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다 (요 12:20~26)

  • 잡초 잡초
  • 592
  • 0

첨부 1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다 (요 12:20~26) 
 
 
교회력으로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늘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다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은 벳바게라는 마을에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정상으로 오르셨습니다. 유대 순례자들은 이 길로 감람산 정상에 올라서면 두 가지 때문에 늘 기분이 상쾌합니다. 하나는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으로 더위에 지친 몸이 상쾌해 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갑자기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져 마음이 상쾌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분은 상쾌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무너져 내릴 것을 내다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려 나왔습니다. 손에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런데 그 열렬한 환영에도 예수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바로 며칠 뒤에 저들의 환호가 십자가의 고발로 바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찬양하던 그 입술이 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 지르며 저주를 퍼붓는 입술이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리의 왕의 말 대신 보잘 것 없는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왕으로 메시야로 추대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오직 주님만 아셨습니다. 지금 나귀타고 나아가는 길의 끝에 십자가가 있고, 처절한 십자가의 고난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그 발걸음은 무거우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당시 예수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생각을 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고난주간 그 힘든 한 주간을 보내셨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릴 때 종자 씨앗은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나 추수 때 혹은 30배, 혹은 60배, 그리고 혹은 100배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께서 한 알의 밀알 씨앗이 되어 죽어서 수많은 생명들을 새롭게 탄생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한 알의 밀이 종자 씨가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생각 속으로 보다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영광을 보다

본문 요 12:2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께서 이제 저 십자가에 달려 참혹한 죽음을 맞을 때가 온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런 사형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할 죄인이라는 법적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사형을 당해야 할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갖은 모욕을 받으며 발가벗겨 유혈이 낭자할 정도로 매를 맞으셨습니다. 구경나온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를 메고 형장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퍼붓는 저주 속에 양손과 발에 못 박히신 채 십자가에 달려 끔찍한 고통 속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조롱와 모욕과 저주로 얼룩진 수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 속에서 영광을 보신 것입니다. 도대체 이 수치의 십자가 속에서 무슨 영광을 보셨을까요?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마 27:51-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전 안에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1년에 단 한 차례 그것도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이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지만 이제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저 십자가 위에서 죄의 세력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와의 싸움에서 그야말로 KO승을 거둔 영광스런 사건인 것입니다. 마치 복싱선수가 링 위에서 상대방을 보기 좋게 쓰러뜨리고 KO승을 거두고 큰 영광을 얻는 것과 같은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영광을 보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수치와 저주를 볼 때 예수님만이 영광을 보신 것입니다. 

파니 크로스비(Fanny Crosby)여사는 96년의 생애 동안 무려 8000여 찬송을 썼습니다. 이 분은 태어난 지 6 주만에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잃어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귀한 도구를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분은 자기의 평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흑암은 외계의 사물에 어둠을 줄 수 있으나 하늘나라를 향한 나의 소망의 빛을 가리우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나의 시력을 거두어 가신 대신에 나의 영안을 열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일생을 일하도록 하신 것을 나는 믿는다"
이분 역시 주님 주신 영안으로 십자가에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그렇습니다. 우리도 저 십자가에서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남들은 수치와 저주로 볼 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피하고 꺼리는 일일 지라도 그 안에서 영광을 보고 순종하고 충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영안이 열려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죽음을 생각하다

