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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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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1~10)


하나님은 어느 사람을 선택 할 때에 인간이 사람을 고르는 것만큼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력서를 보고, 또 그 사람의 학력과 가정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의 지난날의 과거를 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그 사람의 외형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에는 인간만큼 그렇게 까다롭지가 않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학력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비록 내 성격이 어떻든, 내 외형이 어떻든,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쓰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지 못할 성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태하거나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도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오늘을 중요하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에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지식이 좀 불완전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성격이 좀 불완전해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이나 우리의 어떤 성품이나 우리의 어떤 인격이나 지식보다도 우리의 변화의 정도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에 변화가 없으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자기 내면의 변화를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내면의 변화를 사모하는 그 심령에 성령님께서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교회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자신 있게 자기의 동업자를 초청해서 데려올 수 있는 곳입니다.  이 교회는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를 데려올 수 있는 곳입니다.  이 교회는 자기에게 제일 불편한 친구를 데려올 수 있는 곳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기쁘고 제일 보람된 일은 어느 날 한 사람을 예배에 데리고 와서 "목사님, 제 친구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느 글에 보니까 어떤 분이 한 사람을 교회에 전도해 와서는 담임목사님께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목사님, 나는 이 분에게 재정적으로 많은 피해를 준 사람입니다.  나는 어쩌면 이 분에게는 정말 얼굴을 들고 나타날 수 없는 그런 죄송한 사람입니다.  내가 부도를 내면서 이 가정도 다 망가뜨려 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분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돈은 못 갚지만 영생을 갚을 수 있으니 우선 나와 함께 교회에 나가십시다!  해서 같이 나왔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힘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앙 이상으로 큰 자원은 없습니다.  신앙 이상으로 인간 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의 문제와 불행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자리에 이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리에 돈과 명예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은 그저 악세사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그 인생의 결과가 언제나 아름답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신앙보다 더 큰 자원은 없습니다.  신앙보다 더 위대한 유산도 없습니다.  여기, 이 교회는 예수님의 영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이 교회는 믿음 없는 불신자들을 불러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면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면 심령의 변화가 있습니다.  여기 이곳에 삶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전에 오신 여러분은 축복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은 그렇게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여느 왕들의 입성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모든 왕들은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입성합니다.  또 군마를 타고 수많은 호위병들과 칼을 찬 병사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입성합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길가에 나온 어린이들과 여인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는 함성을 들으시면서 입성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입성하신 것입니다.  장수들은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고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어린양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입성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너무나도 초라한 입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니까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면서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여기에서 '호산나'라고 하는 말의 원 뜻은 "주여, 여기서 지금 나를 구하소서!" 하는 말입니다.

"주여, 지금, 여기서 나를 구하소서!"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믿음이 강하게 생기기를 바랍니다.
"주여, 지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지금 여기서 나를 도와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진실한 사랑만이 그 삶에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사랑을 받으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다 시들어 가는 꽃들도 하늘의 사랑만 받으면 생기가 살아납니다.  다 죽어 가는 생명들도 하늘의 사랑만 받으면 살아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으로 정복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올 때의 사랑과 갈 때의 사랑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에 불타시기 바랍니다.  사랑만 불타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주여! 지금 여기서 나를 구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한다고 하면서 총칼을 들고, 탱크를 앞세우고 군인을 앞세우고 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조그마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십니다.

