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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눅 23: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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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눅 23:32~43)
   

우리는 오늘 수난주일로, 종려주일로, 성례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한 주간을 주님의 수난주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수난주간의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하면 성금요일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날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주간이요, 주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절기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짧은 외마디의 말씀 7언을 남겨주셨는데, 그 말씀을 대할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7언의 말씀은 하나 같이 귀한 말씀이요,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구속 사역에 있어 결론을 보여주시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7언에 대하여 그 의미를 알고 기억하며 암송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가상칠언에 대하여 한 번 깊이 연구하시고, 묵상하시고, 삶에 적용하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7언의 말씀을 쉽게 암송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약자로 표기하여 암송하는 방법입니다. 

①언, 용(容),  눅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하여 주옵소서.  즉 용서하여 달라는 뜻으로 ‘용’이라고 했습니다.  용(容)자는 얼굴용, 용납할 용자입니다.

②언, 낙(樂),  눅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이라는 말에서 ‘낙’자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낙(樂) 즐길 락입니다. 

③언, 자(子),  요19:26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아들이라는 말을 기억하라고 ‘아들자’(子)라고 했습니다. 

④언,  기(棄),  마27:46, 막15:34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린다는 말로 ‘버릴기’(棄)라고 하였습니다.  

⑤언,갈(渴),  요19:28 “내가 목마르다” 갈증을 느끼신 것을 기억하라고 목마를갈(渴)이라고 했습니다.   

⑥언, 성(成), 요19:30 “다 이루었다”  이룬다는 이룰성(成)이라고 했습니다. 

⑦언, 혼(魂), 눅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영혼을 부탁하였다고 하여 혼(魂)이라고 했습니다.  

“용, 낙, 자, 기, 갈, 성, 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암송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내용을 잘 알고 한 글자로 전체를 연상할 수 있다면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가상칠언의 말씀 중에 두 번째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한 늙은 목사가 나이가 많아 수를 다하고 임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신자들 중에 한 은행가와 변호사를 불러들였습니다.  두 사람이 침실로 들어오자 노목사은 침대 양옆에 와서 앉으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손을 잡은 목사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목사님이 임종하는 자리에 불려온 사실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동안 재물에 대한 탐욕을 호되게 질타하시던 목사님이셨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좌불안석에 시달렸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은행가가 “목사님, 어찌하여 우리들을 부른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노목사님은 가냘픈 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강도들 사이에서 숨을 거두셨는데, 나도 그렇게 떠나고 싶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고급 유머입니다.   

우리 주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있습니다.  골고다에는 3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중앙의 십자가에 달리셨고, 좌우에는 두 행악자, 곧 강도가 사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강도 둘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행악자들이었고, 강도였습니다.   로마에서는 흉악한 강도, 살인강도는 십자가에 처형하였습니다.  본보기로 무서운 형벌로 사형을 시켰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깜짝 놀랠 정도로 구약과 신약이 맞물려 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구약에서는 먼 훗날 신약 시대에 이루어질 것을 훤히 내다보면서 기록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구약의 기자가 환상을 보고서 기록하는데, 그 환상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으로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이었습니다.  

눅22:37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은 새번역에서는 “그는 무법한 자들과 한 패로 몰렸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죽이는데, 두 강도와 함께 집행하는 것은 예수님을 범죄자로 취급하여, 죄인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살인강도와 함께 죽은 것을 보니 무법한 자들과 한 패였구나 하는 말을 듣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사53:12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 말씀 중에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이루어질 골고다의 형장을 다녀오신 사람처럼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에 죄가 없으시면서 죄인들을 죽이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정말 죄인들과 함께 죽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마지막 죄인과 함께 죽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인과 동일시하는 것이요, 반드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지나간 사건으로 우리끼리 말하는 것이니 그렇게 심각하지 않지만, 사실이지 보통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죽어가는 사람을 위로하지는 못하지만, 가만 내버려두면 좋을 터인데 비방하고 조롱하고 별소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사람 죽는 것이 무엇이 재미있다고 구경하는 것입니까?  백성의 관원이라고 하면 산헤드린 의원을 말하는데, 그래도 한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 숙연해질 법인데,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칩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눅23:35)고 했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능력도 사용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주고 많은 죄인을 구원하며 섬기고 있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신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신포도주를 주는 것을 조롱하는 행위라고 보다는 사형수로 하여금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주는 것으로 봅니다.  군병들은 오히려 인간다운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죄패를 붙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는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죄패였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때에 대제사장이 이 패를 보고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라고 했지만, 빌라도 총독을 고칠 의사가 없다고 분명히 잘라 말하였습니다.   “내가 쓸 것을 썼노라”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행동을 보면 이것만은 잘한 것입니다. 

