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I) (요 21:15~19)

  • 잡초 잡초
  • 296
  • 0

첨부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I) (요 21:15~19)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 이것은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에서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후에 집을 나가 버린 아내를 겨우 찾은 올리버가 그녀에게 사과를 하려고 할 때에 제니퍼가 그에게 했던 유명한 대사입니다.
  
적지않은 연인들이 이 말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사과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함으로써 그들의 관계를 악화시켜 버린 부작용도 많이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니퍼가 그런 말을 한 원래의 의미는 '나는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미 모든 것을 다 용서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비록 한바탕 큰 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둘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상대방의 잘못 역시 자동적으로 용서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바로 그와 같은 '진실한 사랑에 따른 자동적인 용서'를 베풀어 주고 계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14절에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횟수로 치자면 더 되지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횟수로 따지자면 이번이 세 번째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이미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데 왜 또다시 지금 몇 명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던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호숫가에 찾아오신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베드로하고만 나누실 말씀이 있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5절 상반절은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상대로 1대1의 개인 면담을 시작하는 배경을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라고 묘사했습니다.
참으로 긴한 말을 나누기에 딱 좋은 분위기가 잡혀 가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고 피곤과 추위에 지쳐 있던 차에 따뜻한 모닥불 곁에서 따끈한 아침을 먹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었겠습니까?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냥 "시몬아"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우리나라말 식으로 하자면 성과 이름을 다 붙여서 정식으로 부르고 계시는 것은, 지금부터 하고자 하시는 이야기가 매우 의미심장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때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똑같이 세 번 대답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하다'라는 헬라어 동사의 해석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본문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질문에서는 '아가파오'라는 단어로 되어 있고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서는 '필레오'라는 단어로써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라는 단어로써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가파오' 즉 '아가페'의 동사형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것이고, '필레오'는 '친구 지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성경 해석자들은 이 차이점을 강조하여,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차원 높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어 보셨는데 베드로는 감히 그런 수준의 사랑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스스로 겸손히 고백하는 의미에서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처럼 엄밀하게 단어의 용법을 구분하여 해석하는 것은 적어도 이 본문의 문맥에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두 단어가 분명히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 대화체에서는 큰 차이 없이 서로 뒤바뀌어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이 요한복음에서는 그런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즉 이것은 우리나라말의 일상 대화에서도 '자기 날 좋아해?'라는 말이 '자기 날 사랑해?'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실제 대화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인 아람어로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아람어에는 헬라어처럼 '사랑하다'라는 뜻의 동사가 민감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이처럼 '사랑하다'라는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두 종류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흔히 그랬듯이 문체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누고 있는 대화의 핵심은 '네가 나를 많이 혹은 적게 사랑하느냐?'라든지 '나를 수준 높게 혹은 낮게 사랑하느냐?'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냐?'라는 이 한 가지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며 베드로 역시 그 질문에 대하여 '예, 주님.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진심으로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베드로가 대답하면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한 그대로 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는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문답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던 것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세 번의 문답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말로 표현되지 아니한 실로 깊고 뜨거운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어 주실 때에 그 '행간에 감추어져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 두 가지로 나누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저지른 과거의 죄를 이미 다 용서해 주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 기록된 대화의 분위기와 내면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바로 얼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앉아 있지만 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저 유명한 '베드로의 부인 사건',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베드로는 "다른 사람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끝까지 죽는 데까지라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큰소리를 탕탕 쳤었습니다.
그런데 한갓 문지기에 불과했던 여종 하나가 그를 가리켜 "당신도 저 예수 제자지?"라고 추궁하는 말 한 마디에 그만 바짝 얼어붙어서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오."라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나중에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합세해서 그를 추궁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로 생사람을 잡는 거야? 모른다면 모르는 줄 알아야지."라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이 바로 엊그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베드로의 입장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앞의 두 번은 다른 여러 제자들과 같이 만났으니 조금 나았을지 모르지만, 이제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일부러 자기를 혼자 불러 앉혀 놓고 얼굴을 맞대고 계시니 그 베드로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이지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 그 창피함, 그 후회막심, 그 자기혐오감 - 이런 온갖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베드로의 얼굴은 후끈후끈 시뻘겋게 달아오르면서 어디 시선조차 둘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런 입장과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부끄럽고 당황스러워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고 그저 첫마디부터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만 물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 번을 물어 주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처럼 세 번 물으시는 동안 자신이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상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금 자기를 일부러 혼자 불러 앉혀 놓으시고 어떤 꾸중을 내리실지, 어떤 호통을 치실지 정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가슴 졸이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그냥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와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야단맞게 될 생각에 벌벌 떨고 있던 판인데 전혀 뜻밖에도 예수님께서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만 해 주시니 그 순간 베드로는 속으로 얼마나 큰 안도의 숨을 내쉬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님,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줄은 주님께서도 아시지요." - 베드로는 그 입장 난처하기 짝이 없는 순간에 자기가 그래도 아직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 유일한 한 가지 사실로 질문해 주신 것이 정말 반가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그처럼 속으로 얼마나 좋아하면서 그 대답을 하고 있는지를 아시면서 또 물어 주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다 아시면서 일부러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물론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가 예수님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이것 한 가지 만큼은 예수님도 잘 아시는 사실이지요." - 베드로는 정말 하고 싶었던 말, 정말 자신의 가장 진실한 심정을 다 담아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너무나 잘 아시는 까닭에 일부러 또 한 번 더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바로 베드로를 위해서 일부러 똑같이 세 번째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신데,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졸장부처럼 비록 세 번이나 주님 모른다고 부인하는 못난 꼴을 보였지만 그게 제 진심은 절대로 아닌 줄을 주님은 아시지요. 제가 속으로 진짜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이것만큼은 예수님께서도 다 알아주고 계시지요."라고,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한 번 한 번 물어 주실 때마다, 베드로는 속으로 뜨거운 회개의 눈물과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눈물을 함께 흘리면서 "주님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을 예수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기가 막히도록 대단하신 분 아니십니까?
"너 왜 나를 부인했니?"라는 질책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너 어쩌다 그렇게 날 배반까지 하게 되었니?"라는 부드러운 꾸중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이번에는 없던 일로 하고 그냥 깨끗하게 넘어가 주는데, 그 대신에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 - 뭐 이런 다짐조차 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당연히 하게 될 그런 말들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시고, 그냥 "너 날 사랑하지? 비록 네가 날 세 번 부인하기는 했지만 사실 진심으로는 너 날 사랑하고 있지?"라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그 얼굴을 들 수 없는 입장에서도 그래도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질문으로 그에게 세 번을 물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죄를 용서해 주신 방법이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그 치명적인, 그 중한, 그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죄로 인하여 스스로는 회복할 길이 없는 수치와 혐오감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를 갈릴리 호숫가 한 모퉁이에 불러 앉혀 놓으시고, 그의 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질문도 언급도 아니 내색조차 하지 않으시고, 그냥 "너 날 사랑하지? 나도 알고 있어. 그러면 됐다."라고, 실로 신기하고 놀랍기 짝이 없는 '사랑의 용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고 계십니다.
아직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 오히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조차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향하여서는 단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만 물어 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낙심하고 넘어져 있을 때, 우리가 부인하고 배반하고 온갖 못난 짓 다하고 쓰러져서 다시 주님을 뵐 면목조차 없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 편에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그저 "너 날 사랑하고 있지?"라고만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주가 죄인 살피면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질문을 하시면 정말 우리는 한마디도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너 날 의심하고 배반한 적이 있었지?" - 이렇게 지적하신 우리는 모두 다 얼굴이 새빨개질 수밖에 없습니다. 
"너 지난 한 주간 동안 얼마나 기도하고 전도하며 살았느냐?" - 이렇게 따져 오시면 우리 모두는 다 한 마디 대답할 말도 찾을 길 없이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도리 밖에 없습니다.
"너 교회의 집사고 장로라 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주의 사자들을 돕고 얼마나 힘껏 헌금했느냐?" - 이렇게 꾸중해 오시면 그 앞에서 우리는 안면 체면 다 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목사라 하면서 내 양떼를 얼마나 정성껏 돌보았으며 내 몸 된 교회를 얼마나 충성되이 섬겼느냐?" - 예수님께서 만약 이렇게 저를 추궁하시면 저 역시 쥐구멍을 찾을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말 고맙게도 그런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시고, 문자 그대로 지나간 우리 죄는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분처럼, 그저 우리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만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하여 "예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 주님.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지난날 주님 앞에서 보인 꼴이란 것은 정말 부끄럽고 창피한 것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 한 가지, 지금 제가 예수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지 이것만큼은 예수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요."라고 거짓 없는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과거의 모든 크고 작은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이미 주님께로부터 용서받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라고, 십자가에서 내 죄 위해 대신 죽으신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앞에서 내 죄를 부끄러워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용서받았고 이미 우리 예수님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 그 어떤 죄를 저질렀다 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남들에게 알려지면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죄를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종이에 쓰고 불에 태우고 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나 같은 죄인을, 그처럼 부끄럽고 창피한 죄로 가득 찬 나를 사랑해 주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날 위하여 당신의 육신을 대신 십자가에서 찢겨 주신 그 구세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그 죄는 벌써 용서받았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예수님 사랑하는 고백만 진실하다면, 여러분의 그 죄는 이미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일사부재리인 것입니다.

