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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가 쓰시겠다 하라 (슥 9:9, 마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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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슥 9:9, 마 21:1~3)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된 날입니다. 종려주일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가장 길고 중요한 시간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말씀, 기적,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십자가가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때문에 말씀과 기적과 삶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기록은 마태복음에는 전체의 3분의 1입니다. 마가복음에는 5분의 3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전체의 4분의 1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 입성은 몇 가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왕중왕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나무나 초라합니다. 구약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을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보잘 것 없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어린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옛날 승전장군은 큰 말을 타고 마차와 군사와 함께 입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예수님과 함께 입성하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은 마치 바보들의 행진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넷째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보고  ‘호산나’로 찬양했습니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원은 커녕 군중들이 ‘죽이라’고 돌변하는 바람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다섯째는 어린이의 환호에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소리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님의 입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입성의 대열에는 어린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입성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어시대고 뽐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소리치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에 예수님을 가장 크게 도운 존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도 아닌 짐승입니다. 큰 말도 아닌 나귀입니다. 다 자란 나귀도 아닌 어린나귀입니다.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철없는 나귀가 가장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이 어린나귀는 주님이 쓰시기에 가장 적합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나귀는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귀는 어리고 철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평안히 업어드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린나귀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여 타고 가신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는 존재는 거창한 존재가 아니라 어리고 겸손한 존재입니다.  
  
보톨도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 때에 보톨도의 문하생이 되겠다고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본 보톨도는 “위대한 조각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보톨도는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를 먼저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한 곳은 술집이었고 그 앞의 조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한 곳은 성당이었고 성당의 조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조각하였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조각하였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스승의 질문에 미켈란젤로는 힘을 주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관심을 두시는 것에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쓰는 사람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관심에 집중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광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2절에는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1:2과 누가복음 19:30에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합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었지만 예수님이 타신 것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것은 나귀 새끼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가급적이면 큰 나귀를 타시지 왜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까? 예수님은 겸손하여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베들레헴의 예수님의 탄생기념교회의 문도 아주 작습니다. 모든 방문객들이 그 곳을 들어갈 때는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만큼 문이 작습니다. 겸손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스가랴 9:9에는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를 구약에서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겸손하여 어린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구약에 메시아 예언이 300여 곳에 나타납니다. 출애굽기에는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이사야에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고 하고, 그 분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합니다. 스가랴에는 어린 나귀를 타실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한 예수님은 한 결 같이 작고, 어리고, 약한 모습입니다. 
  
겸손하신 주님을 그렇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 중의 왕입니다. 만유의 주이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왜 겸손하셔야 합니까? 겸손해야 세상을 얻습니다. 겸손해야 승리합니다. 겸손해야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겸손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하여 겸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지 않으시면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겸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겸손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짐승이 사람을 태운 경험이 없으면 서툴러 타고 있는 사람도 불편한 법입니다. 또 처음 사람을 태우면 아무리 순한 짐승이라고 날뜁니다. 그러나 이 어린나귀는 날뛰지 않았습니다. 아주 편안하게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입성하였습니다. 
  
미국이나 맥시코나 캐나다에는 ‘로데오’라는 경기가 있습니다.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를 영어로 ‘브롱코’(bronco)라고 하는데 야생마에 사람이 타면 이리저리 날뛰어 카우보이를 떨어트립니다. 야생마의 등에서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이 승리하는 경기가 ‘로데오’입니다. 우리나라에 ‘로데오 거리’가 있는데 로데오 경기와 직접 관계는 없는 이름입니다. 미국 베벌리힐즈에 ‘로데오 드라이브’라는 세계적 패션거리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패션거리라는 의미에서 ‘로데오 거리’하고 합니다. 
  