"호산나! 호산나!  주여! 지금 여기서 나를 구하시옵소서."
저는 오늘 이 구원의 역사가 우리들 속에 강하게 나타날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생포되는 역사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성전에 들어오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이미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만지심과 치유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구경꾼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건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져주시고 치유해주셔서 거듭나고 변화되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는 피해자다.  나는 결혼의 피해자이고, 나는 시대의 피해자이다.  나는 환경의 피해자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제일 무서운 피해는 자기 습관의 피해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환경이 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피해를 준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나에게 피해를 준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과 그 사건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 습관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식이나 종교적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삶의 해방을 위한 것입니다.  바른 진리를 알면 진리가 자유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을 때 "저 말씀이구나!" 하고 꼭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말씀 한 마디만 주시옵소서.  그러면 내 자녀가 고침을 받고, 내가 고침을 받고, 내가 나음을 얻겠나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자꾸 내가 왜 이런 피해자가 됐느냐?  남편 때문이다, 내 자식 때문이다, 내 환경 때문이다, 시대 때문이다, 정치가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인간의 일차적인 피해는 자기 습관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 그 환경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습관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자신의 습관이나 성질을 근거로 해서 자신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습관의 피해자들이 어떻게 일어설 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정확한 어떤 원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의 습관 그 자체가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습관들이 아닙니다.  습관이 곧 내가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습관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습관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습관을 선천적으로 형성하는 법도 없습니다.  만약에 태어날 때부터 습관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불행한 존재들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의 피해자라고 하는 데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길이 보입니다.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적인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도 일차적인 자기 습관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똑같은 환경에 있어도 어떤 사람은 넉넉히 이기고 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절망하고 무너집니다.  똑같은 사건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그 마음에 여유로움과 평안함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불안해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반응하도록 되어진 자기 습관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습관들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그 습관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잘못된 습관으로부터의 단절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반응했다면 그 습관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제부터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해방되리라.  이 못된 습관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십시오.  못된 습관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십시오.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그리고 자신에게 아주 선포해 버리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입으로만 선포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술을 먹지 않으리라.  이제부터는 내가 거짓된 삶을 살지 않으리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던 것과 같은 잘못된 삶을 살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시 무너지고 넘어집니다.  더러운 곳으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내면으로부터 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쉽게 선언을 하지만 자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선언과 다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못된 습관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행복의 공통 분모가 있을까?  성공의 공통분모가 있을까?  그런 것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조사를 하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가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그들에게는 실패하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는 습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이 하기 싫은 것을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남이 갖지 못한 그런 감정관리 능력이 저들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억누를 수 있는 그런 감정관리 능력이 저들 속에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 환경과 상황 앞에서 억누를 수 있는 감정관리 능력이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돈을 관리하는 것도 좋은 능력입니다.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좋은 능력입니다.  그러나 자기 감정을 관리하는 능력, 이것은 지금 당장 이 시간에 눈을 떠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나에게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 감정을 관리하지 못한다면 그 막대한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아무쪼록 죽고 사는 권세가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아시고 자기 감정을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어 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주위에서 보다 더 행복한 자의 공통분모를 보면 이것은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는 습관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더 큰 사명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보다 더 큰 목적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시간마다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이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외치며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이 저들을 붙들어주시고 채워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실수합니다.  실수를 하지 않고 이 땅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전 세대에도 없었고, 앞으로 오는 세대에도 없습니다.  여기 서 있는 저나 거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이나 모두가 실수 투성이의 사람들입니다.  젊은 시절에 둘이 만나서 한 생애를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같이 살자고 하는 그런 귀한 믿음을 가진 믿음의 가정들도 아내는 남편 앞에서, 남편은 아내 앞에서 수많은 실수를 하면서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완벽한 100점 짜리 인생이 되려고 하지도 말고, 100점 짜리 인생을 만들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100점을 만들려고 하면 더 큰 실패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실수와 실패는 다릅니다.  그러니 까 자주 남의 실수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의식이 내게는 없어져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용서하는 것은 신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십시오.  그래서 남의 나쁜 점을 보는데는 지혜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남의 좋은 점을 보는데는 선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수와 실패는 다릅니다.  우리가 실수를 했다고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번 실수로 그 사람의 전체를 평가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엄청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번 실수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실수가 내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절망하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털고 일어나 더 큰 사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성공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호산나! 호산나! 지금 구하시옵소서"라고 외치며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깔고,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던 그 사람들이 그 후에 어떻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호산나! 호산나!" 하던 그 사람들이 며칠 후에는 돌을 들어 "저 사람을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그렇게 난폭하게 변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람은 대단히 난폭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어난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자기 반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원칙이고 공식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원칙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자연적인 어떤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어난 그 사건에 대한 자기 반응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운 일들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도 사업에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건강한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반응이란 어떤 일이 있을 때 비바람이 칩니다.  눈보라가 칩니다.  그런데 건강한 반응을 하고 있는 생명들은 비바람 속에서도 건강하게 자랍니다.  눈보라 속에서도 오히려 더 든든해집니다.  살아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건강하지 못한 반응을 하고 있는 생명들은 비바람 앞에서 넘어집니다.  눈보라 속에서 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신앙이란 우리 앞에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 건강한 반응을 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가 무슨 도덕적인 큰 죄를 저질렀습니까?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잘못과 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당해야할 만큼 큰 죄였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를 가리켜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욥에게도 시련이 있었습니다.  고통이 있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욥은 자신이 당한 그 모든 일들 앞에서 건강하게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리라!  사람들은 나를 해하려고 해도 하나님은 이것도 선으로 바꿀 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끝없는 자기 선언입니다.  당장 일어난 조그마한 실수, 당장 일어난 눈물의 일 때문에 팔팔 뛰면서 무엇이 안돼서 그렇다, 누구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감정과 신앙은 기가 막히게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과 신앙이 평상시에는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겁고, 즐겁고 기쁘면 그것이 마치 자신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고, 섭섭한 일이 생기면 그 감정이 묘하게 신앙과 구분되면서 드러납니다.  그때에는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신앙이 있는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느냐?"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는 원래부터 신앙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자기 감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자기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면서 주저앉아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누가 보아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실수로 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자기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 시대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어떤 실수와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실수로 내 인생이, 내 기업이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위대한 자기 선언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반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전한 반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반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망의 반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은 용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하고 담대한 사람들입니다.  강하고 담대한 용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가짐입니다.  담대함, 삶에 대한 건강한 반응, 기가 막힌 일을 당해도 이것을 "두고 보리라!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리라!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 내리라!"  이런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에서도 건전한 반응을 할 수 있는 그런 건전한 반응에 대한 자기 성숙, 이것은 신앙의 성숙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해도 내 지혜와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께 잡힌 생명이니 두고 보리라는 확신!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성숙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성숙된 믿음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미치십시오.  하나님의 사명에 미치십시오.  인생에서 참된 행복이 무엇일까요?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미쳐 사는 것입니다.  미쳐 보십시오.  초대교회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세상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밥을 먹어도 예수, 꿈을 꾸어도 예수, 잠을 자도 예수, 길을 걸어가도 예수, 앉아도 예수, 서도 예수, 돈을 벌어도 예수, 잠꼬대도 예수….  이렇게 미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우리가 거기에까지 미칩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 일에 크게 미친 사람들을 크게 증거 합니다.  크게 미친 사람을 크게 씁니다.  미칠 것이 없어서 미치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불행한 비극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도 많고, 해야 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이상으로 귀한 일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일도 없습니다.  큰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미치십시오.  하나님의 일 앞에서 피해가지 마시고 구경꾼이 되지 마십시오.  거룩한 사명 앞에서 도망가지 마시고,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덥석 미쳐버리십시오.  주의 일에 미쳐보리라!  미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면 참 불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대의 특징은 체념이 너무 많습니다.  단념이 너무 많습니다.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몇 가지만 해보면 '그만 두지 뭐'  '다시 하지 뭐.'  낙심이 너무 많습니다.  좌절이 너무 많습니다.  포기가 너무 많습니다.  인생의 지루함이 너무 많습니다.  권태가 너무 많습니다.  불만이 많습니다.  결국은 인생의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생의 활기도 상실했습니다.  행동의 박력도 없어졌습니다.  무엇이나 따분하고 시들하고 흥미가 없고 재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이렇게 되면 정말 큰일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영적 공허감이라고 합니다.  내면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이 내적 공허는 세상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 음식점에 가서 먹고, 내일은 저 음식점에 가서 먹고….  오늘은 이것을 붙들어 보고, 내일은 저것을 붙들어 보고….  오늘은 이 사람을 찾아보고, 내일은 저 사람을 찾아봅니다.  그렇지만 이 내적 공허감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붙드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은 내적 공허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열 사람을 죽입니다.  내면의 공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열 사람을 자꾸 괴롭힙니다.  자기 심령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심령에 지루함과 권태 때문에 남을 자꾸 못살게 굽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속에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주여, 이 체념에서 나를 구하시옵소서.  이 지루함에서 나를 구하시옵소서."

