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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빈 무덤을 떠나라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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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을 떠나라  (마 28:1~10)


부활의 아침, 부활하신 주님의 平康이, 성도님들과 가정과 삶의 자리에 충만하시기를 祈願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동안 특히 고난주간에, 우리는 우리교회의 새로운 希望을 기대하며 [정릉교회 70년, 그 거룩한 비전(世俗과 區別되는 비전)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한 주간 기도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요즘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많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이렇게 우리가 무능한가? 장비도 부족한가?). 그런가 하면 우리는, 한 줄기 희망의 빛도 발견했습니다. 어제 치른 海軍葬 ‘故 한주호 준위의 죽음’과 그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認識의 變化 때문입니다.

故人을 잃은 유족은 물론, 우리 海軍, 이번 사건을 통하여 그를 알게 된 온 국민들은, 우리나라 해군특수전여단(UDT)의 전설로 불리는 그의 죽음을 보면서 큰 喪失感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이 가져다 의미 앞에서,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戰慄마저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우리사회의 한 줄기 希望’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詩人(문정희)의 特別寄稿 글에서 이런 대목을 읽을 수 있습니다. 

후배들을 구하기 위해 검게 출렁이는 바다,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춥고 빠른 물살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가 순직한 老兵의 죽음이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어쩜 자신의 運命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육군 장교로 있는) 아들에게 말했고, 어제 入水를 중단하라는 아들의 걱정을 들었다. 그는 왜, 무엇 때문에 그 차갑고 거친 바다에 운명을 걸었을까? (다음 대목에 주목하십시오) 그의 최후가 천안함의 비극과 겹쳐진 것을 단순히 ‘추가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바다에 몸을 던져 웅변한 生涯의 숭엄하고 아름다운 가치가 하루 종일, 내 귀를 때리는 듯했다.

이 글에서 시인은, 故 한주호 준위의 죽음을 가리켜 천안함 사건에 이은 ‘추가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사회의 希望이 있습니다. 2002년 6월 29일 연평해전 때, 북한 경비정 기습공격으로 숨진 장병 6명의 죽음과 그 가족들이 홀대 당하던 것을 생각하면 隔世之感마져 느낍니다. 당시 대통령은 고사하고,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조차도 장례식 때 얼굴조차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연평해전의 한 전사자 부인은 2005년도에, “이런 나라에서 어떤 병사가 목숨을 던지겠느냐”며 移民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와 국민은 지금, 한 老兵의 숭고한 죽음 앞에서 큰 공부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죽음의 의미와 이유를 가늠할 줄 모르는 사회, 그런 국가는 희망이 없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서 아버지로부터 버림 당하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시던 예수님의 외침, 十字架 上에서 절규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셔야 했던 하나님의 아버지의 고통,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버림당하시는 고통 가운데서도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고, 온 인류와 온 우주를 향하여 선언하셨던 주님의 그 외침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유대종교 최고의회 의원이었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善하고 성품이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공회의 계획과 행동에 찬동하지 않던 사람입니다. 유대인 동네 ‘아리마대’가 故鄕인 그는,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屍身을 거두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요셉은 十字架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내려서, 細麻布 壽衣에 싸서, 아직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 전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늘 따라 다닌 여자들이 뒤따라가서, 예수님의 屍身을 모셔 둔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돌아가서 장례용 香料와 香油를 준비했습니다. 그 女人들은, 계명대로 안식일에는 조용하게 쉬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새로운 한 주의 먼동이 틀 무렵, 막달라 마리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발밑에서 땅이 흔들리고 진동하더니,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女人들이 서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천사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에게서 번개 같은 빛이 번쩍였고, 그의 옷은 눈처럼 하얗게 빛이 났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어찌나 무서웠든지 꿈쩍도 하지 못했습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다. 너희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와서 그분을 모셔 두었던 곳을 보아라. 자, 어서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여라.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분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다. 너희는 거기서 그분을 뵐 것이다 하고 말하여라. 이것이 내가 전하는 소식이다 

합니다. 천사가 일러준 말 “자, 어서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여라.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성경은, “그 여자들이 크게 놀라고(무서움)과 큰 기쁨에 겨워,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무덤을 떠났다(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다” 합니다(그러나 복음서 증언을 종합하면 마태는, 압축보도 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빈 무덤을 떠나 달려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어 세우고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냐?” 여인들이 뜻밖에 예수님을 만나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敬拜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붙잡고 있구나!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여라. 거기서 내가 그들을 만나겠다고 전하여라” 하셨습니다.

안식일 지난 다음 날 새벽녘에, 무덤에 찾아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 거기서 뜻밖에 천사들을 본 여인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 무덤에는 오지 않았지만 秘密한 장소에서 숨어 있던 제자들, 어찌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의 複雜한 당시 狀況을 일일이 묘사하기란 시간이 부족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絶望했습니다. 希望을 상실한 채, 그저 뒷수습이나 하려했습니다. 고작 준비한 것이, 예수님 시신에 바르기 위한 장례용 香品와 香油였습니다. 

무덤으로 가면서도, 누가 무덤을 막아 놓았던 큰 돌을 굴려줄까, 걱정했습니다. 무덤에 가서 빈 무덤을 발견하자,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간 줄 알고,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나타나자,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主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시신을 가져가리이다” 합니다. 

