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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하시는 하나님 (창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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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시는 하나님 (창 22:1~19)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의 제물로 드리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들을 드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정대로 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당시 이삭의 나이가 10대 후반 정도였는데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목숨을 맡깁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막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라고 말하며 아브라함을 인정해줍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한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가져다가 번제로 드리고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여호와 이레’란 말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숫양으로 번제를 드린 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고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모리아산의 이 사건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1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험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혹이라는 시험인데 이것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기도하시고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 시험은 유혹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유혹은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유혹은 달콤하게 찾아와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선악과로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에게는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유혹이 많은 시대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기도하며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둘째로 시련이라는 의미의 시험이 있습니다. 시련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을 누릴 수 있는 존재들로 훈련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외국의 어느 양계업자가 들판에 나갔다가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독수리 알을 달걀과 함께 부화시켜 병아리들과 함께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 새끼는 병아리와 꼭 같이 행동을 합니다. 주인은 독수리를 날게 해 보려고 양계장 지붕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비틀거리며 지붕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어느 날 주인은 새끼 독수리를 데리고 높은 절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벼랑을 향해 내어 던졌습니다. 처음에는 비틀비틀 떨어지더니 조금 지나자 독수리는 양쪽 날개를 활짝 펴고 날기 시작했습니다. 힘차게 힘차게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독수리의 성공은 높은 절벽 위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험하고도 높은 벼랑위에 세울 때가 있습니다. 절벽을 향해 던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시련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새 출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평가적 차원의 시험이 있습니다. 수준을 알고 싶은 상대를 테스트합니다.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객관적인 평가를 위한 시험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시험은 바로 평가적 차원에서의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시험문제는 “모리아 산에 가서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라”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시험이 냉혹하기까지 합니다. 본문은 ‘그 일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그 일’이 무엇입니까? 21장에서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이 빈들로 쫓겨나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를 대신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아준 여자입니다. 이스마엘은 서자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그 어미를 빈들로 쫓아낸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일 후’가 바로 그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겨우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엔 독자 이삭까지 바치랍니다. 무서운 카운터펀치가 날아왔습니다.

복싱 선수가 링에서 싸울 때 가장 어려운 순간이 언제인줄 아십니까? 상대에게 적중타를 맞아 첫 번째 쓰러질 때는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답니다. 겨우 일어나는 순간 다시 한방 날아와 또 다시 쓰러지고 나면 무서운 절망감이 순간적으로 찾아온다고 합니다. ‘아! 안되는가 보다!’ 그때는 정말 초인적인 힘이 아니면 일어설 수가 없다고 합니다. 본문의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 다운을 당하고 겨우 일어난 복싱선수가 곧 바로 다음 펀치에 다운이 되는 순간과 같습니다. 정말 냉혹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잘 이겨냈습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임합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잘 통과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정해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17,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시는 것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에게도 큰 복을 약속하십니다. 수능을 잘 보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입사시험을 잘 보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잘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약 1:12에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항상 시험과 시련과 유혹과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신앙생활에 중요한 덕목이 인내인 것입니다. 고후 12:12에 보면 사도의 표를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도의 표하면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사도의 표이지만 바울이 말한 사도의 표 첫 번째는 모든 참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기 어려운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거든 오래 참음을 생각하십시오. 