본문 24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죽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도적으로 죽음의 길을 자청하고 나서시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목적이 여느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도 여느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신 목적과 이 세상을 사신 목적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기 위해 태어나셨고, 죽기 위해 생애를 사셨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들도 다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태어난 목적과 삶의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죽음은 어쩔 수 없어서 맞을 뿐입니다. 죽음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어서 따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고자 하신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자 죽으려 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대신 죽으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 이미 이 사랑의 죽음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사랑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대는 살 수 없더라.
하지만 만약 내가 죽는다면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고,
그대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대를 위해서 결코 죽은 적이 없는 이를 그대는 사랑할 수 있고,
그대를 위해서 죽었던 적 없던 이를 위해 그대는 죽을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인간을 위해 하느님이 죽지 않았고,
하느님이 끊임없이 인간을 위해 그 자신을 주지 않았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더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저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으로 잘 알려진 타이타닉호의 침몰 과정에는 숨겨진 감동적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멋진 죽음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 배 1등석에 탔던 사람 가운데 벤자민 구겐하임의 죽음입니다. 이 사람은 미국 철강 재벌이었고, 뉴욕의 유명한 ‘구겐하임 현대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바로 그 구겐하임이다. 배가 침몰할 때 “여자와 아이 우선”이라는 구명보트 승선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구명보트 승선을 사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명조끼조차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던 시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신사답게 가라앉겠다.” 이 사람은 마지막까지 시종과 함께 의자에 앉아 브랜디 한 잔을 마시며 배의 침몰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각색된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배가 침몰할 때 있었던 실화가 있습니다. 밴드 책임자 윌레스는 전도하기 위해 이 배에 승선했습니다. 배의 악장으로 봉사하면서 전도의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불의의 사고로 배가 침몰하는 것입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할 때 자기 악기팀 멤버들을 마지막 까지 격려하면서 찬송을 연주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웰레스는 이 음악을 연주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우리 인생 마지막 우리가 선택하여야 할 분은 주 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그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자기에게도 죽음이 찾아오고 있는 그 순간 자기 죽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돕기 위해 찬송으로 위로하고 말씀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알고 실천합니다. 비록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에도 사랑을 포지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또 죽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사랑의 삶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처럼 사랑의 죽음까지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태어날 생명을 보다

본문 24를 보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면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수많은 생명들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먼 훗날 이 먼 한국 땅에 살아가게 될 우리들이 새롭게 태어날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임금님이 백성에게 꽃씨를 나눠주며 씨를 잘 키워 꽃을 피우면 큰 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한 소녀도 정성을 다해서 씨를 가꿨습니다. 그런데 씨에서 싹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화분에는 벌써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했든데 자기 씨만 아무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화분에는 예쁜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화분만 그냥 흙뿐입니다. 소녀는 상은 고사하고 임금님이 주신 씨를 싹도 틔지 못했다는 생각에 두려워했습니다. 

드디어 임금님이 심사하는 날이 왔습니다. 사람들마다 예쁜 꽃이 핀 화분을 들고서 임금님을 맞고 있는데 이 소녀만 빈 화분을 들고 머리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사람들의 화분을 다 둘러보고는 이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칭찬했습니다. “네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웠구나.” 
사실 임금님은 꽃씨를 삶아서 죽은 것을 나눠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꽃씨에서 싹이 나오지 않자 다른 꽃씨를 구해서 심었습니다. 오직 이 소녀만 정직하게 그대로 가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우화가 말해주듯이 생명이 있는 씨만이 꽃을 피웁니다. 생명이 있는 씨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야만 생명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 외에 누가 죽어도 세상에 생명의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진정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 곁에서도 두 강도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었어도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맺혀진 생명의 열매들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땅에 떨어져 썩어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냥 땅에 떨어져 죽어 희생하면 안 됩니다. 먼저 우리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없으면 그 희생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죽더라도 그 죽음은 무의미한 희생이 되고 맙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맺혀진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근대 한국사를 살펴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1866년 미국 상선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피습을 당했습니다. 이 때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이 땅의 최초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우리 땅을 제대로 밟아보기도 전에 대동강변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가 침몰하는 배에서 내리기 전 가지고 온 성경책을 강변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순교 직전 가지고 온 성경책을 나눠줬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던진 성경을 읽고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가 뿌린 순교의 피가 평양에 교회가 세워지는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전함을 보내서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빌미가 돼서, 1882년 당시 조선과 미국이 통상조약을 맺게 됐습니다. 이 조약으로 미국 사람들이 조선에 와서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결과 1884년 알렌이 의료선교로 한국 선교의 길을 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뒤 이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들이 들어와 본격적인 선교의 역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생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 생명이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땅에 심겨져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생명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 생명을 잇게 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