使徒들은 어찌했습니까? 여인들(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또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이 계속해서 사도들에게 ‘빈 무덤’ 목격담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전하였지만 “여인들의 말이 虛誕한 듯이 들려, 한 마디도 믿지 않았습니다”(눅 24, 11). 

그러나 베드로는, 벌떡 일어나 무덤에 달려갑니다. 가서 몸을 구푸려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여인들의 말대로 壽衣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발걸음을 돌이키고 맙니다. 열두 제자 중 디두모(쌍둥이)라 불리는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다 [우리가 主를 보았노라] 하였지만 그 역시, 믿지 않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합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절망은 깊고 깊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예수님을 장사하였던 그 무덤, ‘빈 무덤’을 떠나라고 命한 意味가 어디에 있을까요? 여인들은, 천사가 빈 무덤의 이유를 말하여 주자, 한편으로는 크게 기쁘기도 했지만 당황스러워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는 그런 형국입니다. 여인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인들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빈 무덤󰡕은, 屍身을 도난당한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빈 무덤의 눈목격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한낱 이상한 事實에 불과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한 疑惑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무얼 말합니까? 예수님의 十字架 죽음과 장사되심은, 그들에게 철저한 絶望 그 자체였습니다. 부활의 희망은 眼中에도 없었습니다. 굳이 그 뿌리를 들추자면,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 때문입니다.

빈 무덤에서 떠나라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絶望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不信仰의 자리’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빈 무덤’에서 떠나라 하심은, ‘빈 무덤’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지요(빈 무덤은, 대단히 중요한 예수님 부활의 역사적 증거입니다). ‘빈 무덤’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 무지와 不信仰, 어리석음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비어 있는 무덤은, 절망이 아닌 希望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신 여러분, 우리가 꼭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十字架는 그냥 十字架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되셨던 무덤은, 마치 그 옛날, 數千 年 전 ‘미이라’로 만들어 장례한 애굽 왕들의 무덤인, 피라미드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復活하신 예수님로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復活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빈 무덤’을 보아야 합니다. 

그 옛날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빈 무덤이 그들의 절망이었다면, 그러면 오늘 우리들, 나를 절망시키는 내 인생의 ‘빈 무덤’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에서 발견되는 빈 무덤도 역시, 나에게 절망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의 ‘빈 무덤’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希望이라는 것을 깨달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명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나를 絶望케 하는 내 인생의 ‘빈 무덤’ 거기로부터 과감하게 떠나라 하십니다. 빈 무덤을 떠나서 달음박질 하는 그 속에서, 우리의 絶望을 希望으로 바꾸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실 수 있으신지요? 

S. Kierkegaard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病이 絶望이라고 했습니다. 十字架는 絶望이 아닙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십자가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묻히셨던 무덤은, 絶望이 아닙니다. 왜 입니까? 그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이, 십자가의 의미였고, 장사되셨던 무덤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십자가를 보고 절망했을까요? 왜 ‘빈 무덤’을 보고도 절망했을까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잖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장사되심을 두 눈으로 목격한 ‘經驗的인 그 現實’과 矛盾되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주목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弟子라 할지라도) 자신이 經驗하는 삶의 고통문제, 인생실패의 문제, 그것 때문에 찾아오는 挫折, 絶望이라는 현실과는 철저하게 相反(矛盾)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쉽게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막상 현실로 닥치면, 하나님 말씀 안 믿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十字架 없는 형통, 죽어 장사되지 않고 죽지 않는 그것만 바랍니다. 그저 아무런 問題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만을 企待합니다. 그저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직장에서 승진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사업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富하게 살기만을 바랍니다. 세속적인 성공도 좋으니, 그저 성공하기만을 바랍니다. 내 慾心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채우기만 바랍니다. 만일, 그런 것들이 무너져버리면, 그냥 絶望합니다. 落望합니다. 人生도 抛棄합니다. 사랑하던 사람도 미워합니다. 원수도 맺습니다. 부모도 버립니다. 자식도 버립니다. 그저 주저앉아버리고 맙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 그런 인생은, 겉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반쪽 인생에 불과합니다.

十字架를 十字架로만 보는 사람에게는 復活의 希望이 없습니다. 빈 무덤을 그저 빈 무덤으로만 보는 사람에게는 復活의 希望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십자가를 보는 사람에게만 希望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빈 무덤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希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신 여러분! 예수님의 十字架에서, 예수님의 復活을 보시는지요? 빈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는지요? 이 신앙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希望을 얻습니다. 희망의 철학자요 희망의 신학자인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다음 질문)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가? 

이 물음 앞에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으십시다. 내 인생에 절망을 가져다 준 ‘빈 무덤’에서 지금, 곧 떠나십시다. 부활의 所望, 希望이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 되고, 삶의 이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부활의 아침, 빈 무덤 앞에서 절망하던 여인들처럼, 그 소식을 듣고도 허탄한 말로 여기던 제자들처럼, 그런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여, 우리를 절망케 하는 내 인생의 온갖 빈 무덤들로부터, 떠나게 하옵소서. 약속하신 말씀 의지하여,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부활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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