2.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12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받는 인정은 잠간이지만 하나님께 받는 인정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셨습니다. 특히 그의 순종은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엄청난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라고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원망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주시지나 말지 왜 주시고는 달라는 것이냐고 떼를 쓰면서 지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순종했습니다. 4절에 보면 모리아산까지 가는데 3일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까운 곳을 지시하지 아니하시고 3일 길을 가서 바치라고 하셨겠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사흘이면 마음이 바뀔 수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순종했던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습니다. 
2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일러준 한 산에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절에 보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곳으로 갑니다. 10절에 보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순종하더라도 자신의 생각대로 편리하게 생각하고 쉽게 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 아브라함은 순종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르는 유혹의 요소까지 제거하였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면서 사라와 상의하지 않습니다. 사라와 상의했다면 사라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분명히 반기를 들 것입니다. 반대를 하다가 안 되면 이삭을 숨기기라도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산 아래에 함께 간 두 사환을 두고 이삭하고만 산 위에 올라갑니다. 6절에 보면 이삭이 땔감을 매고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이 왜 이렇게까지 하였을까요? 그것은 순종의 순간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작은 유혹의 요소까지 제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환들을 데리고 번제할 곳까지 갔다고 합시다. 저들이 보는 앞에서 이삭을 묶고 번제로 드리려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사환들이 아랫사람이요 주인의 뜻에 순종해야 하지만 그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붙들고 말릴 것이 뻔합니다. 사환들이 이삭을 데리고 그 자리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순종하려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유혹의 요소까지 떨쳐버리고 순종하였습니다. 

다섯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올라가면서 사환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8절에 보면 번제 할 양이 어디 있는지 묻는 이삭에게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여러 번 이 약속의 씨를 통해 무수한 자손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이 장가를 든 것도 아니고 자식을 낳은 것은 더더구나 아닌데 그 아들을 바치라니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이지 않으실 것이다. 혹 죽이셔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롬 4:17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사울이 버림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군사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말씀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강한 군사가 되고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군사 된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온 세계를 파죽지세로 정복하여 나갈 때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몇 명 안 되는 작은 군사를 이끌고 거대한 성을 침략하였습니다. 아주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성 앞에서 성안의 왕을 불려 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성과 네 군사를 내게 바치라. 싸운 후 피해를 보지 말고 미리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안의 왕은 큰소리로 웃으면서 “그렇게 작은 군대로 무슨 싸움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고는 항복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자기와 그의 군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군대를 일렬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였습니다. “저기 보이는 낭떠러지의 꼭대기를 향해 행진!” 알렉산더의 병사들은 낭떠러지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알렉산더는 다시 명령하였습니다. “낭떠러지에서 거꾸로 떨어져라.” 알렉산더 군사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그리고 거침이 없이 한 사람씩 낭떠러지로 거꾸로 몸을 던졌습니다. 열 명이 떨어져 죽었습니다. 10명이 죽은 후 알렉산더 왕은 그만 떨어질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성안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과 군사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저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명령을 따르는 군사들에게는 아무리 강한 요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견디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왕의 군사들도 그렇게 순종하는데 하물며 천지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3. 효자 이삭처럼 효도하며 삽시다.

이삭이 복을 받은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효도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기를 묶고 칼로 죽이려고 하는데도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목을 내놓고 아버지에게 효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효에 대해서 복으로 갚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고난이 적은 사람이 이삭입니다. 

효도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엡 6:1-3을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약속합니다. 

