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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2)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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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2) (눅 22:39~46)


I. 십자가

한 성도가 자신의 십자가는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십사가를 지고 천성가는 언덕을 오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또 자신의 십자가는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했더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를 보여주며 바꿔지고 가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중 제일 작은 십자가, 빛나는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십자가를 짊어져 보았습니다. 어찌나 무거운지 꿈쩍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 속을 들여다 보니 아픔의 강철, 고뇌의 금강석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이번엔 장미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그러나 장미 가시들이 어깨 팔 다리를 찔러서 도무지 짊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 속을 들여다 보니 화려함 뒤에 눈물과 갈등이 가득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결국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언덕을 오르게 되었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잘사는 사람에게도, 화려한 사람 뒤에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십자가를 어떻게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고난주일입니다. 고난 절기!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때입니다. 편안히 잠자는 때가 아니라 깨어 기도하는 때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직면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학하거나 그 누구에게도 불평하거나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면을 쓴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도피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게셋마네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문제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어렴풋이 다가올 시련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중요한 어떤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사건이 자기 자신들의 고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그것을 알고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슬픔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오히려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요나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니느웨를 위한 소명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 그 밑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망각으로의 도피! “에라 잠이나 자자.” 도피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나를 향한 구약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슬픔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찌하여 너희들이 자고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정황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금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라! 


II. 지금은 기도할 때

비전채플 건축을 시작하고 어려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계약된 건설회사와의 타절, 철근 값의 폭등, 세계적인 금융위기, 공동체 내의 크고 작은 상처들... 그러나 건축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꿈에 그리던 비전채플에 곧 입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 하나만 잘되면 그만인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를 살리고 민족을 섬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건축이란 더 잘 섬길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큰 돈을 가지고 우리시대의 사람들을 멋있게 섬겨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예배당 건축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할 여지도 있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그렇게 하는 교회들도 있는 줄로 압니다. 여기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들 다른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사역 가운데는 사회적 섬김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공동체의 양질의 신앙생활을 위한 놀라운 기능이 있습니다. 
영광스런 예배를 위하여, 
다음 세대에 자라는 우리 자녀들을 아름답게 교육할 수 있기 위하여, 
민족의 지도자를 키우는 터전 꿈터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아가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귀한 성도들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주님과 성령과 함께 교제하고 아름다운 코이노니아를 위해서 이 공간들이 필요한 것이지요. 

교회의 많은 기능 가운데 ‘복음전도’라는 아름다운 기능이 있습니다. 여기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 세계 열방을 깨우는 놀라운 장을 만들기 위해 예배당 건축은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교회가 성장되기까지는 지 교회 하나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와 작은 교회들을 섬기고 새로운 복음의 땅에 많은 교회들을 개척해 나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한국교회에 나누기 위하여, 영향력과 능력을 가지고 이웃교회와 이 도시를 살리기 위하여, 나아가 민족공동체 전체를 섬기기 위해서 예배당 건축은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기능과 영적인 기능이 교회에 있습니다. 구약성경 안에서 믿음의 성민들은 성전에 마음을 담고 또한 그들의 삶의 중심이 성전에 있었습니다. 

모든 신앙은 성전신앙이었습니다. 물론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그렇지만 성전이 가지고 있던 의미는 여전히 오늘 우리 시대에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성전이 가지고 있던 그 아름다운 신앙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처럼 교회엔 신앙적, 영적 기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잊어버린 서러움 속에서도 어디를 가든지 열 사람 모이면 회당을 세웠습니다. 회당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가치를 유지해 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청교도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기 전에 예배당을 먼저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먼저 예배드리고 농사를 시작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까? 

비전채플 완공 그리고 입당!

지금 우리와 함께 기도해야 할 때라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감사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함께 깨어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① 지금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한민족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허리가 잘려 분단된 조국을 보며 살아야 합니까?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정치가들과 중보기도자들 가운데 북한에 대하여 예견하는 이들은 북한이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준비하지 않으면 북한선교에서도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교단들마다, 나아가 한국교회 전체가 합의된 준비를 해가야 합니다. 

