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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사상 최대의 빅뉴스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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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대의 빅뉴스 (마 28:1~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지난 한 주간 우리 국민은 ‘천안함’ 침몰 사건 소식으로 가슴을 졸이며 하루하루 안타까운 날들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바다 속의 침몰한 배에 갇혀 있는 소중한 자식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조차 모른 채, 더디기만 한 구조 활동을 일일여삼추처럼 지켜보는 부모들의 애간장은 이미 다 녹아버렸을 것 같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이긴 하지만, 제발 장병들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가족들에게는 물론 온 국민들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 되겠습니까?    

지구촌에 사는 우리들은 날마다 크고 작은 뉴스를 접하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큰 뉴스일수록 가슴이 철렁한 참사들이 대부분입니다. 지난 1월 12일 아이티에서 발생한 대지진도 사망자가 30만 명에 이른 대참사였습니다. 인류는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9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제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2500만 명의 전사자와 4000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내는 참사를 겪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테마로 한 영화들이 아주 많은데 그 가운데 2차 세계 대전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주제로 한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하루 동안에 항공기 1만 3천 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하여 연합군의 승리를 가져오게 한 상륙 작전을  묘사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큰 사건일수록 빅뉴스일수록 인류에게 엄청난 불행을 가져온 참사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가장 기쁘고 즐거운 빅뉴스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천사는 목자들에게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인류 역사를 B. C와 A. D로 구분하는 분수령이 될 만큼 경천지동할 대사건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곧 본질적인 면에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굿 뉴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장사 되었다가 사흘만인 오늘 새벽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은 사상 최대의 빅뉴스이고 인류 최대의 빅뉴스임이 틀림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 최대의 절망이 무엇일까요? 가난입니까? 질병입니까? 인간 최대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김정일입니까? 핵무기입니까? 인간 최대의 슬픔은 무엇입니까? 사업의 실패입니까? 실연입니까? 저는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동생과 두 조카를 잃은 적이 있고, 그래서 죽음의 의미,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최대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혼도 아니고, 대학 입시의 합격도 아니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일 것입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의 한 조각만이라도 가져다 줄 것입니까? 죽었던 남편을, 죽었던 아들을, 돌아가셨던 부모님을 단 한 달만이라도, 아니 하루만이라도 모실 수가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가슴 벅찬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오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최대의 원수인 죄와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마치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트려 버리듯이 부수어 버리시고, 우리에게 부활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이 어찌 가슴 설레는 복된 소식이 아닙니까? 이 기쁘고 즐거운 부활 주일 아침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마태의 증언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절에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이란 곧 주일인 오늘을 말합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오늘 새벽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우리가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특별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우리가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립 헨리는 말하기를 주의 날을 ‘날들의 여왕이며 날들의 진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주일 아침에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주님이 부활했어요. 정말 주님이 부활했어요!”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그날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라고 하는 두 여인이었습니다. 그중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고침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 만나 뵙는 영광을 누리게 했던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할 무렵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3절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변화 산에서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 계시록에 묘사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 초자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천사들은 종종 우리 주님의 탄생 때나, 시험받으실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타나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큰 지진과 함께 나타난 천사들은 예수님이 누우셨던 무덤의 돌을 굴려 버렸습니다. 그 무덤은 인봉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은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인봉된 무덤으로, 어느 누구든지 허락 없이 절대로 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시는데 어느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4절에 “지키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말들이 천둥번개나 대포 소리에 놀라듯이, 숲 속의 짐승들이 큰 홍수나 화재를 만나 꼼짝 못하는 것처럼, 싸움터에서는 용감했던 그들, 평소 백성대포 대할 때는 교만하고 방자했던 군인들이, 너무 무섭고 놀라워서 죽은 사람들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에게요터에서할 수 없요터용감과 즐거움이 되지만, 원수들에게요터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두려워 떠는 여인들에게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고 했습니다. 여성대은 천성적으로 약하고 두려움이 많습니다. 더구나 동트기 직전 무덤가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광경 앞에 얼마나 놀랍고 무서웠겠습니까? 심장이 딱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의 탄생 때도 부활 때도 똑같이 놀라지 말라는 천사의 음성이었습니다. 어째서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까? 어째서 눈물을 그치고 대신 즐거워해야 했습니까?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는데, 그와 같은 자신의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가 여인들에게 와서 보라고 한 곳은 열려진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HE IS NOT HERE FOR HE IS RISEN)” 성지 순례 때 예수님 무덤에 가보았더니 바로 이 성경 한 구절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상-네이버 이미지 5번-예수님의 빈무덤) 