"목사님, 너무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저만 아는 저의 이 끔찍한, 이 악한 죄가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그렇게 순식간에 다 씻겨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혹 계십니까?
"뭐 최소한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촛불이라도 몇 개 켜두고 주기도문을 몇십 번 낭독하고 아니면 무슨 면죄부 같은 것을 사든지 하면 모르겠는데, 그렇게 쉽게 용서받는다니 뭔가 좀 빠진 것 같습니다. 내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이처럼 부끄럽기 그지없는 중한 죄가, 평생토록 내 양심 속에서부터 도저히 잊힐 길이 없어 보이는 이 무거운 죄가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소멸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라는 의문이 드는 분이 혹 계십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능력을 그렇게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 어떠한 죄도,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그 어떤 중하고 부끄러운 죄라 할지라도 일단 한번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조금이라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교권주의도, 아니 우리 자신의 양심까지도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우리를 다시는 송사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주님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완전무죄'라고, 하나님 앞에서는 벌써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치환 씨의 유명한 '행복'이라는 제목의 시에 보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물론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사랑 받지는 못하고 사랑하기만 하는 것'은 애타는 일이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오가는 사랑'이 되어야 진정 행복한 사랑이며 그것이야말로 실제로 유치환 씨도 그 시를 통하여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독신자들은 바로 그처럼 '서로 오가는 사랑'을 주님과 함께 나누고 있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편에서 이미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며 그런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 주실 때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을 예수님께서도 아십니다.'라고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은 그야말로 '행복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행복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모든 과거의 죄들을 완전히 용서받음으로써 더욱 충만하고 뜨겁게 증폭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는 말씀처럼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은 우리의 그 어떤 죄도 다 덮어 버리고 완전히 도말해 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홀로 십자가 대속을 완성하고 승리의 부활까지 하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우리의 죄를 꾸짖으시는 대신에 물어 주시는 이 고마운 사랑의 확인을 통하여 아무도 정죄하지 못할 확실한 사죄의 은총을 입고 그 주님과의 행복한 교제를 영원토록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