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권고 받는 날 (눅 19:28~44)

  • 잡초 잡초
  • 222
  • 0

첨부 1


권고 받는 날 (눅 19:28~44)
  

성경에 예수님께서 우신 장면이 몇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장면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우신 통곡이었는데, 41절로 44절에 기록하기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던 이유는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거기 살던 성민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미래의 한 날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지금 예언하신 일은 나중에 주후 70년에 이르러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토성"즉 성 밖에 성과 같은 높이의 토성을 또 쌓아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그 안에 있던 모든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그처럼 비극적인 멸망을 당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그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그 눈이 어두워져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끝에서도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고 그 이유를 재차 명백히 밝히셨는데, 여기 "권고"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는 '방문(visitation)'이란 뜻입니다.
즉 그들은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까지 찾아오셔서 그들과 함께 사셨던 '초림'의 기간 동안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바로 그것이 예루살렘의 멸망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과연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오늘날"꼭 볼 줄 알아야 할 '평화의 왕', 우리에게 방문해 주셔서 마음 문을 두드려 주고 계시는 "권고 받는 날"이 아직은 계속될 동안 반드시 깨닫고 영접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이십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극심한 수난을 받으실 마지막 한 주간을 시작하실 즈음에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신 사건 바로 앞에서 당신에 대하여 자증하고 계시는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사람이 섬기기 이전부터 이미 스스로 '만유의 주'이신 분이십니다.

본문 28절로부터 35절에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였습니다.
"벳바게"는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의 동쪽 비탈 쪽으로 약 3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던 동네였습니다.
거기까지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제자 둘을 보내시며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는 보행으로 잘 걸어오시다가 갑자기 다리가 아파지셔서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반드시 "나귀새끼"를 타셔야만 할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바로 구약 스가랴 9장 9절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는 "나귀새끼"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통의 경우에 왕은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백성들 앞에 등장하는 것이었지만 메시아는 나귀새끼를 타신 '겸손의 왕'으로 도래하실 것이라는 예언이었고,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을 그대로 성취시킴으로써 당신이 바로 그렇게 오시리라고 예언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명백히 자증하며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나귀새끼를 마련하는 방법은 상당히 유별나고 의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건너 마을에 가서 매여 있는 나귀 새끼, 그것도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신품' 나귀새끼를 보게 되면 다짜고짜 그냥 풀어서 끌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묻거나 뭐라고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만 하라고, 무슨 암호 같은 말씀 하나를 가르쳐 주시며 제자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 보니 정말 그런 나귀새끼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그냥 풀어 오려니까 당연히 "그 임자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저 예수님께서 시키신 그대로 "주가 쓰시겠다"라고 한 마디만 해 주고는 그것을 끌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나귀의 임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기 "임자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은 나귀새끼 한 마리를 여러 사람이 공유하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이 가난한 자들이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예수님께서 쓰실 일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만 듣고서도 기꺼이 자기네들의 나귀를 예수님께 제공해 드렸던 것입니다.

보통 생각에는 그 나귀새끼 임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일만 칭찬하고 끝나기 쉽습니다.
부자도 아니면서 그 귀중한 나귀새끼를 그저 '주님께서 쓰실 일이 있다.'라는 간단한 말 한 마디만 듣고 그대로 내주었으니, 실제로 그것은 모범적인 봉사요 충성스런 마음의 본보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귀새끼 임자들보다도 이런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시켜 가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이 사건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의 멀쩡한 나귀새끼를 그냥 풀어 오라고 지시하시면서 그저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전 허락을 받고 풀어 오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을 쓰듯이 그냥 풀어 오라고 하셨고, 만약 누가 뭐라고 하거든 "이것은 '주인'이 쓰시려는 것이다."라고만 말해 주면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이것은 도저히 상식에 맞지 않고 예의도 아닐 뿐 아니라, 사실 뻔뻔스러운 일이며 욕먹기 딱 좋은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있어서만은 그것이 결코 비상식적이거나 도리에 어긋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주'이신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주인' 혹은 '임자'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야말로 만유의 주인이시요 만물의 소유주이신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남의 나귀새끼를 억지로 빼앗아 쓰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 나귀새끼의 진짜 주인도 역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이고, 그 나귀 임자들은 예수님을 정말 자기네들의 주님으로 믿는 자들이었던 까닭에 그처럼 이상하게 들리는 요구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당연한 듯이 순종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것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 당신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나귀 임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께서는 만유의 주이심을 먼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순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팬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받들고 존경했던 까닭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주로 모시고 섬기라고 명령을 내리실 수 있게 되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부르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스스로 주가 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만유의 소유주'이요 '모든 사람의 생명주'라고 선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자격이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참 신이신 하나님만이 그처럼 당당하게 선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유일하게 바로 그렇게 당신 자신을 선포하신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말씀이 되셔서 천지 창조에 성부 하나님과 동역하심으로써 실로 '만유의 주'가 되신 유일하신 주님이심을 꼭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이 믿기 이전부터 이미 스스로 '메시아 왕'이신 분이십니다.

