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제사장의 연약함 (히 5:1~10)

  • 잡초 잡초
  • 152
  • 0

첨부 1


제사장의 연약함 (히 5:1~10)


오래전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민주주의의 모순이었습니다. 제가 늘 이런 유식한 책만 읽은 건 아닙니다. 007같은 소설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민주주의에는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씨앗이 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민주주의 사회가 처음에는 자유를 보장하고 인권을 보장하면서 시작하는데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악용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공공의 유익을 헤치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이 반발해서 범죄자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과 시민의 자유를 억제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처음에는 민주주의로 자유로운 사회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시민의 자유를 통제하는 경찰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파괴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도 내재적인 모순이 존재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이슈요 동시에 윤리적인 이슈인데 이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비판하고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문제가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기독교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사람들을 볶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어패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엄연한 복음의 진리이지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고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가 의원이 필요하다 하듯이 의인은 예수님이 필요 없고 죄인이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이보다 좋은 소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순은 이와 같은 복음의 진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으로 남으려는 핑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허물을 변명하는 구실이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냐. 예수님은 결코 죄를 장려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에 더 가까이 남는다는 구실로 죄인으로 여전히 남을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도 모순이 있는데 지난 이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보면 기독교인들은 율법주의와 은혜주의 사이를 늘 왕래했습니다. 시계추처럼.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윤리성이 땅에 떨어질 때쯤 되면 율법주의를 향해 갔다가 바리새인으로 변해 버리면 다시 은혜주의로 돌아갔다가 이러한 움직임을 반복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가면서 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도 보수와 자유 사이를 왕래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11절까지 보면 그게 바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님에게 끌려온 사건이에요. 예수님이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그 구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성경책을 보시면 그 구절 옆에 이러한 각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수천 권의 사본이 존재합니다. 원본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수천 권의 사본이 존재하는데 그 내용의 99%는 일치합니다. 다만 1% 정도가 사용하는 단어라든가 아니면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11절처럼 어떤 사본에는 삭제돼 있고 어떤 사본에는 포함돼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원본에는 그것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원래 있었는데 삭제한 것이냐, 원래 없었는데 추가한 것이냐. 

성 어거스틴은 그 구절이 원본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원래 원본에는 그 구절이 있었는데 일부 교회가 그것을 삭제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 구절을 삭제했을까. 그 이유는 초대교회의 도덕적인 분위기 상으로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 윤리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분위기가 굉장히 율법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러한 긍휼과 자비를 용납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원본에 있는 이 구절을 삭제해서 성도들에게 소개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저도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이 구절, 이 구절을 어떤 교회는 빼고 어떤 교회는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세월동안 다른 성도들도 과거 기독교인들도 성도의 윤리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떠나지 않는 문제와 그들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어느 경우가 해당되느냐. 둘 다 해당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복합적입니다. 그러므로 둘 다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순이에요. 한편으로는 주님의 용서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다고 죄인으로만 남아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더 이상 탕자로 살 수 없고 이제는 아들의 역할과 아버지 집의 일과 아버지에 대한 충성과 의리가 있어야 되는 것처럼. 그러나 잔치라는 것은 죄인이 돌아왔을 때의 잔치인 것이지 허구한 날 잔치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긴장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구원받았을까. 하나님이 나를 받으실까. 여기에 대해서 긴장하는 것은 결코 의심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전혀 고민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하나님 나는 의인이고 저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님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자기를 높이는 기도보다 세리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서이다 라고 자기를 낮추는 기도를 오히려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성경말씀에 의거해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될 필요가 있지만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유익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이제 구원받았으니 나는 이제 안전하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거기에 대한 굳센 믿음이 있어야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될 필요도 있습니다. Fear and trembling-두려움과 떨림.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과 가깝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우리에게는 늘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서 그릇 행하지 않고 빗나가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제가 여러분들께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자라나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알아야 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는 만큼 사람에 대한 지식도 늘어나야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알게 되면 사람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게 됩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교회 나오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행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에게 너무 무리한, 무거운 짐만을 지워 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가 돼버립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람만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인본주의자가 되고 휴머니스트가 됩니다. 그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건 남을 알라는 얘기가 아니고 자기를 알라는 얘기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성도라고 부르지만 그렇다고 천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 갈 때까지 육신을 입고 살고 이 세상에서 살고 땅을 딛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만 여전히 우리의 두 발은 땅을 딛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흙으로 지은바 된 것입니다. 흙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지만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의 소원과 육신의 욕심이 서로 다투고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50가 하나님이고 50가 인간인 것이 아니고 100 하나님이고 100 사람이었어요. 이것이 예수님의 신비, 성육신의 신비에요. 인자가 되신 하나님. sun of God and sun of man,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인간이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율법을 지켜야 될 필요가 있었고 예수님도 믿음으로 살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될 필요가 있었어요.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또 하나님을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이셨어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류를 대표하기 위한 것이요 동시에 인류 앞에서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다리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꾸었을 때 땅 위에 사닥다리가 있는데 그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은 것을 본 것처럼 예수님이 바로 이 사다리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 있는 땅과 하늘을 잇는 역할을 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느냐. 기독교가 타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이냐.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는 왜 필요했느냐.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오늘 본문 히브리서 5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제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1절 말씀에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여기에 제사의 필요성이 나옵니다. 제사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속죄하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제사가 필요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구약성경이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느냐. 제사가 없이는 사람이 죄사함을 얻을 수가 없고 사람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드리는 제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죄인을 대표해서 제사를 드리지만 본인도 죄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한 제사도 드리지만 자기를 위한 제사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3절에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집에서 살림을 도와주시는 분이 가족을 위해서 밥을 지을 때 자신을 위해서도 밥을 짓습니다. 반찬을 만들 때 가족을 위해서도 만들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만듭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먹어야 되니까.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제사장이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해서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4절 말씀에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부르심을 받았는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죄인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의 죄를 위해서만 제사를 드리는 게 아니고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종교성의 한계와 종교의 한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종교성이 뛰어난 선택받은 사람도 죄인이라는 사실은 다르지가 않아요. 그의 제사가 한계가 있어요. 그 종교성이 한계성이 있어요. 사람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문제가 있어요. 세상 사람들만 약한 게 아니고 자신도 약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한 목자요, 세상의 빛이요, 부활과 생명이요, 여러 가지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입니다. high priest,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종적이고 온전한 제사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희생으로 제사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는 늘 문제가 있고 한계가 있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는 흠 없는 분으로서 당신의 삶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이유요, 우리가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믿는 이유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죄사함을 받을 길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더 낫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better.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사장, 더 나은 언약, better sacrifices. 구약보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계시, 더 나은 제사장, 이것을 예수님으로서 정리하고 있는데 우리가 기독교 신앙과 타종교를 비교한다면 ‘더 낫다’라는 말로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타종교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비교한다면 ‘더 낫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종교든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선택받은 제사장들도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인간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더 나은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더 나은 것이 있을 때 덜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8절과 9절을 보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첫째는 모든 자에게 이제는 구별이 없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구별이 없습니다. 의인도 예수님 믿어야 되고 죄인도 예수님을 믿어야 됩니다. 모든 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은 잠재적으로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았는데 상실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구원, 변함없는 구원, 할렐루야. 민주주의에 모순이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 모순이 있다고 해서 기독교 진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