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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 (막 15: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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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 (막 15:22~39)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이 날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전 520년경에, 선지자 스가랴는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예수님께서 말(馬)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전쟁하러 나갈 때는 말을 타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나귀를 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그가 평화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음을 말해 줍니다. 그 날 예루살렘은 유월절 명절을 보내려고 각처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행렬의 앞에 서거나 뒤 따르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환호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께서 유대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날, 백성들이 그토록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한 것은 실은 이 같은 절실한 열망을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오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오셨지만 이 세상 나라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유대 나라의 회복을 바라는 백성들의 열망에 불을 붙이셨다면 정치 혁명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차근차근 십자가의 죽음을 대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지도층에 의해 붙잡혀 정죄 받고 초라한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자 백성들은 자기들의 기대가 무산된 것을 알고는 돌변하여 “저를 십자가에 못 받으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받으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정죄 받으신 예수님

그러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한 사람은 로마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빌라도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정작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사회의 지도계층이었습니다. 유대는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으므로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대단하였는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눈엣가시와도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종교적인 위선과 부당함을 무섭게 비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상인들에게 성전 뜰에서 제물로 바칠 소와 양, 비둘기를 팔거나 돈을 환전해 주는 것을 허락해 주고 그 대가로 많은 돈을 상납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 뜰에서 우양과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어주는 상인들을 보시고 진노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면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 뜰에 있는 가축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백성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보고서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선동해서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가 군대를 보내어 유다를 멸망시킬 것이요 그들이 지금껏 누려왔던 특권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민족의 안위를 위하여 예수님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이번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

그러나 이 같은 이유들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작정하신 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백성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와 군병들은 이 사건을 위하여 배역을 맡은 인물들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무서운 죄를 범했으므로 그 죄에 상응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자들의 악한 의도를 통해서도 자기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비롯하여 열 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경악하는 제자들에게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것이지만, 메시야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며,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그 때라도 가룟 유다가 회개했더라면 메시야를 팔아넘기는 무서운 죄를 범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대제사장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체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제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이유는 그를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 제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지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소나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삼아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짐승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로 드린 제사로는 죄를 영구히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매번 속죄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 시대의 제사는 메시야께서 오셔서 드리실 영원한 속죄 제사에 대한 그림자요, 희생된 짐승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메시야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신실한 성도들은 속죄 제사를 드리면서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영원한 속죄를 위해서 희생 제물이 되실 메시야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에 보면, 구약의 속죄 제사와 예수님께서 드려주신 속죄 제사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이유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을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어서 저마다 구원의 길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인간이 수행을 통해 도를 깨우쳐서 부처가 되어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종교는 그들이 섬기는 신을 향하여 무슨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종교마다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르기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 했습니다. 생명의 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을 대속하시려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예수님의 고난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비천한 자들에게 뺨을 맞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욕을 들으셨습니다. 로마 군병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당하셨는가 하면, 가시관에 이마를 찢기고 얼굴을 피로 적셨습니다. 벌거벗김을 당하시고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히브리 글자와 헬라 글자와 로마 글자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패를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그리로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기를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였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희롱하며 서로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도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죄인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그의 뺨을 치고 침을 뱉고 욕하고 비웃다니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더구나 사형을 선고하고 강도들을 처형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다니, 세상에 이 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이 모든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같은 주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아침 아홉 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오후 세 시까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손에 작은 가시가 하나 박혀도 참지 못하는데, 십자가에 대고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혀서 공중에 높이 세워졌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똑 같이 연약성을 지닌 사람이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만 가지신 분이셨다면 십자가 처형이 아무런 고통도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며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뿐 아니라,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셔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비단 육체적인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정작 예수님의 고통은 온 세상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홀로 받게 된 데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온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신 결과 말 그대로 죄 덩어리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무서운 진노를 받으셨습니다. 독생자의 고난에 해도 그 빛을 잃었습니다. 정오가 되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구 시 곧 오후 세 시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의 이 절규는 육신의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된 영혼의 고통으로 인한 절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것을 망각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그 누가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려주었습니까? 주님께서 생명을 희생하신 결과, 우리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복스러운 결과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을 때 성전에서 가장 거룩하고 은밀한 장소인 지성소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 놓았던 크고 견고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두 조각이 되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그곳은 지극히 거룩하므로 그 누구라도 함부로 지성소에 들어갔다가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오직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 대 속죄일에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가지고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지성소를 가려 놓았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갈라져서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으니 이는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손수 찢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를 열납하시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고 하였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두 조각이 된 성전의 휘장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몸을 깨뜨리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몸을 깨뜨리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일반 백성은 평생 단 한 번도 지성소는 물론 성소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지성소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번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히브리서 4장 16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안에서 주어진 이 특권을 가지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누가 대통령과 언제라도 만나서 상의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에게 청탁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언제라도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날마다 이 특권을 활용하여 응답받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태종 임금은 대궐 문루에 큰 북을 달아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원통한 일을 하소연할 때 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신문고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 받은 백성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것은 절대 군왕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지만,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해서 도움을 받는 국민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개인의 생사화복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나아가서 아뢸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자상하신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혔던 불화의 장벽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2장 2절에 이르기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불화한 원수였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롬 5:10).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사랑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서도 감사하며 즐거워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사람들 사이에 가로 막혔던 불화의 장벽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본디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하고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불화하는 이 세상에서 화목케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 외에 어디서나 화평을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불신 이웃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고전 5:18).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직분을 자각하고 아직도 하나님과 불화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시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음을 의미합니다. 성전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친히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대속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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