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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의 자유와 제한 (삼상 9: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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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자유와 제한 (삼상 9:1~10:27) 
 
 
9-12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했던 왕이 세워지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특히 본문은 초대 왕으로 선택된 사울이 어떤 인물인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사람”인 “기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9:1). ‘유력한 사람’이란 ‘부유한 사람’ 혹은 ‘용사’라는 의미입니다. 외모에 대해서는 “준수” 즉, ‘좋다, 훌륭하다’는 말을 두 번 언급했는데, 그 이유는 모든 백성을 자신의 어깨 밑에 둘만큼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2). 사울이 부친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기 위해 두루 다닌 땅은 모두 40km 정도의 거리입니다(3-4). 부지런히 나귀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을 때,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5)고 한 말에서 맡은 일에 성실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효심 지극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근동 지역에서는 존경하는 어른을 방문할 때면 그의 신분에 걸맞은 예물을 준비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7)는 말에서 사울의 예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환의 충고에 귀 기울이고 “네 말이 옳다”(10)고 수용할 만큼 도량도 있었지요. 사무엘과 나눈 국가적 대사를 숙부에게 냉큼 말할 만큼 가볍지 않은 신중함과,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함과, 자신의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 발끈 하지 않을 만큼 참을성과 포용성도 있었습니다(10:16, 21, 27). 이방과 같은 왕을 원했던 백성들이 보기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10:24)을 만큼 “우리의 싸움”(8:20)을 싸우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지요.

한 가지 단점은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이었지요. 당시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던 시대였습니다(3:20).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사무엘을 모를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사울의 사환조차 사무엘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과 사무엘이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는데 어느 성에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6). 사무엘이 사는 성읍의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11)은 사무엘이 언제 산당에서 제사 드리며, 어떤 습관을 가졌는지까지 알고 있었습니다(12-13). 그런데 사울만은 이 모든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오늘날 박지성을 모르는데 축구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라 평가할 수 있을까요? 김연아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피겨 스케이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이처럼, 그 시대에 사무엘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인물로 평가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사울은 암나귀를 찾지 못했을 때 포기하는데요, 인간적으로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지만, ‘신적인 도움’ 혹은 ‘영적인 도움’이라는 측면은 아예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보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인물의 특징을 ‘키’로 언급하는 대상은 이방인들을 제외하면 사울이 유일합니다. 종합해보면 사울은 백성들이 원하고 있는 ‘이방의 왕 같은’ 인물과 꼭 닮은 셈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해서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고 있었지요(14). 이 만남이 우연해 보이지만 성경은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15).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미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16). 우연으로 보였던 그 일이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후에 세상이 창조 원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돌아가도록 하시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은 잘못된 사상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일의 굵직굵직한 일에만 관여하시고 사소한 일상의 일들은 인간이 알아서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암나귀를 잃어버리고 그 나귀를 찾아 헤매는 사소한 일상의 일까지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정을 설립하는 굵직한 일을 이루시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역사상에 일어난 위대한 일들이 사실은 사소한 일에서 출발해서 맺혀진 열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작은 일도 사소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지요.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된 1차적 원인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언제쯤 사무엘에게 보내실지 미리 정하신 일입니다. 2차적인 원인들은 사울의 부친이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 이리 저리 찾아다보니 사무엘의 성읍에 이른 것, 사환이 마침 은 1/4 세겔을 가지고 있어서 사울에게 권했던 것 등이 종합되었지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셨다고 해서, 사울이 갑자기 신비한 기운에 휩싸여 황홀경 속에서 사무엘에게로 인도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00% 당신님께서 정하신 뜻을 이루셨지만, 사울도 100% 자기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행동했지요. 하나님의 섭리는 1차적인 원인인 하나님의 의지와 2차적인 원인인 인간의 의지가 충돌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섭리의 손길로 사울을 인도하여 오신 후에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17). 첫 만남이었지만 사무엘은 사울이 어떤 일을 할 사람인지, 그리고 사울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19). 반면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고서도 알아보지 못하며,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18)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환하게 볼 줄 아는 선견자와 영적인 까막눈의 만남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몇 가지 사실들 때문에 사무엘은 처음부터 소망 있는 영적 인물이었고 사울은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세속적인 인물이라는 편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던 처음에는 하나님의 음성과 사람의 음성을 분별하지도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 같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먼저 자신을 계시해주시고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사무엘 역시 영적 무지 속에 있었겠지요. 사실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님을 계시해 주시기 전에는 영적인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영적 까막눈이요 영적 귀머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왜 사울과 사무엘의 삶의 결말은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다른 것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사울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어떤 사람은 사무엘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이 일차 원인이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무엘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을 당신님의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할 자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사무엘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은혜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울을 당신님의 백성을 통할할 자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사울이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무엘에게는 엘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 것으로 끝났지만, 사울에게는 사무엘의 말 뿐만 아니라 세 가지 징조들을 통해 사무엘의 말이 진실함을 확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셨지요(27; 10:3-6, 9).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점차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하고 더 잘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아간 반면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된 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일에는 관심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왕위를 지키는 일에 집착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어 주셨지만, 사울은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더 사랑했습니다. 사명은 무시하고 주신 축복만 누리려는 욕망에 집착하다가 하나님의 신도 떠나버리고 결국 반미치광이처럼 살다가 그가 물리쳤을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지요.

사울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까막눈이던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명을 확실하게 알려 주셨고, 더 이상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 “새 사람”(10:6)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 그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는 “새 마음”(10:9)을 주셨고 “함께”(10:7)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깊은 소원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로 전환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일생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인해서 애통해 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다만 죽을 때까지 왕좌에 집착하는 모습뿐이었지요.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10:7). 사울에게는 소명과 관계된 일이 발생했을 경우에 소신껏 행할 수 있는 왕으로서의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 다만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10:8)는 한 가지 제한이 있었지요.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는 자유 속에서 선악과라는 제한이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허용되나 하나님 말씀 앞에서 만큼은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할 것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래야만 ‘이방의 왕’과는 다를 수 있지요.

만일 사울이 오직 한 가지를 제한하신 이 말씀 앞에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면, 그에게 주어진 권력과 소유들은 그를 더욱 신속하게 타락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 저주로 변하고 마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사울의 생애는 자기 부인에 실패하는 모습이었음을 앞으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사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아무도 예외 없이 ‘자기를 부인’을 가장 먼저 배우는 인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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