위대하게도 그 죽음을 극복하는 믿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참 위대한 존재입니다. 

어느 노 목사님의 사모님이 먼저 소천 하셨습니다. 산에 가서 시신을 하관하고 노 목사님을 모시고 산을 내려오는데 내려오시던 목사님이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니 다시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뒤따라 가 보니까 무덤 앞에 서시더니 “조금만 기다려, 곧 올께” 그리고 다시 내려오십니다. 그 노 목사님의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럽고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며칠 후에 나도 죽어서 다시 오겠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 노 목사님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죽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는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여유와 멋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이 부활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내용과 뜻과 감동과 멋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사람들이 겁을 냅니다. 두려워서 병원에도 못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 별 생각을 다하며 두려운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조금이라도 오래 더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더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마음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운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느 사형수는 사형 받는 날 아침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간수의 말에 복숭아를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니 복숭아는 내년 여름에나 나오는데.” 그러니까 “그때까지 기다릴게요.”그럽니다. 이것이 사람의 욕구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이 오래살고 장수하는 것은 인류의 소망입니다. 오늘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장례식 때 친구들이나 가족들로부터 무슨 말을 듣고 싶으냐.” 그랬더니 한 사람은 “훌륭한 이력을 남긴 사람이었다 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또 한사람은 “아주 좋은 아빠였고 좋은 남편이었다 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앗 저 사람 움직인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활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선물이고 복음입니까. 부활은 인류의 꿈이고 소망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일은 인류에게는 소망중의 소망이고 선물중의 선물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약속은 “부활의 약속”입니다.  


애급인들의 부활소망 

옛날 애급인들은 미라를 만들어 매장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관습은 부활소망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애급의 왕들은 모두 미라로 만들어져 묘 속에 안치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피라미드입니다. 그 피라미드 고분 속에는 다 미라로 만들어진 시신들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그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소망 때문입니다. 시체를 땅속에서 썩고 부패하도록 매장하지 않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 있다가 부활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 애급의 미라는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고 “환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활개념이라기 보다는 그 속에 환생의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애급 사람들도 환생이든 다시 살아나든 부활을 희망하였습니다.   

고대 희랍인들의 부활소망 

고대 희랍 사람들은 영혼불멸설을 믿었습니다. 그 영혼불멸설의 대표적인 주창자가 플라톤이라는 철학자입니다. 플라톤은 세 가지 근거로 영혼 불멸설을 주창하였습니다. 하나는 영혼은 선천적인 지식내용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영혼은 단순이기 때문에 불멸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영혼은 그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불멸한다고 했습니다. 이 불멸설은 성경에서 말하는 불멸설이 아니고 윤회설에 기초한 불멸설입니다. 그러니까 고대희랍사람들의 부활사상도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사상은 아닙니다. 희랍 사람들도 영혼을 말하고 불멸설을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사상이 조금이나마 들어 있기는 합니다. 

히브리인들의 부활믿음 

히브리인들의 부활은 이집트의 환생설이나 희랍의 영혼불멸설과는 또 다릅니다. 히브리인들의 죽음은 조상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부모의 묘실에 함께 넣어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묘는 굴이었습니다. 그 굴속에 시신을 넣어두고 굴 아귀를 돌로 막아놓는 것으로 무덤을 대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장례를 위해서 막벨라 굴이라는 땅을 구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아내 사래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 자신도 그 묘실에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고 그 후에 아들 이삭도, 며느리 리브가도, 야곱과 라헬과 레아도 그리고 그 후에 요셉도 그 무덤에 장사됩니다. 