36절 이하 40절 말씀에 "36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보여 주지 않으셨던 특이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길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펴서 길바닥에 깔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위를 나귀를 타고 지나가셨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또한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그것을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공생애의 사역을 해 오시는 동안에 엄금하신 일들이었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고도 다른 데 가서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기미만 보이면 곧 자리를 피하시고 아예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떠나 버리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는 당신을 이처럼 왕을 맞이하듯이 열광적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의 환영 행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처럼 예수님을 환영하는 모습은 그 하나하나가 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모습을 그대로 성취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그처럼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려던' 예수님이셨지만,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시점에서는 당신이 곧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을 확증하시고 선포하심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그 메시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입성 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무리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예수님을 찬양하며 환영했습니다.
이 표현 역시 '오실 메시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메시아는 그 백성을 속박에서 구원하실 능력 있는 군주와 같으신 분이신 까닭에 또한 '왕'으로 불렸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대리자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즉 전체적으로 이 표현은 곧 '메시아는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백성을 구원하실 왕'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무리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면서 환영하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습니다.
그들은 우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백성들이 그렇게 흥분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식의 분위기에 휩싸이면 로마 군인들이 개입하여 정치적 혼란 사태를 유발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일축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외치고 있는 이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리면, 돌들이 대신 나서서 그 사실을 선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 사실은 진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구원의 '왕'이시란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 어느 누구도 감추어 둘 수 없는, 아니 하나님께서는 만약 사람들이 입을 다문다면 돌들까지라도 사용하셔서 꼭 선포하지 않으실 수 없는 진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스스로 '메시아 왕' 즉 '구원의 주권자' 되신 분이셨습니다.
이날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를 외친 백성들 중에는 나중에 가서는 예수님께로부터 돌아서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찬양하며 맞이할 때에 엉뚱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맞이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메시아를 잘못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끼쳤습니까?
어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스스로 메시아이시며 왕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께서 이미 이 땅에 강림하실 때부터, 아니 만세전부터 스스로 '구원주'이셨던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계셨던 까닭에, 당신을 향하여 왕이라고 선포하는 그 소리는 돌들까지라도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없는 진리라고, 당신의 '메시아 왕' 되심을 자증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까지도 탄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옛날 클린턴 대통령은 그렇게 경제 정책을 잘 해내고 있었는데도 사생활 문제 때문에 탄핵을 당했었습니다.
소위 '허리 아래의 일은 정치하는 자리에서는 논하지 않는다.'라는 우리나라의 정치 풍토에 비해 보면 참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대통령까지도 국정 수행을 잘 못한다든지 사생활에 비리만 있어도 탄핵할 수 있는 이런 민주정치에 익숙해진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까지도 감히 그런 식으로 대하려 합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의 논리에 부합되지 않아 보이면, 자기의 요구하는 바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면, 그런 신은 언제든지 버리고 다른 신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식으로 소위 종교 생활을 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까지 사람의 기분과 생각에 좌지우지되는 존재로 전락시키려 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교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스타가 되거나, 사람의 후원 때문에 왕이 되거나, 사람의 존경에 떠받들려서 무슨 '4대 성인' 중의 하나가 되신 분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스스로 메시아가 되셨으며 유일하신 '왕 중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에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되신 것도 아닙니다.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고 충성스럽게 섬기는 직분자들이 많아서 예수님께서도 '교회의 머리'라는 높은 자리에 앉게 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 해서 예수님이 원래 성자이시면서도 화육하신 메시아로 증명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에 기독교인이 단 한 명도 없다손 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참 메시아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라는 사실에는 아무 변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만약 '사람'들이 다 부인하면 '돌'들이 대신 나서서라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 사실이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당신께서 스스로 화육강세하심으로써 명백히 자증하신 이 사실, '예수님은 곧 유일하신 구세주이시며 실로 왕 중의 왕이심'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며 세상을 향하여 외쳐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인본주의 종교'는 '사람 자신이 생각해 내거나 만들어 낸 신'을 스스로 섬깁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의 종교입니까?
사람이 스스로 도를 닦고 수도를 거쳐서 무슨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사람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몸부림치고 갈등과 고행을 거쳐서 점점 더 선행을 행하는 가운데 '종교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과연 올라가봐야 얼마나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그런 식으로 찾게 되는 신이란 결코 사람보다 나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다수가 투표하고 위임하거나 사람의 지식으로 증명하고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신이 되는 것이라면, 그런 신은 결코 사람 위에 있을 수 없고, 결코 절대자라고 불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뽑아서 세우는 대통령이 결국은 사람에 불과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 믿어지는 신이란 실상은 사람과 같은 수준에 있는 존재요 사람이 창작해 낸 우상에 불과한 것이며, 바로 그런 까닭에 '사람에서부터 출발하는 인본주의 종교'는 자연히 '저급한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본주의 종교'는 '스스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조건들 이전에 하나님은 이미, 영원 전부터 스스로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존하심으로써 참 신이 되시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 신앙을 성립시켜 주는 절대전제요 기정사실이며 연역적인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화육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스스로 성자이셨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그 발에 붓고 엎드려 절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만백성의 구세주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인정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주'이시며 '왕'이 되심을 선언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그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기선포'요 그 얼마나 위대한 '성자의 자증'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당신을 끝까지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자께서 '임마누엘'이 되셔서 '저희 가운데' 계시기까지 하시면서 초청해 주시는데도 끝까지 거부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진실로 안타까워하시며 불쌍히 여기신 눈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한 그처럼 '권고 받는 날'에 당신을 믿지 아니하면 결국 당신께서 이제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날에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는' 무서운 저주의 영벌을 당하게 되고야 말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맞이하게 되는 '수난 주간'은 실로 아직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방문'해 주시고 더욱이 우리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시는 '권고 받는 때'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처럼 초림 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셨지만 '두 번째 방문' 곧 재림 때에 가서는 입장이 완전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바로 끝까지 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불신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그러나 이미 기회는 다 지나가 버린 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직은 '은혜 받을 기회'가 주어진, 아직은 '주님의 초림의 시대'인 '오늘날'에 놀랍고도 위대하신 자증을 통하여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요 '왕이신 메시아'로 믿고 영접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구원의 길을 따르며 저 천국에서 영생의 잔치에 다 함께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