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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1) (요 16: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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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1) (요 16:23~24)


I. 내 삶이 아플 때
  
어릴 때 나뭇가지를 들고 전쟁 놀이를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안 일도 숙제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다가 한 아이 손에 가시가 박힙니다. 그러면 아이는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달려갑니다. “엄마, 아파요. 가시가 박혔어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삶에 아픔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정공동체에 민족공동체에 역사전체에 고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달려들어가야 할 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만날 때 마다 달려갈 품이 있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품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삶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달려갈 때마다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품어주시는 자비로우신 그 분의 품, 역사의 운행자가 되시며 만왕의 왕되신 아버지의 품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박대했지만 언제나 박대하시지 않는 아버지의 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싼 삶의 상황이 어려워져만 갈 때에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입니까? 집안이 기울어져 갈 때에 사업이 어려워 질 때에 직장생활이 불안할 때에 내 앞 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에 세상 사람들은 이 삶의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갑니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입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일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태도입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입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일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탓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혹자들은 문제를 덮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문제를 부인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가면을 쓴체 마치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삶의 뒷골목에서는 마냥 불안해하고 공포를 더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문제로부터 도피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어 보기도 하고 술에 몸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 어떤 방법도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들이 이 땅을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난관과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이런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있습니다. 직면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정면돌파하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상황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에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제목이 있을 뿐입니다.

TV프로 가운데 동물의 왕국이란 프로가 있습니다. 동물들이 떼를 지어서 싸움을 하고 그 중 한놈이 아주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상처를 안고 동굴 속으로 숨어 들었다가 적들이 물러간 다음, 아침 햇살이 밝아오면 굴속의 이 동물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상처를 햇빛에 노출시킵니다. 햇빛에는 묘하게도 그 상처를 치료하는 능력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세상 살아가다보면 육체적인 상처 때문에 아파서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고 받은 상처 때문에 찢겨진 마음으로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아픔 때문에, 환경적인 좌절 때문에 몸부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한 마리 동물이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햇빛을 쬐듯이 치료하는 광선, 의의 태양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치료하는 능력앞에 우리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주십니다. 성령의 능력의 기름을 발라 고쳐주십니다. 


II. 기도할때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첫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의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는 기도하는 내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잘못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의 부족과 연약함을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순종했던 나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우리 자녀들이 속을 썩여서 기도하다보면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속썩이던 자식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신랑되신 우리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얼마나 순결하지 못한 신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업문제를 놓고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의 도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도록 해 줍니다. 신앙인의 가장 위대한 축복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세워줍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줍니다. 하늘문을 열어 줍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선 나부터 변화시킵니다.

둘째,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문제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역사하실 기회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나를 향해 역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 문제속에 하나님이 간섭하시도록 문을 여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면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큰 손을 펼치십니다. 

셋째, 기도는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부여해 줍니다. 

물이 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영을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려운 것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풀 수 있는 실력 없음이 문제입니다. 이때 기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풀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땅의 고아의 아버지, 기도의 능력자로 알려진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기도할 때마다 쉽게 응답해주시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왜냐하면 금방 응답하셨으면 내가 기도를 쉬었을텐데, 하나님께서 내게 응답해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는 기도하고 기도했으며 또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나는 기도를 통하여 기도하는 성품을 얻게 되었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너무나도 쉽게 문제를 푸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넷째,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 기도는 찬송을 가져다 줍니다.

찬송은 가장 신령한 차원의 기도요 곡조가 붙은 기도입니다. 어떤 종교는 하루종일 중얼중얼 염불만 외워도 됩니다. 어떤 종교는 뜻도 의미도 모르고 절만하면 됩니다. 