예수님의 빈 무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실입니까? 불교의 석가모니는 죽어서 인도의 산수 해안에 묻혀 있고, 유교의 공자는 죽어서 그의 시체가 중국의 창평향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들이 메카에 가면 회교 신도들은 자랑삼아서 “마호멧은 우리의 선지자인데, 이곳은 그가 묻혀 있는 무덤이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루비와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화려한 무덤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회교도들처럼 무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을 큰 소리로 자랑할 수가 있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여인들에게 천사는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놀라운 소식, 부활의 소식은 알려져야 했습니다. 천사들은 마치 “너희들은 이 기쁘고 엄청난 소식을 들었으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라. 이제 그것은 너희들의 책임이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하게 되었습니다. 지진과 눈부신 천사를 보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불가사의한 소식을 듣고, 두려움과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으로,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빨리 달음질하여 하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왼 일입니까?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된 것입니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의 주님을 만나 뵙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평안하냐?’고 하시면서 인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의 백성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쁨에 넘친 여인들은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였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기쁨과 환희, 사랑과 존경이 넘치는 경배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의 경배를 금하시지 않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 형제들’이란 물론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제자들이었습니까? 높은 자리다툼을 벌였던 자들이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모두 도망을 쳤던 비겁한 자들이요,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면서 주님을 부인했던 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제자들에게 ‘내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맏아들로 선포되셨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그의 형제로 선포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 살아나시므로, 많은 형제들의 맏형이 되셨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임으로, 그의 형제라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에 가서 먼저 잘 익은 열매를 따게 됩니다. 그 후에 그 남은 것이 다 익으면 남김없이 모든 과실을 따게 됩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먼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는 모두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기쁨과 환희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 동안 죽은 듯 무서워 떨고만 있던 파수꾼들도, 그들이 목격한 그 놀라운 광경을 대제사장들에게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분명 온 인류에게 가장 큰 소식이고, 복된 소식이었지만, 예수님을 잡아 죽인 무리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곤혹스런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대적들에게 어쩌면 마지막으로 주어진 회개의 기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어떻게 악용했습니까? 그들은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우리가 잘 때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 해 갔다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거짓말입니까? 군병들이 잠들어 있었다면,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 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군병들이 잠을 잤고,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훔쳐 갔다면, 그들은 총독에게 파수꾼들을 엄히 처벌해 주기를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악한 무리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지 악에 악을 더 저질렀습니다. 많은 돈으로 군병들을 매수하여, “너희들이 잠자는 사이에 훔쳐 갔다고 해라. 총독이 근무 태만에 대해서 책임 추궁을 하게 되면 우리가 잘 말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이 돈을 많이 받고 헛소문을 퍼트려서, 마태가 이 성경을 기록할 그때까지, 그 소문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살이 억 만 마리가 모여도 태양을 가릴 수 없듯이,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백성들을 속이려고 획책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간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이 군병들이 공모했다는 사실과, 돈을 많이 주고 거짓말하게 했다는 저들의 죄악만 드러나게 되어, 오늘날까지 추악한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빈 무덤의 사실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최초로 만난 두 여인의 증언을 통해서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1.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에,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또한 너무나 기쁜 일이었기에, 사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약속을 회상시켜 주고, 그들에게 빈 무덤을 보게 하시면서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도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오클라호마의 유명한 흑인 목사 페리(E. W. Perry)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상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좋은 예화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마리의 큰 뱀이 바다 속을 헤엄치면서 많은  고기들을 집어 삼켰습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큰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이 물고기가 뱀의 뱃속을 들어가 보니 너무 캄캄한지라, 여기서 나가리라 하고는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사용해서, 그 뱀의 배를 찢고 빠져나와 버렸습니다. 그 뱀을 죽이고 나오니까 다른 작은 고기들도 모두 뒤를 따라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이 뱀은 죽음이라는 괴물을 가리킵니다. 이 괴물이 오랫동안 인류를 집어 삼켰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까지 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그를 따라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2.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여인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그 소식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그 기쁘고 엄청난 소식을 빨리 전하려고 달음질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구세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뜨겁고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서 전하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첫 번째 명령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 사실을 전파했습니다. 여인들도 전파했고,  전하도 전파했고, 바울도 전파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은 축복니다. 부활와 동시에 그것은 의무를 동반합니다. 그 의무란 부활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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