히브리인들은 죽으면 조상에게로 돌아간다고 믿었고 조상들이 묻혀있는 묘에 들어가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습니다(삿 8:32, 16:31, 삼하 2:32. 17:23). 따라서 죽어서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벌로 여겼고 가족에게로 부터도 버림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왕상 13:21~22). 열왕기에 나오는 왕들의 죽음을 보면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후기 히브리인들은 이 죽음관이 조금씩 발전합니다. 히브리인들 중에는 두 종류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두개인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느 날 예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아들이 자식이 없이 죽어 그 아내가 동생에게 시집갔는데 또 동생도 자식이 없이 죽었고 또 동생이 죽었고 칠형제가 모두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후에 그 아내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마22:25-28).”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기를 “부활 때에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가고 하늘의 천사와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죽으면 조상에게로 돌아간다고는 믿었습니다. 또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이 바래새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서로 반목하였고 대립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23장6절에서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부활을 전하였다고 해서 사두개인들로부터 고발당해서 법정에 섰습니다. 그 법정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공동의 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재판의 죄목이 부활문제였습니다. 그때 부활을 말하는 사도바울에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을 정죄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날만은 바울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는 바리세인들과 사도바울의 신학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공통적으로 죽으면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희미하나마 부활을 믿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러다가 부활을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 분명하게 제시하시고 보여주시고 실증해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고대 사람들이나 오늘 사람들이나 모두 부활을 하나의 개념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부활이 개념이 아니고 사실임을 실증해 보이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결한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죽음 없이 살아가던 마치 천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이 세상에 죽음과 썩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부패가 왔고 무능과 한계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는 불행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처럼 예수께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의 기존 질서를 무너트리고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질서를 새롭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과정이 출생하고 삶을 살고 죽고 부활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등식이 성립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류 최초의 가장 선한 소식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꿈이 이루어진 가장 큰 사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신앙은 최후의 과정입니다. 신앙인이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그 신앙은 이미 완성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부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으나 끝까지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숫한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여 제자들도 새벽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의 손에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향품이 들려 있습니다. 그 말은 그들에게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천사가 예수께서 부활하였다는 말을 듣고 여 제자들은 한결같이 몹시 놀라 떨며 무덤에서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지만 누구도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녀가신 후 늦게 돌아온 도마는 내 손가락으로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사건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리는 아닙니다. 제자들이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한계입니다. 

그래서 오늘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강단에서 부활을 설교는 하고 있지만 실제로 믿지를 못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 설교를 들어야 하는 성도들도 불행한 일이지만 부활의 설교를 하면서도 그 부활을 믿지 못하는 설교자는 또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오늘 신학자들 중에도 노골적으로 부활을 신화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부활의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난제입니다. 어느 신학대학에서 유명한 신학자를 초청하여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그 신학자는 2시간 동안 예수의 부활은 신화요 허구라는 것을 집중적으로 강의하였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질문 시간에 어느 노인이 일어나서 과일을 먹으면서 이 과일의 맛이 어떤지 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강사는 순간 당황하고 난처한 모습을 하더니 “그 과일을 먹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그 노인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 당신은 예수를 아직도 맛보지 못한 것 같소.” 그 한마디에 그때 강당에 모인 수많은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부활의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난제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믿음의 주체이고 핵심이고 근간이고 신학입니다. 이 부활을 믿을 때 비로소 내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부활을 믿을 때 이 부활의 진수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예수를 말하고 부활을 말하고 예수의 십자가를 말하고 죽음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찍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다만 이생뿐이면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다만 이생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 존재인가를 말씀한 것이고 또 지금까지 부활을 전하고 살았지만 막상 죽은 후에 보니까 부활이 없었다고 한다면 평생 부활만 전한 우리 전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2장의 오순절 설교에서 “우리가 다 예수의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32)”고 하였습니다. 여기 증인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마르튀스”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의 부활을 목숨을 걸고 전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부활을 전하게 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 시대 사도들은 부활을 전하다가 모두 무서운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 대가가 “마르튀스”입니다. 즉 “순교”라는 뜻입니다. 부활을 체험하면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순교하는 심정으로 나아가 부활을 전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작가 “라게르크비스트”는 “바라바“라는 소설을 씁니다. 바라바가 민란을 일으킨 죄수로 잡혀 마침내 사형수가 되었습니다(막 15:7).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그 대신 바라바가 석방되었습니다. 바라바가 멀리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합니다. “저 사나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가.” 

그 강도는 강한 의문을 갖고 순간 고뇌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대신 죽어가는 예수를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다가 그는 비로소 그가 메시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부활을 비로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나는 더 이상 편안히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당시 로마 방화사건에 스스로 연루됩니다. 그리고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처형 받아 죽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부활을 알고 체험하게 되면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부활을 더 실감나게 체험하게 되고 그 부활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과거의 종교가 아닙니다. 무덤의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오늘의 종교이고 내일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무덤에서, 죽음에서, 절망에서 극복하고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오늘 신문에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고 기사가 나거든 그 사실을 믿지 마세요. 죽은 것이 아니고 영원한 나라로 옮겨간 것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활란은 “내가 죽거든 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천국 문에 들어가는 행진곡을 불러주세요”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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