세계 수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에만 찬양이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눈을 만든자가 보지 않으랴. 귀를 만든자가 듣지 않으랴.”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필요했고 미켈란젤로가 필요했습니다.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헨델이 필요했고 하이든이 필요했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를 고발하는 한 상소문에는 당시 예수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정한 날 정한 시간에 모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마쳤다.” 이 사람들이 찬양하던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때는 로마에 황혼의 그림자가 덮이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술취함과 방탕과 섹스 등 지나친 쾌락이 당대의 가치관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먹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목구멍에 손을 넣어 음식을 토해내고 다시 맛있는 음식을 집어넣고 부른 배로 호모섹스를 즐기며 살던 바로 그 시대였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순간이 있는가하면 즐거움의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 기도를 잊지 않듯이 즐거움의 순간에 찬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III. 이 날이나 그 날이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오늘의 본문은 ‘그 날에는’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그 날이 언제인가 알기전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 상황 바로 “이 날”이 언제인가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목전에 두시고 제자들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금방 우리는 수심에 가득찬 제자들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을 대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자들을 못내 슬픔으로 몰아갔습니다.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스승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 주면서도 막을 길이 없는 자신들의 나약함과 무능함이 한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걸고 그를 믿고 따라다녔는데 모든 기대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허탈감이 엄습해왔습니다. 주님이 떠나고 난 다음 어떤 핍박의 세력이 몰려올지 모르는 커다란 공포감이 저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들려주신 말씀!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은 이런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고별설교요, 위로의 말씀이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이었고, 그 날은 하나님의 영광의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슬픔의 날이요, 그 날은 기쁨의 날입니다. 
이 날은 고난의 날이요 그 날은 영광의 날입니다.
이 날은 주님이 잡혀 죽으시는 날이요, 그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록 내가 너희들 곁을 떠나 없을 지라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즉시 시행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슬픔의 날에도 기도할 수 있고 기쁨의 날에도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기도할 수 있고 영광의 자리에서도 기도해야 한다하는 주님의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면 내가 이루겠다는데 왜 불안해 하느냐? 기도는 능력과 기적을 가져다 줄 터인데 왜 낙심하며 허탈해 하느냐?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 이처럼 주님은 상심된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설교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곁을 떠나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근심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 곁을 떠나지만 너희가 기도할 때에 너희 기도와 내가 함께 할 것이다. 너희 기도를 통하여 나는 너희를 붙들고 있을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구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적어도 열 일곱가지 이상이 나오는데 신약 성경에서만도 열 한가지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어휘 부족으로 이 모든 동사를 ‘기도하다. 구하다’라는 한가지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단어 몇을 찾아봅니다.

1. 데오마이 (δεομαι)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자라는 부분을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성령의 기름이 떨어졌나이다. 기름을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했다면 데오마이입니다. 

2. 디오코 (διωκω)는 “이루어질 일을 재촉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이 백성을 회복하실 그 날이 언제 입니까? 속히 내 백성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기도했다면 디오코입니다.

3. 재태오 (ζητεω)라는 말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주여, 첫 사랑을 잃어버렸나이다. 찾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재태오입니다. 

4. 유코마이 (ευχομαι)는 “묻다, 문안하다”라는 뜻이고,

5. 에로타오 (ερωταω)는 “의논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어디로 갈까요, 무엇을 할까요.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 물었다면 에로타오입니다. 

6. 마지막으로 아이테오 (αιτεω)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별 설교에서 일곱 번 등장하는 구하라는 말은 아이테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강요하다, 탄원하다, 떼를 쓰다”라는 말입니다. 어린자녀가 아버지께 떼를 쓰듯 간청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애원하는 차원을 말합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 위급할 때 소리쳐 부르짖는 “자아크”, 기쁠때나 슬플 때 소리내어 엉엉우는 “라나”라는 말이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낸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여기에 찾는다고 하는 “아락”이란 말이 모두 “아이테오”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순서를 밟아 차근차근히 찾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광적으로 허덕이면서 소리를 지르며 찾는 것을 말합니다. 사슴은 원래 그 자태부터 신사처럼 생겨 평상시에는 점잖고 조용해서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을 때는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어 울부짖기 시작한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데에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당장 영혼의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생각은 시냇물, 생명수 뿐입니다. 아지랑이를 봐도 물로 보이고 바람소리를 들어도 물소리로 들립니다. 시원한 물, 생기를 주는 물이 필요했습니다. 무덥고 건조한 중동지방에서 물을 찾아 이리뛰고 저리뛰는 목마른 사슴 한 마리, 물을 마시지 못해 혓바닥을 내밀고 헉헉거리는 그 모습이 “아락”이요, “아이테오”입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할 수 없나이다. 부러진 환도뼈를 질질 끌면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애원하는 야곱의 기도가 오늘 이 민족가운데, 오늘 한국교회가운데, 오늘 이땅을 살아가는 가정들 마다에, 오늘 이땅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서 터져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죽으면 죽으리라! 외쳤던 에스더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담대한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IV. 우리의 상황 :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인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여러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기도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기도가 없이도 이 험악한 세상에서 과연 정결한 영혼으로 승리하며 살수 있더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도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진흙 밭을 뒹구는 한 마리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지요. 구원받은 성도라도 날마다 웃고만 살 수는 없는 상처투성이의 인생임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더란 말입니까? 낙심과 상심, 허탈과 공포, 불안과 착잡함. 이 제자들의 모습은 곧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질병과 사고, 배신과 기만, 참을 수 없는 울분과 억울함, 바로 살아보리라 다짐했던 결심들이 허무하게 무너져가는 영적인 실패와 타락, 큰 일에 당황하고 작은일에 번민하는 인생의 허약함. 이 어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인생의 살벌한 경쟁대열에서 낙오자가 되어 이리저리 밀리고 있다고 느낄 때 겪어야하는 수치감과 패배감은 또 어떻게 치유될 수가 있었습니까? 한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저들이 어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권면 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할지라” 하늘 아버지 앞에 매달려 떼를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라! 낙심중에 있는 제자들이여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어 주겠다. 즉시 시행하겠다. 우리 주님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의 신학자 E.M. Bounds의 말처럼 “오늘 교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프로그램, 보다 좋은 장비, 보다 체계적인 조직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쓰실 수 있는 사람, 기도에 동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V. 무엇이든지의 특권 