재미있는 것은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한번도 체념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체념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한 번 발작이 시작되면, 물에도 뛰어들고 불에도 뛰어듭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가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소리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오늘 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내면의 공허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그 순간에도 제자들 가운데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 상승에 대한 다툼이었습니다.  그때도 서열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끝까지 따르던 제자들에게서도 일어났습니다.

"주님,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에 가면 누가 높은 사람이 됩니까?"

내가 우편에 내가 좌편에, 제자들에게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의 어머니까지 일어나서 "우리 아들이 높아야 됩니다"라고 치맛바람을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이 치맛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2천년부터 치맛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치맛바람을 잠재우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힘들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높은 자가 되고 싶은 욕망, 내면의 공허에 대한 것보다도 높은 자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아주 쉽고 혁명적이고 간단하게 가르쳤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높은 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나의 좌우에 앉는 것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위해서 예비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업을 일으키기도 하고, 어떤 기업을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말씀은 더 귀합니다.
"나를 알지 못하는 이 땅의 집단들은 권세를 부리는 자들인 줄 착각을 하고, 그래서 다툼과 분쟁을 통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지만,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될 것이다.  종의 가치야말로 이 땅에서 제일 아름답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 가르침은 그때나 지금이나 엄청 혁명적입니다.  위대해 지려면 종이 되라!  종의 혁명, 위대한 자는 종입니다.  위대한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가 이런 종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역사의 주역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사람들을 구합니다.

이 땅에 섬김의 종으로 세상의 새로운 길로 오신 우리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나타나셨습니다.  베다니 마을에 갔습니다.  이 베다니 마을은 죽은 나사로를 살린 마을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군마를 타시고 많은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의 산너머에 아무도 타보지 못한 당나귀 새끼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만약에 동네 사람들이 왜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종려 주일에 한 번도 쓰임 받지 못한 사람들, 아직 하나님 앞에 연약하여 쓰임 받던 사람들, 부족하여 쓰임 받지 못했던 사람들, 하나님의 때만을 기다리던 사람들, 내가 이것을 이루고 나면, 이것을 하고 나면 하면서 자꾸 미루기만 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 모습 그대로 그들을 풀어놓으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어린 나귀 새끼가 예수님을 등에 태웠습니다.  자신의 등에 예수님을 태웠더니 두고두고 자신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자신은 그저 주를 위해서 한 번 쓰임을 받았을 뿐인데 자신의 이야기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쓰임을 받는 존재가 되십시오.  주여, 나를 쓰시옵소서.  이 생명을 쓰시옵소서.  이 기업을 쓰시옵소서.  우리 부부를 쓰시옵소서.  이 손을 쓰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 나귀의 기쁨은 자신의 등에 예수님을 태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는 것이 어린 나귀의 존재 이유요, 기쁨이었습니다.  나귀 새끼가 잘 나서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며 겉옷을 깔고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등에 태우고, 주님께로부터 쓰임을 받았더니 자신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된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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