효도하면 복을 받지만 반대로 불효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은 무서운 저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잠30:17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짐승의 밥이 되는 비참한 죽음을 말하는 것이고 영적인 의미로 보면 불효자는 사단의 밥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단에게 밥이 되면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잠 20:20에서는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불효자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불효의 죄가 얼마나 큰지 출21:15에서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말씀을 현실 속에서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제네바에서 목회할 당시 시의회에서 제정한 법률 중 부모를 구타한 사람은 사형시킨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칼빈은 아버지의 뺨을 때린 10대를 실제로 사형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에게 순종합시다. 이삭은 늙은 몸으로 자기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 어머니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부모님에게 효도하며 살았습니다. 일찍 일어나라고 하면 일찍 일어나고 나무를 지고 산에 올라가자고 하면 산에 올라가고 죽으라고 하면 죽을 정도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했습니다. 창22장에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서 일찍 일어나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불평이나 반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존경합시다. 엡 6:2에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공경’이라는 말은 ‘존경’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이 크게 보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작아 보입니다. 자식이 부모님보다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부모p들과 비교해서 미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칫 부모를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존경해야 합니다. 존경하면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자랑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미국의 링컨의 대통령에게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가 당선된 후 상원에 가서 취임 연설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평범한 가문 출신이므로 귀족들인 상원의원들이 배알이 뒤틀렸습니다. 다리를 꼬고 박수도 치지 않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링컨에게 비꼬는 말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어쩌다가 대통령 됐지만 늘 기억하시오. 당신 아버지가 우리 집에 드나들며 구두 만들어주던 사실을 말이요. 아마 여기 여러 사람이 당신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을 거요.”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공적인 자리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소. 우리 아버지는 제화공이었소. 나의 아버지는 멋진 예술가였소. 세상에 그분보다 구두를 더 잘 만드는 사람은 없을 거요. 내가 그분이 구두 잘 만드는 만큼 대통령직을 잘 감당할지 모르겠소. 혹시 여러분 중에 구두가 잘 안 맞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가져오시오. 나도 아버지에게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이 있으니 기꺼이 수선해 드리겠소.” 그랬더니 좌중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구두수선공이었던 아버지에게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립시다. 잠23:25에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생각하고 기쁨을 드립시다. 
진정한 효자가 되려면 부모님을 용서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효도를 못하는 이우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에 받은 상처를 가슴에 담고 풀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의외로 부모로부터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가정사역 연구소에서 20대 기독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았는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으로 아버지를 지목한 청년들이 40.7%, 어머니로 지목한 청년들이 32.1%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대부분 오해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비정한 부모들도 가끔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형편이 안 되는 경우,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한 경우, 혹은 사랑하지만 잘못 표현한 경우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면 충분히 용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를 낳아주신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먼저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사랑도 존경도 효도도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미리 준비해주시는 분입니다. 

13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해서 숫양을 준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가장 합당한 것을 준비해두시는 분입니다. 

윈형제가 쓴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현대판 사도행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책에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윈형제는 1974년 부친이 기적적으로 암이 치유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처음 예수를 믿을 때의 일입니다. 중국 정부가 문화대혁명 기간에 성경을 몰수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성경을 볼 수 없었는데, 소년이었던 윈 형제는 성경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성경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린 그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상달되어, 어느 날 그에게 환상이 임했습니다. 한 노인이 자기에게 성경을 전해주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환상처럼 한 노인 전도자가 찾아와서 성경책을 전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인도 목숨을 걸고 보관해 온 성경을 윈 형제에게 전해주라는 환상이 임했습니다. 그 전도자는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성경을 꺼내들고 윈 형제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윈 형제에게 성경을 전달해주시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윈 형제와 그 전도자에게 동시에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주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미리 준비해주시기도 하고, 당신의 자녀들을 위험으로부터 건져주시기 위해 미리 준비해주시기도 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미리 준비해주시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이삭을 대신해서 준비해 두신 숫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이 숫양이 이삭이 죽어야 하는데 이삭을 대신해서 제물이 된 것처럼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인생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약 700년 전에 주님의 고난을 미리보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이번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보내야겠습니다. 

저는 결론 부분에서 17절에 나오는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는 말씀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대적의 성문을 차지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원수에 대해서 승리한다는 의미입니다. 적의 성을 취하기 위해서는 성문을 취해야 합니다. 성문이 열리면 그 성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적의 성문을 취한다는 말은 원수를 이겨서 그 영역을 점령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의 “대적의 성문을 취한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나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이 무너지게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약속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가를 교훈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씨인 믿음의 사람들이 대적의 성문을 취하기 위해서는 영적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나서 너무나 소극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내 문제는 해결될 거야, 나는 복을 받게 될 거야, 기도는 응답이 될 거야”라고 안일한 자세로 살아갑니다. 이는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질 것을 기다리고 그 밑에서 입을 벌리고 누워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을 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장하고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포기하는 것은 가나안 점령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건 전쟁을 해야만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영생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복을 주셨지만 우리가 그 복을 누리려면 우리들이 영적인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으로 전진해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받은 전략에 순종하며 가나안을 조금씩 조금씩 점령해 나갔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목회자인 저에게 주신 영적 전략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해 두신 가나안을 점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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