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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위대한 삶의 순례(15) : 벳바게 (마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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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5) : 벳바게 (마 21:1~9)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이천년 전 예수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 분이 평화의 왕으로 구원의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날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주목을 받은 스타가 있습니다. 나귀 새끼입니다. 

오늘의 본문 2절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언급하고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는 그냥 나귀 새끼만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타신 것은 나귀 새끼였기 때문입니다. 본래 과거 역사에서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나 방문중인 대국의 황제는 잘 생긴 군마를 타고 한 도시에 입성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메시아로 예언된 이 분은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함이 정말이지 신기한 구경꺼리였을 것입니다. 정녕 그분은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한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지도자였습니다.

이 어린 나귀 새끼 입장에서 보면 이 날은 그의 생애 최고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메시아를 태우고 들어오며 듣고 있었던 군중들의 환호성, 박수 갈채는 그의 가슴을 얼마나 설렘으로 들뜨게 했을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리는 감격, 그가 느낀 감격의 본질은 바로 쓰임받는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출발한 장소가 벳바게 마을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예루살렘 동쪽에서 시내로 입성하려면 약 3km 떨어진 베다니 쪽에서 감람산 남쪽 정상에 위치한 마을 벳바게를 지나 감람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벳바게는 "덜 익은 (이른) 무화과의 집"이란 의미인데 이 곳에서 예수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있습니다. 

지금은 엣두아르 마을로 불리우는 곳으로 여기에 예수님 종려주일 입성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본래 12 세기 십자군 시대의 교회 터위에 1883년 프란시스칸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아담한 이 교회당 내부의 전면에는 예수님이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해마다 종려주일이 되면 이 교회에서 출발하여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행렬이 재현됩니다.

자, 그러면이 종려 주일 어린 나귀가 겪은 위대한 체험의 레슨은 무엇 이었을까요?

1. 선택의 체험입니다. 

세상에 그 많은 나귀 중에 나 같이 어린 나귀가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그 무엇보다이 나귀에게 특권이었고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이 어린 나귀가 벳바게 건너편 마을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매어 있었 는지를 정확하게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2 절을보십시오. "이르 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 자신이이 나귀의 궁극적인 주인 되심을 선포하십니다. 이어지는 3 절을보십시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 리라"그리고이 모든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이 어린 나귀가 이렇게 쓰임받을 일이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예정되어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4-5 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 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하라 하였느니라"말씀은 본래 구약 성경 스가랴 9시 9분이 에 기록된 말씀인데 그 기록의 때가 기원전 480-470 년의 일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런 사실을 가르쳐 총체적으로 ''''선택의 교리''''선거 (교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미리 정하시고(예정), 미리 아시고(예지) 그가 사용하실 대상을 선택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이 나귀가 그렇게 선택 될만한 어떤 조건이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적 선택이며 무조건적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다른 말로 '은혜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이렇게 쓰임받을 계획으로 예정되고 선택되어 태어난 것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 날 때 의미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그런 존재이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인생이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이 우연히이 고해 같은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 1:3) 고. 그러면 당신은 깨닫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 이시고 그는 나를 사용하실 놀라운 계획을 만세전부터 정하시고 나를이 땅에 보내셨음을 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오늘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선택의 체험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이 선택의 확신을 갖는 것이 믿음의 승리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벧후 1:10 을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 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 하리라"을 확신하십시오. 선택 그리고 믿음 위에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나귀보다 존귀한 존재 이십니다.


2. 고난의 체험입니다. 

