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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의 떠날 기약 (요 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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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떠날 기약 (요 12:12~13)


(요12:12-13)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1. 독일의 권투 영웅 ‘헨리 마스케’는 90년 독일 통일 후 해묵은 갈등과 경제수준 격차로 반목하던 동독과 서독의 화합에 기여한 불세출의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그가 팝페라의 여왕이라 불리는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에게 자신의 은퇴경기에서 오프닝(Opening)곡을 불러 줄 것을 정중히 의뢰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 브라이트만은 이태리 여행 중에 어느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이태리의 세계적인 성악가인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가 부르는 ‘콘 테 파르티로’(Con Te Partiro, With you, I will go)란 곡을 듣고서 크게 감동합니다. 

그녀는 안드레아 보첼리를 찾아가 함께 노래 불러 줄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 노래가 ‘콘 테 파르티로’(Con Te Partiro)를 수정해서 만든 ‘Time To Say??Goodbye’, ‘안녕이라고 말할 때가 되었어요’란 곡입니다. 

팝페라의 여왕 사라 브라이트만과 시각 장애의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는 헨리 마스케의 은퇴 경기에서 ‘Time To Say??Goodbye’를 열창하게 되는데 헨리 마스케는 안타깝게도 미국의 버질 힐에게 판정패를 당하고 링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처투성이로 링에서 내려오는 헨리 마스케를 향해 2만 2천여명의 관중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기립하여 이 곡 “Time To Say Goodbye”를 합창했고, 헨리 마스케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두 눈이 안보이는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평생 음악에 바치며 노래를 부르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열정이 담긴 목소리와?‘사라 브라이트만’의 천상(天上)의 목소리는 깊은 감동을 넘어 숙연한 마음까지도 들게 하는데 충분한 곡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 노래에 이러한 가사가 있습니다. 

<“Time To Say Goodbye” 안녕이라 말할 시간이에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당신과 함께 하지 못했던 세상, 지금부터 나는 그곳에서 살 거랍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당신과 함께 떠날 거에요. 당신과 함께 그곳에서 살 거에요. 안녕이라고 말할 때가 되었어요.>

(Time To Say Goodbye. Places that I've never seen or experienced with you now. I shall I'll sail 
with you upon ships across the seas. seas that exist no more. It's Time To Say Goodbye.) 

인생은 어느 누구라도 삶의 무대에서 은퇴하며 “Time To Say Goodbye”, ‘안녕이라고 말할 시간이에요.’라는 말로 세상을 작별할 때가 오는 법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광야 40년이 다 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를 출발하여 에돔 국경 지대인 호르산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게 되리라. 이것은 너희 두 사람이 므리바에서 내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니라. 모세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거기서 아론의 제사장복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혀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 돌아가리라.’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을 데리고 호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자 아론이 그 산꼭대기에서 죽었습니다.(민20:22-28)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30일 동안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아론의 옷’은 아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착용해야하는 거룩한 대제사장 의복을 말합니다.(출 28:1-43) 모세가 아론에게서 이 옷을 벗겨 엘르아살에게 입히는 것은 아론의 대제사장직이 그의 아들에게 전수된다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레8:7-9) 

반면 아론의 대제사장 의복을 벗겼다는 것은 그의 사명이 다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 당시 아론의 나이는 83세였고(출 7:7), 죽을 때 나이가 123세였으므로(민33:39) 그가 정확히 출애굽 제 40년 5월 1일에 죽었습니다.(민 33:38) 하나님께서 아론의 죽음을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확실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신들의 조상, 즉 믿음의 조상들은 그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고 믿었습니다.(전 12:7) 

그러므로 자신들이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은 믿음의 조상들이 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결국 아론이 ‘므리바 물’ 사건 당시 혈기에 찬 모세의 행동에 동조한 것 때문에 아쉽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대제사장 옷을 입혀 아론의 최후를 주도하시므로 아론의 죽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죽음이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의 죽음 역시 ‘므리바 물 사건’에서 비켜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새 세대들에게 오직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지켜 행해야만 요단강을 건너가 차지할 땅에서 사는 날이 장구하리라는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이른바 ‘모세의 노래’로 불리는 신명기 32:1-47입니다. 모세가 이 최후의 당부를 마치자 바로 그 날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신명기 32:49-52을 보겠습니다. 

