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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요 10: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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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 예수: 하나님 나라의 인격적 현존

다시 사신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이 날을 맞이하는 어린이들과도 함께 하기를 빕니다. 우리가 떠났던 사순절의 긴 여정이 이제는 끝났습니다. 부활절 아침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듯 찬란하게 밝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어둠이 있습니다. 천안호 침몰 사고로 실종된 수병들과 그 가족들, 구조작업에 나섰다가 조난당한 금양호 선원 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명이 허비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이런 참극이 되풀이 되어야 합니까? 생명의 주님께서 그들을 품에 안아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예수님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임을 절감했습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며 낙심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기 위해 주님은 생을 다 바치셨습니다. 그는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선물이 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번민과 자기 비하와 죄책이라는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이들을 건져내 반석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됨의 기쁨을 맛보았고, 삶을 함께 경축하는 일이 얼마나 흐뭇한가를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사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때를 가장 아름답게, 풍부하게 살아내셨습니다. 지상에서 산 세월은 비록 짧았지만 그는 모든 순간을 영원의 빛 속에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온전히 바쳤습니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요6:39)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보화로 여기는 이 절대 순수의 마음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10:17)

주님이 당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은 누구의 강요나 회유에 굴복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사랑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고 말씀하신 주님은 친히 그 사랑의 실천자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죽음이 허망한 끝이 아님을 아십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바칠 때 우리는 허공에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신 주님을 하나님이 받아 안으셨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한 사랑은 결코 허망하게 스러지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분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많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으로 보나, 이성적 추론으로 보나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성경 이야기도 사람들이 느낀 당혹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시지만,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이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기 전까지는 자기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분이 주님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길에서 만난 나그네와 오랜 시간을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도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골방 문을 걸어 잠근 채 슬픔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 평안의 인사를 건넸을 때도 그들은 유령을 본 것처럼 놀랐습니다. 

이것은 뭘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의 그 모습, 곧 수많은 무리와 더불어 갈릴리 해변을 걷고 음식을 함께 나누던 그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마음 눈(心眼)을 열어줄 때 비로소 그들은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렸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고 계십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 곁에 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는지요? 마태복음 25장은 주님이 우리에게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어쩌면 지금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아이티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아이의 모습으로 오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신선한 물 한 모금 얻을 데가 없어 오염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여인들의 모습으로 오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유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 전쟁과 폭력과 테러로 말미암아 표정을 잃어버린 이들의 모습으로 오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꿈을 안고 찾아온 이 땅에서 굴욕의 눈물을 흘리는 이주 노동자들, 낯선 땅으로 시집 와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결혼이주여성들의 눈물 속에 오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부활의 빛 속에서 살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막16:15b)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20:21b) “내 양 떼를 먹여라.”(요21:15, 16, 17)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몸이 되어주기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분리의 담을 허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일에 초대받았습니다. 주님이 벌써 그 일을 시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은 우리보다 앞서가시며 길 없는 곳에 길을 열고 계신 주님을 볼 것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눅10:18b-19)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이미 이겨놓은 싸움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이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다국적 기업이나 핵무기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지만, 역사를 이끌어가는 궁극적 힘은 사랑과 친밀한 우정과 돌봄과 나눔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연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발전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발전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는 세상을 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활이 참되다는 사실은 우리 삶을 통해 입증되어야 합니다. 봄볕이 대지에 묻혀 있던 씨앗의 발아를 돕듯이, 사람들의 가슴에 심겨진 하나님의 성품의 씨앗을 틔우는 일은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이야기의 마지막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새로운 생명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부활절 아침, 음습한 죽임의 기운이 넘치는 곳에 생명의 빛과 온기를 가져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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