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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귀 위에 타신 주님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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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위에 타신 주님 (마 21:1~11)


오늘 본문에 앞서는 20:29절에 보면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일행과 함께 여리고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라고 합니다. 여리고나 감람산이나 벳바게는 모두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가까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동문을 통해 들어오셨다고 봅니다. 유대교의 전통은 메시야가 감람산에 이르러 동문으로 들어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근거로 스가랴는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슥14:1-4)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예언을 이루시려는 듯, 자신을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로 공표하시고 인식시키시려는 듯 감람산을 거쳐 동문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벳바게에서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게 하시고는 새끼 나귀 위에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본문 2-10). 이 일과 연관하여 상기할만한 옛 일이 있습니다.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졌을 때 그의 아들 중 솔로몬보다 나이 많은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기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들을 준비하고 군사령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지를 받아 거사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왕상1:1, 5-10). 그러나 그 사실을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에게 알렸고 밧세바는 다윗에게 고하였습니다(왕상1:11-19). 

다윗은 아도니야의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등을 불러 아도니야를 따르지 않은 자기의 모든 신하들을 대동하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우며 그가 정통성 있게 자기의 왕위를 계승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임을 선포하게 했습니다(왕상1:32-35). 그때 다윗은 신하들로 하여금 솔로몬을 자기 노새에 태우고 가게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으로 하여금 노새를 타고 가게 한 것(왕상1:33, 38, 44)이 다윗 가문의 정통성 있는 왕임을 밝히는 것이었듯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신 것은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 참 왕이심을 공포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기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신 일 또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바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봅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선지자의 말이라 한 것을 우리는 슥9:9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시온 딸”이란 예루살렘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본문 8절). 이것은 승전하고 돌아온 왕이나 장군들이 시가행진을 할 때 그들을 환영하는 방식이었습니다(예: 왕하9:13). 또 예수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는 소리 높여 말하기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했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말로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시118:25-26을 상기하며 연호하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하기 때문입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향해 외치기를 “이제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들의 왕이며 메시야로 인정했음을 뜻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군중이 얼마나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보여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그의 겸손과도 관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종종 말을 전쟁과 힘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에 연관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나귀 위에 타심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힘을 쥔 세상의 군왕으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나라들과 전혀 다른 나라의 왕,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예루살렘의 군중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어긋나자 쉽게 돌변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 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위에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이 그의 겸손을 또한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겸손을 단순히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일반적인 겸손이 아니라 보다 신학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의 겸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2:6-8에서 한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즉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과 불순종의 죄에 빠지고 죽음에 이르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본래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비우시고 사람같이, 종의 형체로 낮추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그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귀 위에 타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스스로를 낮추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나귀 위에 타신 예수님의 입성과 사람들의 연호와 환영으로 온 성이 소란하여졌고 “이는 누구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본문 10절). 그러자 무리가 말하기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했습니다(본문 11절).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본문의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리라는 선지자의 말이 이루어졌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 했던 헤롯 때문에 요셉은 그의 아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에 피난 가있었습니다. 그 헤롯이 죽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했습니다(마2:19-20). 

그래서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마2:21). 그러나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를 이어 유대의 임금이 된 소식을 듣고는 거기로 가기를 원치 않고 다시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았습니다(마2:22-23). 이 사실 또한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다고 일찍이 본문의 기자는 쓴 바 있습니다(마2:23).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을 전하는 이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분명한 의도를 가지시고 나귀 위에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예루살렘을 드나드신 예수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확실하게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왕이시며 구세주로 만민 앞에 선언하시고 공포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임명한 왕이 아닌 사람이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는 것은 그 자신이나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명백히 선언하시고 공포하신 대로 그를 우리의 참 왕이시며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2:6-8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설명한 후 계속해서 쓰기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우리의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의 손에 종려나무 가지는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왕이요 구원자로 환영했던 예루살렘의 군중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시오 구원자로 믿고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못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 그들처럼 예수님을 배신하는 일이 없도록 그가 우리의 왕이시고 구원자이신 의미를 바로 깨닫고 그에 대한 굳건한 믿음 위에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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