② 세계교회 즉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세계교회가 이슬람을 비롯한 타종교의 공격 그리고 이단들의 공격 심지어 신학이란 이름으로 무신론적 사상들이 기독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바른 신학과 복음의 열정으로 세계교회를 바꾸어가야 합니다. 세계교회 중심에 한국교회가 있습니다. 더 이상 한국교회는 피선교국 교회가 아닙니다. 세계교회의 신학과 선교 그리고 부흥을 책임지는 교회입니다. 

③ 방송언론 선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타종교들은 방송언론을 이 시대 선교의 도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이에 대한 신학적 이해, 인적 조직적 준비가 전혀 없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 시대 가장 책임 있는 공동체로서 언론 방송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사용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④ 어린이, 청소년 - 다음세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세대가 없는 한국교회에 내일은 없습니다. 비전채플 건축의 가장 큰 타당성은 다음세대 부흥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비전채플에 어린이, 청소년, 청년 - 다음세대 1만 명이 모여 예배하고 하나님의 세계경영을 이끌어 가는 꿈을 꾸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⑤ 교회를 통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 나라를 짊어지고 갈 인재양성을 위해서 기도할 때입니다. 준비되지 못한 지도자들이 힘을 가지게 되면 복음적인 영향력이 없습니다. 저는 장로직분을 가진 대통령들이 언젠가 이 땅에서 생명을 마치는 날 국장을 치르게 될 때 장례식에서 목탁이 두들겨지고 성수가 뿌려질 것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이것도 고인의 신앙과 종교적 예전을 따라 치러져 고인의 신앙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준비해 가야 할 것들이 태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⑥ 여러분 가정과 자녀들 그리고 각자를 위해 기도할 것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미국을 지키는 힘이 무엇입니까?

미국 역사 속엔 기도에 목숨을 건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톤은 평생을 매일 마다 새벽 4시부터 5시까지 한 시간 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언필칭 “아침형 인간”이었습니다. 야행성 인간이 아니라 아침형 인간이 세상을 정복한다고 합니다. 6대 아담스 대통령은 하루 일과를 마치는 저녁 시간 어릴 때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침대에 엎드려 긴 시간 기도했다고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벤자민 헤린슨, 지미 카터 등 모두가 기도로 산 대통령들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하신 강영우 박사는 부시 대통령 얘기를 했습니다. 부시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반드시 성경 한 장을 읽고 그날 해결해야 할 나라의 여러 문제를 두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함께 365일 설교집을 펼쳐 설교 한편을 읽고 아침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금년 6월 22일 부시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6.25. 60년을 맞는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회에서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옛 평양신학교에 최봉석이란 학생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면 그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습니다. “너는 왜 기도만 하면 우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대답했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일본에 빼앗긴 우리나라가 불쌍하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난다. 그리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III. 영적 전쟁터에서 

무엇보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의 영적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 집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해야 역사가 행복해 집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기도의 동산에 올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그것은 곧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제사장들의 문제도 아니었고 헤롯이나 빌라도의 문제도 아니었고 바로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신앙생활에 승리하기 위한 마지막의 적,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사회에서 멋지게 승리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 아름답게 승리하던 사람이, 어려운 상황 속에도 멋지게 승리하던 사람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처절하게 깨어지고 좌절하고 자기 앞에 패배하는 모습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던 분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노도 광풍을 잔잔케 하시던 능력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왜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그 시간에 기도해야만 했을까요? 일찍이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했습니다. 자기를 꺾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동산에 올랐습니다. 기도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위대한 한 사역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운데 위대한 설교와 위대한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연약한 민초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중간 중간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큰 기적을 베푸신 다음 홀로 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했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분의 가르침이 권세 있는 자와 같을 수 있었던 비밀이었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베풀어 주실 수 있었던 신비가 바로 기도 가운데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이런 신비가, 이런 비밀이 나갈 수가 없느니라”  