그 때에 두 강도도 예수님을 향하여 욕하였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강도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그의 집안, 그의 가정, 그의 생애 거의 다 모르고, 다만 악독한 강도였으며, 지금 몇 시간만 지나면 죽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들의 생애에 대하여 기록된 것 없는데 그를 붙들고 상상하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였고, 지금 사법당국에 붙들려 사형 당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고, 이런 사람이 죽는다고 하여 아쉬워할 것도 없으며, 안타까워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강도짓을 하다 발각되었고,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다가 잡혀온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는 말을 들어보면 단순 강도가 아니라, 살인강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이기에 자기들도 죽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는 사람이요, 죽을 짓을 하였으니 죽는 사람입니다.  변호할 것도 동정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죄라는 것은 크고 작은 것뿐이고,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아니한 것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구원받았으면 다른 사람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저들 살인강도라고 해도 그들이 구원받았으면 하는 것은 그런 사람도 구원받아야 우리도 구원받고,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우리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너는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고, 나는 살아야 할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입니까?  그래도 이런 한계상황에서 이 두 강도는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요, 죽을 사람이 죽는 것이라고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고, 마땅히 죽어갈 사람도 살리시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강도들은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을 향하여 욕을 하였습니다. 마27:44에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자료와 마태, 마가의 자료에서 상이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 마가복음은 두 강도가 욕을 하였고, 그들은 그렇게 욕하다가 죽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두 강도들이 어느 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고 죽은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만 한 강도가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비난하고 욕하였는데, 얼마 후에 한 강도가 회개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한 강도가 비방하였는데, 그의 소리가 너무나 크기에 마치 두 사람이 비방한 것처럼 들렸다는 설도 있는데, 주목할 것은 아닙니다.   두 강도의 이름을 기록한 외경들이 있으나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전설에 따르면 오른 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고, 왼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비방하였다고 합니다. 

달린 강도 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구원받은 강도가 비방하는 죄수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당한 이 십자가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여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구원받은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심적인 움직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 죄를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일생을 평가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원받은 강도는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정확히 보고 있습니다.  이대로 죽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의 회개는 회개하지 않는 다른 강도를 꾸짖는 것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생 죄만 짓고 살아간 사람이 마지막 죽어가면서 한번 더 죄를 짓는 것을 보면서 그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자신이 지금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요,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말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보고 있으며, 예수님을 무죄한 중에 십자가에 달려죽는다고 보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무죄하신 분이 죽고 있다고 말한 사람은 이 강도뿐입니다. 

42말씀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요엘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롬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감히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생각해달라고 합니다.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은 강도가 구한 것처럼 먼 훗날이 아니라, 오늘이라고 하셨고, 나라에 임할 때가 아니라, 바로 낙원이라고 하셨고, 기억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입니다.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기서 ‘낙원’이란 즐거운 동산이라는 말인데, 유대인의 신학에 따르면 죽은 다음 부활을 기다리는 장소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의 품이며, 천국의 다른 이름입니다.  천국을 여러 장소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낙원이란 말은 천국의 다른 이름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길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였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다 완성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은총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한 강도는 흉악한 강도입니다. 그를 사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요, 그의 죽음을 눈여겨볼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흉악한 강도요, 사형시키는 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에 두고 구원받았으니 우리의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인생길에서 주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강도의 회개는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은 가장 순수하였고, 간절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고,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영접해야겠습니다.  주님을 우리의 마음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함께 의논하고, 주님과 함께 생각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주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선한 사람이고, 강도는 죽어 마땅한 사형수요, 그런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복음과는 멀어진 사람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죽어 마땅한 사람인데, 마지막 턱걸이로 구원받았다, 나 같은 죄인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와 주시고, 붙잡아 주셨다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의 이름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은 마지막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 주 예수여, 예수여,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죄가 얼마나 크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크심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죄를 다 씻고, 다 감싸고 덮을 수 있는 그런 큰사랑이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받은 감격을 새롭게 하시고, 확실하게 하시고, 구원받은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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