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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기도의 능력,회복 (막 1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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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능력,회복 (막 11:12~25)


서론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 등을 흔들면서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다음날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12절) 베다니는 예루살렘 3km 떨어진 곳으로 숙박시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돌아보시고 베다니에서 숙박하신 후에 그 다음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계셨습니다. 

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12절-14절) 

그 때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님께서 아침 일찍 출발하셔서 아침을 거르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멀리서 보니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예수님께서 기대를 가지고 그 무화과나무에 가셨으나 잎사귀는 무성했지만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소위 저주를 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14절) 

예수님이 나무에게 저주를 하시고 저주에 따라 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이 구절은 환경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예수님도 시장하시면 분노하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셔서 혈기를 못 가누셔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많이 사용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무화과나무에게 분노하신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상징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지금 얼마나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드러내시고 심판하셨다고 마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이 잎사귀만 가득했던 이유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기술하였습니다.(13b절) 무화과나무는 일반적으로 6월에 열매를 맺으나 그 때는 4월이어서 열매 맺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때가 아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것이 바로 상징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Ⅱ.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당시 유대교의 두 가지 문제점 (15절-18절)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이 연이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15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들어가신 후에 성전이 들어가셨는데, 성전에는 매매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어버리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전에 운동권성향의 청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엎어버리시는 분이시므로 이 세상 뿐만 아니라 부패와 모순으로 가득찬 교회도 엎어버려야 된다고 좋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엎어 버리셨을 뿐 아니라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17절)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사야 56장 6절-8절에 보면 성전이 과거에는 성전에 나올 수 없었던 이방인과 수많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다 나아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민이 모여서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1. 필요가 본질을 압도해 버리는 문제점 

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 속에서 나타났던 당시 유대교의 문제를 두 가지 지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첫 번째 문제점은 필요가 본질을 압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매매하는 사람이 나오고 돈 바꾸는 사람이 나옵니다. 오늘날로 하면 교회에 외환은행 지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들은 1년에 3번씩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오지 않고 형편에 맞는 제물을 가지고 와야 되고 1년에 한 번씩 성전세를 내야 되었습니다. 

성전에 세금을 낼 수 있었던 돈은 당시 통용되었던 황제 얼굴이나 신들의 얼굴이 새겨진 일반적인 돈이 아니고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용인한 화폐로만 성전세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속에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멀리 외국에서 오거나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때 거룩한 돈으로 성전세를 내는 것을 성전에서 도와주기 위해 이방인의 뜰에서 환전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디아스포라에 의해 다른 나라에 속해 있던 유대인들이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올 때 제물로 드릴 양이나 염소를 끌고 올 수 없었고,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던 제물은 까다롭게 자격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멀리에서 오더라도 제물을 구해 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 성도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께 제물드릴 수 있는 자격있는 제물을 미리 준비하여 두었고, 그래서 이방인의 뜰에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매매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큰 이권 사업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으로 대표되는 자들은 엄청난 부를 가지게 되어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사랑과 인자와 오래참음이 넘치는 예수님도 이 모든 것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만민이 모여서 만민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데 그 일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들이 경제적 이권을 챙기는 일이 우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더라도 물질이 연관되어 있다면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요가 본질을 압도해 버리는 모순들이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외부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외부 사람이 생각하기에 교회 속의 많은 이권과 재정으로 인해서 교회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더라도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시작한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리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회개로 인도하기보다 헛된 평안을 주는 문제점 

또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는 것은 예레미야 7장 8절~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구절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 서서 이 집이 하나님의 집, 성전이라는 무익한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으로,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을 들어서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돌이켜 회복하게 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때 비로소 그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살인, 도둑질, 간음, 거짓명세 등의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교회도 당시 죄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면죄부를 주어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이 준 거짓된 평안의 말씀을 듣고 더 뻔뻔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맥 속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너희는 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오늘날 교회 속에서 일어나야 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들의 삶을 끊임없이 고치는 일이 예배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인데, 교회가 회개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더 뻔뻔한 마음으로 죄를 지도록 만드는, 거짓 평안에 의지해서 면죄부를 준다면 교회가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행동을 통해서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린 유대교의 문제와, 사람을 회개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평안을 던져주고 면죄부를 줘서 삶의 변화는 없지만 더 뻔뻔하게 죄를 지도록 만든 유대교의 한계를 책망하시고 드러내셨습니다. 

Ⅲ.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22절-25절) 

1. 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능력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질문하였습니다.(21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절-24절) 

22절-24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핵심은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 기도의 응답과 관련해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가 기도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고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잎사귀만 무성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수님께서 저주하시는 말씀과 함께 가르쳐주셔서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닫기 힘들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말씀을 접하다가 때로 납득이 안되는 말씀에 부딪히게 되면 억지로 풀려고 하기 보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그 말씀을 하실 때의 예수님 얼굴 표정을 한번 생각해보면 말씀의 참된 의도를 아실 수 있습니다. 

2. 뿌리째 마른 나무도 살릴 수 있는 기도의 능력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께 구하고 믿으면 무엇이든지 된다, 잎사귀만 무성한 사람들을 저주하고 그대로 믿어버리면 뿌리째 말라버린다.’는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얼굴 표정을 알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예수님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초청하시는 무엇인가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잎사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뿌리째 마르게 할 수 있다면 뿌리째 마른 무화과나무를 잎사귀가 무성하고 열매가 가득한 나무로 회복할 수도 있겠느냐? 없겠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말할 수 없는 은혜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제 마음에 쌓였던 분노-교회에 대한 분노, 가정에 대한 분노, 제 자신에 대한 분노, 한국 사회에 대한 분노,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들에 대한 분노가 이 말씀을 통해서 풀어졌습니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를 뿌리째 마르게 할 수 있다면 뿌리째 마른 나무도 살릴 수 있잖아. 아무리 네 가정, 영혼, 교회가 병들었다고 하더라도, 뿌리째 말랐다고 하더라도, 잎사귀만 무성하더라도 내가 살릴 수 있잖아. 너희가 기도하고 믿기만 하면 나는 살릴 수가 있어.’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너무나도 강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마른 뼈의 환상에서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게 되었을 때 마른 뼈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듯이 그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죄악에 빠져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죽어가고 병들어가고 뿌리째 말라버리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심판하시지만,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이들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들을 살리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지금 우리들의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을 주님은 살리실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고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 치유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리부터 40일 특별새벽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같이 모여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성도님들의 영혼을 치유하시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의 육신을 고치는 것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소망을 잃어버린 가정을 주님이 새롭게 하시는 것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축복하여주셔서 대구 땅을 살릴 수 있는 주님의 귀한 교회로 세우시는 것을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은 마르게도 하시지만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분 앞에 믿음으로 간구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보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저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저의 영혼을 살려주십시오. 마른 뼈와 같습니다. 잎사귀는 많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살려주십시오. 때로는 필요가 본질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회개로 인도하기 보다는 헛된 평안을 던져주어서 강도의 소굴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저를 고쳐주시고 우리 교회를 고쳐주셔서 이 대구 땅을 고쳐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 가운데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도록, 은혜의 강물이 다시 한번 흘러넘칠 수 있도록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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