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의 영광(1) (눅 2:8~14)

  • 잡초 잡초
  • 245
  • 0

첨부 1


그리스도의 영광(1) (눅 2:8~14)


영광이란 말은 문법적으로 형용사적 용법으로 쓰이기도 하고 부사적 용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또, 이 단어가 명사적 용법으로 쓰일 때는 명사 중에서도 추상 명사의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 따라서 영광이란 단어는 수많은 의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요 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요 1:1-3).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고 거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요 1:14).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셨습니다. 이 말은 신성에 인성을 입었다는 표현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그의 신성이 마치 걸치고 있던 옷 같은 인성을 뚫고 필요할 때마다 노출될 때가 있었습니다. 16세기 신학자들 사이에 오가는 말 가운데 유한자가 무한자를 포함할 수 없다고 한 바로 그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보여준 그의 영광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Ⅰ. 베들레헴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본문 2장 14절에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신구약에 있어서 역사적인 지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장소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곳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고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역사적 성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역사상(historical)이란 말과 역사적(historic)이란 말은 혼용해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일체의 사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후자는 어떤 사건이 충분한 상징적 의미와 개연성(蓋然性)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베들레헴은 역사적인 곳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구속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그리스도 주(主)라고 했습니다. 강보에 싸인 아이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입니다. 바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표적이 된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Ⅱ. 유년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눅 2:40).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 매년 유월절 행사는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됩니다. 예수님의 나이는 이제 12살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가족들이 돌아갈 때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루 길을 가다가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찾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부모는 예수를 찾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에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년 예수는 성전에서 선생들과 같이 문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1) 예수의 지혜에 놀랐습니다. 
누가복음 2장 47절에 『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 『 기이히 여기더라 』는 말은 예수의 질문과 답변에 대해 계속해서 놀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일찍이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지혜이기 때문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지혜가 곧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장 3절에 『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2) 예수는 성전을 아버지 집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고 성전을 자신의 아버지 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 자신의 신성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존경의 의무를 우선하신 것입니다.

3) 예수는 성장할수록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졌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장할수록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갔다는 말은 그의 신성과 그의 인성의 만족한 인간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메시야이기도 합니다.

Ⅲ. 요단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1)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3-6절에 『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의 말에 백성들은 혹시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심중에 오해했습니다. 이때 요한은 누가복음 3장 16절에 『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9절에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먼저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 손에 키를 들고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7절에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2) 예수께서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누가복음 3장 21-22절에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의 현현하는 장면들이 여러 모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비둘기 같다는 말은 성령의 임재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을 점진적으로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고 하신 것은 예수의 유일무이함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가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함으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만약에 양자론자들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 '지금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문맥상 현재 시제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향한 구속사적 공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도 성자가 그 일을 감당하도록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도 이 일을 시작한 아들에게 하늘문을 여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영광의 시각적 상징이 위에서 내려오는 비둘기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은 세 번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사명자로서의 사역의 시작이란 점에서 세례의 의미는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Ⅳ. 마귀의 도전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의 영광입니다.

1) 물질을 이용한 메시야의 진정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마태복음 4장 3-4절에 『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눅 4:3-4). 

2) 허영심과 공명심을 이용한 메시야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마태복음 4장 6-7절에 『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라고 했습니다(눅 4:9-12). 

3) 메시야의 본질적 순결에 대한 도전입니다. 
마태복음 4장 8-10절에 『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눅 4:5-8). 
시험을 이기신 후에 마귀는 떠나가고 시험에서 승리한 예수를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들었습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동일한 방법으로 시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합니다. 마귀는 동시다발적으로 혹은 설상가상 격으로 우리를 시험해 옵니다. 예수님께 3번씩이나 집요하게 도전하는 마귀의 시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탄의 첫째 시험은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고 했을 때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여 대응했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에 『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고 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해서 대응했습니다. 
신명기 6장 16절에 『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 사탄아 물러가라 』고 하시면서 신명기 6장 13절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는 성경을 인용해서 대응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사탄이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사탄의 의도는 네가 이런 곳에 이러한 상태로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렇게 처참하게 버려두시겠느냐?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지극히 조그마한 떡덩이라도 만들어 보라 그것 정도는 너의 권위에 손상이 가겠느냐는 말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에 대한 공격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는 왕권에 따르는 모든 권세와 영광을 약속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왕권은 수치와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께 수치와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도 왕국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임금에게 잠시 엎드려 경배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예측하건데 사탄의 요구는 엎드리는 부복이 아니라 약간의 무릎을 꿇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탄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경배했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치명적인 손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8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탄은 조금, 약간, 한번, 아무도 모르게, 그것 정도는 괜찮다고 합니다.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성경 한 구절 정도 범하는 것은 괜찮다고 합니다. 한 번쯤은 괜찮다고 합니다. 지극히 조금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를 무너지게 하는 패악(悖惡)입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살전 5:22). 모든 선한 일에 온전해야 합니다(히 13: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가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물욕과 허영심과 본질적 순결성에 도전하는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한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마귀가 떠나가고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드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 『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다같이 찬송가 507장을 찬송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