오래 전 시내산에 갔을 때 깜깜한 새벽에 낙타를 타고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제 아내가 낙타 새끼를 탔는데 자꾸 다른 데로 가더랍니다. 심지어는 올라가다가 내려가는 낙타를 따라 내려가더래요. 사람을 태운 경험이 없으므로 제대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험이 없는 낙타가 그래도 거꾸로 갔기에 다행입니다. 바로 그 옆이 낭떠러지였는데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어린 나귀는 거꾸로 갈 수도 있습니다.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위에 탄 사람을 떨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나귀는 사람을 태운 경험이 없지만 사람을 태울 수는 있습니다. 사람을 태우는 일은 나귀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쩌면 사람을 태우는 일이 가장 쉬울지 모릅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을 위한 일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발견한 그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이 나의 소명이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가는 기쁨이 나귀에게는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도 영광인데 하물며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손만 잡아도 기쁨인데 등에 태웠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크리스토’라는 말과 ‘등에 업다’는 뜻의 ‘오페이로’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도를 등에 업는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이렇게 좋은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업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영광입니다. 
  
누가복음의 안나와 시몬을 보세요.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안고 축복하는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세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는 기쁨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옥합을 깨트리고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인을 보세요. 예수님의 발을 씻고 닦는 특권을 누린 사람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보세요. 자신의 묘지에 예수님을 모시는 은혜를 누린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이 다 예수님을 등에 업은 사람들입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은 어리고 비천한 우리의 대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등에 업는 특권입니다. 우리도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나귀 새끼는 주님이 쓰실 주님의 도구입니다. 

3절에는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왜 그 나귀입니까? 왜 어린 나귀입니까? 단지 성경은 겸손하여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합니다. 겸손하여 그 나귀를 타셨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택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나귀는 알지 못하는 선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나귀는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한 장면에 꼭 필요한 선택된 도구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찬송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을 하나의 도구입니다. 내가 미천하지만 그러나 내가 없으면 하지 못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니면 하지 못할 일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들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쓰임 받는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감격입니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려는 도구로 선택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세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들이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내어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사사들은 힘과 지혜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게 하여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달하여 백성들을 깨우치고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여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위하여 세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실 도구들입니다.  
  
쉘돈 바나우켄은 “기독교를 위한 최상의 도구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과 확신과 온전함을 보라.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도구 역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이 우울해하고 전혀 즐거워하지 않을 때와 또 편협하고 공격적일 때 기독교는 수천 번도 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살리는 도구이며 동시에 죽이는 도구입니다. 
  
내가 주님께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주님께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을 보세요.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세상 살아 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손과 발을 드리니, 나의 음성 드리니, 나의 보화 드리니,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를 찬송합니다. 그리고 4절에는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하늘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라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4절을 부를 때 입을 다물고 찬송 안 하시는 분이 있다면서요?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이 쓰실 도구입니다. 나의 지식이나, 시간이나, 능력이나, 재물이나, 몸이나, 생명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괴테는 “우리는 모루(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 보다는 망치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착각은 예수님처럼 자신이 채찍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채찍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손에 들려진 채찍이 되어야 합니다. 채찍으로 치면 제일 아픈 게 채찍입니다. 내가 먼저 아파야 교회가 변합니다. 내가 먼저 도구가 되어야 교회가 깨끗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는 우리의 손 이외에는 그의 일을 할 손이 없네. 우리의 발 외에는 사람들을 그에게 인도할 발이 없네. 우리의 혀 외에는 그가 어떻게 죽으셨는가 말해 줄 혀가 없네. 우리 외에는 그의 곁으로 사람들을 데려다 줄 사람이 없네”라는 글이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도구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디모데후서 2:21에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깨끗함이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제일 중요한 조건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쓰실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낌없이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은 하나님이 온전히 쓰신 결과입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의 의미이며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아낌없이 쓰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을 받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4에는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온전히 쓰임을 받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온전히 쓰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입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온전히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주가 쓰시겠다”하면 온전히 나의 생명, 나의 손과 발, 나의 시간, 나의 보화까지 다 드리는 주님의 어린 나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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