(신32:49-52)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산에 올라 느보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느보 산’(비스가 산 꼭대기) 정상은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최적의 전망대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약 600년만에 그 약속이 바로 눈앞에서 성취되려는 순간에 와있는 곳이었습니다. 출애굽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는 누구보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간절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입성(入城)이 끝내 허락되지 않았고 그 땅을 바라보는 것만 허락되었습니다.(신3:23-29) 

그 일차적 이유는 물론 ‘므리바 물’ 사건(민 20:12) 때 모세가 한 순간의 혈기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론처럼 느보 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론이 죽었을 때는 나라의 지도자였고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국장(國葬) 예식에 따라 30일 동안 애도하는 기간을 갖도록 했었습니다.(민20:29) 

그러나 모세의 죽음에는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장사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서 1:9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천사장 미가엘을 보내어 모세의 시신(屍身)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곳에 장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무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를 위험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죽어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모세의 부활은 엘리야와 더불어 변화산상에 나타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1-4입니다. 

(마17:1-4)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베드로가 감격적으로 목격하므로 모세의 부활을 분명히 확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나이 120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신34: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바를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모세가 ‘므리바 물’ 사건을 돌아보며 너무나 아쉬워 “(신3:25)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신3:26-27)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며 한 번 말씀하신 바를 변개치 아니하셨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그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러므로 인생은 항상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로 부르시기 전에 그들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네 조상, 즉 믿음의 조상에게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죽음 앞두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성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2차 투옥되어 로마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A.D.67),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 6절, “관제(전제,A Drink Offering)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고 했습니다. ‘관제’는 구약 시대 희생 제사에서 포도주를 다 쏟아 붓는 마지막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순교(죽음)를 희생 제사 마지막 의식으로 여기고 남은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산 제물로 온전히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당하기 5년 전인 A.D.62년경에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같은 의지를 밝힌 바 있습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하는 모든 희생적인 봉사위에 자신을 관제로, 즉 순교로써 드린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을 준비가 다 되어있음을, 그리고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the time has come for my departure.) 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죽음’을 ‘출발’(departure), ‘떠남’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 뜻은 ‘선원이 배를 바다로 출항시키기 위해 정박해 놓았던 밧줄을 푼다.’, ‘나그네가 다음날 목적지로 떠나기 위해 자신이 거처했던 장막(tent)을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출발하는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출발’인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그 죽음이 종말로 다가오거나 죽음 다음 세계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는 그간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과의 단절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아쉬움, 그리고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미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모세나 아론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죽음’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것’, 곧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그곳에 돌아가 앞서 간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이며, 새로운 만남의 출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1:21-2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고 했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영광스러운 삶이기 때문에 로마 법정에서 재판이 유리하게 끝나 바울이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옥중에서 풀려난다고 한다면 더욱 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복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은 개인적인 소원도 있지만,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다시 살아서 복음을 전파하고픈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마라톤 경주로 비유한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는 말씀은 마라톤 경주에서 우승했다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는 뜻으로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즉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순간도 사명을 저버리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어떠한 악조건과 힘든 환경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사명을 다 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지역의 교회 성도들로부터 돌아가지 말라는 권고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도들에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것이라는 환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아끼는 마음으로 극구 말렸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24입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3. 이렇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향한 ‘출발’로서의 자신의 ‘죽음’ 앞에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당당하게 확신하며 그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되는 영광스러운 상급을 말합니다. “의의 면류관”은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 믿음을 잃지 아니하고, 그 믿음을 더럽히지 아니하며 의롭게, 깨끗하게 지킨 사람, 그리고 그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자신의 삶을 헌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을 말합니다. 

‘예비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성도들에게 상급으로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의 면류관”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이미 준비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사모하며 고대(苦待)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후서3:8-17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약속을 지키는 데 더디신 분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오래 참으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갑자기 올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천체는 불에 타서 녹아 버릴 것이며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녹아 버릴 텐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천체도 그 열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깨끗한 생활을 하여 평안한 마음으로 그분을 뵙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아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것을 알고 늘 조심하여 죄악의 꾀임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을 굳게 지키십시오.

언제 세상을 떠날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도다!??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남은 세월이 많다고 생각되십니까? 삶의 양, 즉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는 것보다 삶의 질, 삶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6:6)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천년의 갑절을 산다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기쁨을 누리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 초기의 사람들은 거의 천년을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로 인류 최고의 장수를 누렸습니다. 이렇게 천년 가까운 장수를 누릴 때 에녹은 365세, 그 당시 수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36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창세기 5:21-24을 보겠습니다. 

(창5:21-24)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삶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이른바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온 가족이 구원받은 노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6:9입니다.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뜻이 하나되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말씀합니다.

(암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

두 사람의 의견 일치가 없이는 동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일치하는 신앙생활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곧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향한 출발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에 가시는 출발이기도 합니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로 언제라도 하나님 나라로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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