가끔 혼자 기도하셨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홀로 기도해야 될 때가 있지요. 남모르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눈물 지으며 기도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골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땅을 치며 홀로 울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티내지 않고 금식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 공동체에 위기가 밀어닥칠 때, 교회가 함께 마음을 모아 역사를 감당해야 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을 때, 민족공동체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을 때 우리는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어린 자녀들을 함께 불러 모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놓고 가장된 사람이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시대적인 비전을 주셨는데 그 비전을 함께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이제는 좀 더 진실하게 아버지 앞에 나와 항복하고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비를 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님 고난 당하신 이 고난의 절기 - 깨어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손에 손을 붙들고 기도하게 될 때에 하늘의 신비한 권능을 체험하고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사역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교회학교 교사에게 가장 위대한 사역은 가르치는 순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어린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할 때 이미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들의 경우에도 맡겨주신 귀한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그곳에 가장 위대한 사역이 베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역의 준비가 아니라 사역의 시작이요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로 내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내가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사역은 기도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무서운 적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면 성공 때문에 망합니다. 실패가운데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실패에 내가 빠져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내가 실패자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한걸음 더 전진할 수 있다면, 실패가운데서도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성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일 아침부터 새벽에 모두 나오십시오. 많은 분들이 내일 모래 중보기도학교에도 등록하시길 기대합니다. 


IV. 기도는 호흡

기도는 호흡과도 같습니다. 수영을 배울 때 제일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이 호흡법입니다. 이 숨쉬기가 잘못되어 있으면 수영선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메케한 물만 마시다 나옵니다. 우리의 육체가 탄생의 첫 울음과 함께 호흡을 시작하여 이 땅을 떠나는 그날까지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난 그날부터 성도는 기도의 호흡으로 살아갑니다. 

 이 기도의 호흡이 잘못되어 있으면 건강한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물속에 빠져 실신한 사람을 건져내 제일 먼저하는 일은 호흡을 살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병든 사람을 살리는 길은 죽은 기도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약 6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포들의 움직임을 보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지 모릅니다. 입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 영양분은 60조개나 되는 세포에 똑같이 나누어집니다. 그 속도는 1초 만에 지구를 한 바퀴를 도는 만큼의 매우 빠른 속도입니다. 

살이 찌면 온 몸이 뚱뚱해지고 살이 빠지면 온 몸이 홀쭉해집니다. 한쪽 볼만 살찌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온몸이 균형있게 살찐다는 것은 영양분이 골고루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60조개의 세포들은 완전한 사랑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가지고 공평하게 배급을 준다 하더라도 더 가는 곳이 있고 덜 가는 곳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 몸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영양 공급에서 빠진 세포가 있다면 그 세포는 곧 죽고 말 것인데 다행히 우리 몸은 완벽한 분배로 똑같이 영양분을 나눕니다. 이렇게 똑같이 나누어서 먹어야 하는데 자기만 독식하는 놈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놈을 일컬어 ‘암세포’라 부릅니다. 암세포가 있으면 위만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만 아는 사람들을 보고 ‘암적 존재’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몸이 신비하고 과학적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궁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음식물도 목으로 들어가고 공기도 목으로 들어가는데, 어떻게 정확하게 이 둘이 제 갈 길을 찾아 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간혹 음식이 기도로 잘못 들어가게 되면 재채기를 해서라도 밖으로 다시 튀어나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호흡이라고 말씀하실 때 여기 진리가 있습니다. 기도는 밥 먹듯 하루 세 번 띄엄띄엄 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 쉬듯이 피가 돌듯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하루종일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도요, 잠자리에 들면서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V. 기도는 간절하게

본문이 말하는 기도에 관한 또 다른 교훈은 “기도는 간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간이 절이도록, 창자가 아파 끊어질 만큼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뜨거움이 없는 기도는 항상 하늘에 닿기 전에 얼어버린다” - 토마스 부룩스의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너무나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강조어가 곳곳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지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며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유대인들은 종종 기도할 때에 서서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고 영광스런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은 일어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곤 했습니다. 감사할 때, 찬양할 때에, 삶이 잘 펼쳐 질 때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낭만적으로 안일하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몸부림하며 절규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자리가 너무나도 장엄하여 43절에 보면 “천사를 보내 기도를 도왔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44절에 보면 얼마나 처절하게 매달려 하나님 앞에 몸부림하며 기도했던지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어서 뚝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생명을 거는 기도,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자신을 위한 것 뿐 아니라 우리교회의 비전이 크고 귀하여, 민족의 운명이 중요한 기로에 서 있어서, 찢어져 가는 가정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냥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걸핏하면 목을 매다는 사람들, 한강으로 뛰어드는 사람들, 자살의 영들이 우글거리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청소년들이 꿈을 잃어버리고 정말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인가? 내 부모들처럼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 방황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내 자식을 축복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핵의 위험이 도사리는 이 땅, 통일의 염원은 멀어져만 가고 있는 이 시대, 한국교회가 이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VI. 기도할 수 있는데