오늘 본문은 기도에 관한 교훈을 하는 가운데 대단히 독특한 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을 때 사실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기도의 본질을 깨뜨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언제나 기도에는 기도하는 바른 정신이 있고 바른 자세가 있는 것이지요. 기도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과 형식이 있는 것입니다. 정욕을 위해 구하는 기도는 구해도 얻지 못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진실한 고백없이 어찌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나 마음 내키는데로 구하는 태도는 성경 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든지 구하는 이 기도는 기도의 원칙과 정신을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기도는 분명 좋은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요? 무엇이든지라는 이 한마디 단어속에 지금 상심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커다란 위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생의 큰 문제에 부딪쳐 본 사람은 기도의 논리나 질서보다 더 큰 무엇이 있음을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떼를 쓰는 아이는 논리나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동안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 은총을 더듬어 보며 감사하며 주님의 향기로운 이름을 부르며 그 분과 대화하는 아름다운 기도의 그 멋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찢겨진 가슴을 안고 주님앞에 나왔을 때에는 그저 흐느껴 울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깊은 상처를 받아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잃을 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죽은 친구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우리 주님은 미사여구를 쓰지 않았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만물이 약동하는 새봄입니다. 저기 한 그루 나무도 움을 키우고 있건만 사랑하는 나의 친구 나사로는 죽음의 옷을 입고 여기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버지여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흐느껴 울며 주님께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며 “나사로야 일어나라!” 절규하며 외치셨습니다. 무너져 가는 사업을 붙들고 몸부림해 보신 경험이 있었습니까? 무서운 공포와 불안에 휘말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요? 이 얼마나 기도의 자유를 주는 말씀입니까? “무엇이든지” 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마음껏 주님앞에 부르짖어 아뢸 수 있는 “무엇이든지”의 권세, “무엇이든지의 특권”을 여러분 알고 살아가십니까? 

우리민족은 지금 전에없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무서운 영적인 침체와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학박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큰 교회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죠지 뮬러와 같은 기도의 거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기도하는 정치가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현실의 필요는 끝이 없는데 자본은 고갈되어져만 가고 있습니까? 나는 한없이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앞길이 꽉꽉 막혀 있습니까? 

저는 군대 교관시절 훈련병들이 사격을 하는 시간이면 사격지도요원으로 파견을 받곤 했습니다. 총을 쏘다가 뭐가 잘못되면 오른발을 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총을 한참 엎드려 쏘다가 오른발을 드는 훈련병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방아쇠를 당기는데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서 보았더니 자물쇠를 잠궈 놓고 방아쇠를 당기니 총알이 나갈 수가 없었지요. 자물쇠를 살짝 풀어 주었더니 힘차게도 총알이 앞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곤지암을 지나 양평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소망교회 기도원이 있습니다. 기도원 길목에 들어서면 조그만한 열쇠 공장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 건물 벽에 건물만큼이나 크게 보이는 표어가 눈에 띕니다. 

God is the Key!  God is the Key! 하나님은 열쇠이시다. 

여러분의 인생에 무엇이 잠겨져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무엇이 잠겨 있습니까?
가정에 무엇이 잠겨 있습니까?
사업에 무엇이 잠겨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잠겨진 모든 것을 열 수 있습니다. 
God is the Key! God is the Key!
하나님은 열쇠이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주께서 열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포기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절망하십니까?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가면을 쓴체 왜 당신의 문제를 숨기려 하십니까? 어디로 도피해 버리려고 하십니까? 이제 접어두었던 기도의 제목을 다시 펼치기로 하십시다. 덮어두었던 성경책을 다시 펼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기로 하십시다.  길이 막혔다고 절망하지 말고 하늘 문을 두들겨 보기로 하십시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주님!
그분 앞에 당신의 가슴을 열어제치고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요. 주께서 들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가장 멋진 응답을 하실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요!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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