이 날이 어린 나귀는 그러나 얼마나 힘든 여정의 고난을 견디어야만 했을까요? 별로 일도 못해 본이 어린 나귀에게이 날은 생애 최고의 고난의 날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적어도 약 2km 이상의 여정을이 나귀가 소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걸어 보았고 해마다 종려주일이면 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이 길을 걷습 니다만이 여정 벳바게에서 예루살렘 시내까지는 비탈길과 언덕, 그리고 내리막 길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가 이 여정을 예수님을 태운 채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간 것은 참 신통한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수많은 성도들은 믿음의 도상에서 넘어지고 아파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런 체험을 신학에서는 '견인의 과정', 견고한 인내를 시험하는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성화가 이루어지고 우리는 주님이 사용하실만한 대상으로 훈련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나귀라는 동물은 매우 이중적인 이미지를 갖는 동물입니다. 한편으로는 고집이 세고 미련한 이미지를 갖습니다. 그러나 일단 훈련되면 매우 충직하고 지혜로운 동물로 간주되고 그래서 지난 시절 사람들의 교통 수단으로 선호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린 시절만해도 우리가 많이 부른 노래 중에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고추 먹고 맴맴 ~"을 무던히도 자주 불렀습니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김시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 중에 "동자 견려도"라는 유명한 작품이있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동자가 나귀를 맨 줄을 잡아 당기며 개울을 건너게하려고 용을 쓰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나귀는 네 다리에 힘을 준채로 엉덩이를 뒤로 빼고 요지부동입니다. 나귀에게 이런 고집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나귀들은 먼저 고집을 꺽기위한 훈련이 요구될 수있습니다. 어쩌면 많은 경우 성도의 고난은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기에 합당하도록 훈련되기 위한 고난 일 수가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진해서 고집을 꺽고 그 분의 손길에 내 인생을 위탁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예수께서 그 날 어른 나귀를 제껴 두시고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도 거기에있을 법하지 않습니까? 그렇더라도 주님을 모시고가는 길에 여전히 고난은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이기었노라"(요한 16:33) 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귀와 나귀 같은 성도의 고난의 체험의 본질입니다.

3. 영광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 나귀가 이 날 고난의 체험만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간 길은 고난의 길이었지만 동시에 영광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자 사람들은 레드카펫 대신 그들이 입고 있던 겉 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8-9 절을 읽겠습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 이여 찬송 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생 나귀처럼 예수님을 태우고 살면 예수님 고난이 내 고난도 되지만 예수님 영광이 또한 내 영광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시 안나 - 지금 우리를 구하소서!)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평화의 왕을 높이는 축제의 여정에 나귀는 힘도 들었겠지만 얼마나 큰 보람과 긍지를 느꼈겠습니까!

사실 이 광경은 장차 우리가 완성된 천국에 입성할 때 일어 날 일들의 리허설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 7:9-10을보십시오. "이 일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 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

그날은 종려 주일과 비교할 수없는 위대한 스케일의 축제가 될 것입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 모든 백성들 중에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 태우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 모든 할배 나귀, 할매 나귀, 아빠 나귀, 엄마 나귀, 아들 나귀, 딸 나귀, 손자 나귀, 손녀 나귀가 다 나아와 종려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양을 함께 부르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함께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에 축제에 자랑스럽게 참여하기 위해서 아직은 우리에게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그 날 그 영광의 자리에 부끄럼이 없도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고난, 사명의 성취를 위해 걸어야 할 길이 남아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 8:17-18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 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말합니다 고. 

그 고난은 내가 스스로 자초한 죄의 삯으로서의 고난이 아닌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한 고난이어야 합니다. 이런 고난을 우리의 선배들은 '스티 그마' 곧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고난의 상처 (흉터)는 그 날 우리의 영광의 훈장 (성급)이 될 것입니다. 제가 목장 컨퍼런스에서 들려 드리는 이야기를 한 번 더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참전 용사들이 고국 귀환 환영 축제 퍼레이드가 준비되고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런던의 중심가는 사람들의 물결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정해진 시각 영국의 상하원 의원들 그리고 여왕 폐하가 자리를 잡자 개선 군인들이 입장하고 있었습니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한 부대 한 부대가 거리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우렁찬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부대가 중앙 무대가있는 거리로 들어서자 여왕을 위시한 모든 시민들은 기립하여 끝나지 않는 박수와 경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이용사들, 전장에서 부상당한 이들이었습니다.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어떤 이들은 들것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 날의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처 (흉터)는 곧 그들의 훈장 (성급)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 그런 천국의 축제를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리허설하게 될 것입니다. 종려가지 대신에 깃발을 들고 오십시오. 그 날은 우리의 구세주요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왕되신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우리의 예루살렘 호산나 축제가 될 것입니다. 

모든 가족, 목장원 모든 귀빈와 함께 오십시오. 목장 대그룹 축제의 영광을 경험하며 부활하신 주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위대한 명령과 위대한 동역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창립 이래로 한번도 한자리에 모두가 모여 보지 못했던 우리가 다음 주일 모두 함께 모여 천국의 위대한 감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태우고 입장할 우리 모두도 또한 어린 나귀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 역사를 만드는 그 날 거기에 당신은 역사의 증인으로 계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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