사랑하는 여러분, 비범한 상황은 비범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필사적인 기도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소리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피곤하여 졸면서도 언뜻 언뜻 예수님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잔을 내가 마시지 않고 다른 길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잠속에서도 예수님의 절규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제자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던 예수님의 기도소리를 똑똑히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분이 있다고 하면 바로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도하셨습니다.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피를 토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잠들면 민족이 잠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민족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가정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자식들이 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쓰러진 그 자리 절망했던 그 자리, 낙망했던 그 자리에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절규하며 기도하던 그 밤 한 비극적인 기록을 본문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눅 22:45-46)

잠자는 자는 말이 없습니다. 대화가 끊어집니다. 영적 대화, 기도가 단절된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잠자는 자’란 ‘죽은 자’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 영혼이 병들어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잠자는 자는 행동이 없습니다. 사역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라! 지금 당신은 잠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깨어 기도해야 할 사람입니다. 

경영학에서 80대 20이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한 공동체에 생산량의 80%를 20%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비하는데도 20%의 사람들이 80% 자원을 소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이 민족의 문제는 이 사회의 문제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안타까운 문제는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20%의 그리스도인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미가 부지런한 곤충으로 알고 있지만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는 2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100%의 대한민국 이 민족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을 살아가는 20%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깨어나면 민족이 깨어나고 우리의 눈물샘이 터지면 하늘 축복의 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기도 비상령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전공과목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전공과목에 충실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어린나이에 전도사와 부목사를 해보지 아니하고 교육전도사로 있다가 서울에 있는 한 교회를 담임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교역자 세계에서 이 기록은 좀처럼 깨지기 어려운 기록일 것입니다. 

4년 정도 그 교회를 섬기는 중에 그 교회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싶어 새로운 목회사역을 두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첫째 길은 우리 교단내 가장 큰 교회에서 교육담당 목사로 함께 팀 사역을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정식 초빙이 되었으나 섬기는 교인들의 심한 반대와 만류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 길은 한 신학교 기독교 교육학과 교수로 가는 길이었는데 박사학위가 없어서 교수회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셋째 길은 포항에 있는 어느 큰 교회에 담임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당시 나이 39세 - 큰 교회를 맡기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당회에서 역시 논란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섬기는 그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사방으로 길이 열리나 싶더니 모든 길이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 목회사역 중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자신이 못나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진지하게 우리는 기도해 보지 않았습니다. 길이 있을 겁니다. 기도해 봅시다.” 그리하여 30일 40일 그리고 100일 동안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12월 7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개척교회를 선언하고 섬기던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교회입니다. 여러분, 막혔던 그 길들보다 이 길이 못한 길이었을까요? 길이 막혔다고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면 망하지 않습니다. 길이 보입니다. 길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포기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절망하십니까? 이웃 탓에 불평이나 하고 있지 마십시오.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가면을 쓰고 왜 당신의 문제를 숨기려 하십니까? 어디로 도피해 버리려고 하십니까? 에라 잠이나 청하자. 망각으로 도피해 보니 해결책이 보입니까? 길이 보입니까? 이제 접어두었던 기도의 제목을 다시 펼치기로 하십시다. 덮어두었던 성경책을 다시 펼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기로 하십시다. 길이 막혔다고 절망하지 말고 하늘 문을 두들겨 보기로 하십시다. 그곳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교회든 고난 주간 - 깨어 기도하기로 하십시다. 

< 우리 함께 기도해 >

「우리 함께 기도해 주 앞에 나와 무릎 꿇고
긍휼 베푸시는 주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마침내 주 오셔서 의의 빗줄기 우리 위에 부으시도록」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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