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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바른 이해(1) (막 8: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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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바른 이해(1) (막 8:27~34)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 

성경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일생과 3년 사역내용을 집중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하였는데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였습니다. 

이 마가복음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장에서 9장으로 갈릴리 중심의 사역 즉 병자 고침, 가르침, 천국을 전파하는 사역내용들입니다. 또 하나는 10장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16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주로 고난주간에 벌어진 사건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본문 마가복음8장은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준비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중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실 때 있었던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헐몬산 기슭에 위치한 도시로 알렉산더가 이 땅을 정복한 후 재건하여 이름을 파니아스(paneas)라고 지었습니다. 그 후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성읍을 헤롯대왕에게 하사하였는데 헤롯이 그 도시에 대리석으로 큰 신전을 짓고 성을 크게 확장하여 로마 황제의 이름을 기려서 “가이사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 후 헤롯이 죽자 아들 빌립이 자기 이름을 넣어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지로 인식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보더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역을 마칠 때가 되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가이사랴 빌립보 도시에서 이런 질문을 했는가 하면 이 도시에 대해서 사람들은 찬란한 도시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디도장군은 전쟁승리를 이 도시에 와서 개선 퍼레이드 벌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제왕의 도시요 승리의 도시요 찬란함의 도시로 로마의 중심 도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기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주님을 세례요한이 살아났다 하고 엘리야가 살아났다고도 하고 선지자 중 한사람이라고도 말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은 유대인들이 아직 예수가 메시야임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탄들도 벌써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막 1:24, 3:11, 5:7).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고 궁금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더 궁금한 것은 지난 3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한 제자들은 나를 누구라고 이해하는가 그것이 더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죽어야 합니다.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마 16:16)를 보면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예수님 마음에 아주 쏙 드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대답은 오늘까지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는 대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천국의 열쇠까지 주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무식한 제자로 생각하고 이해하지만 그 베드로가 예수님께 만족하게 칭찬받는 대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고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정확하게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대답한 직후 예수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1급 비밀의 말씀이었고 천기를 누설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31절을 보면 “이제 내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고 하였고 31절 끝 부분을 보면 “예수께서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비로소 감추어졌던 비밀스런 사명을 공개하셨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최후의 카드를 공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드러내놓고 예수를 붙잡고 항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16장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정색을 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졸지에 칭찬받고 천국의 열쇠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사탄으로 몰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사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이해 

뭐든지 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은 예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자꾸만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장차있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였습니다.(막8:31) 지금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예루살렘 행로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생각이 크게 다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으러 가고 있습니다. “이제 죽어야 하리라, 3일 만에 부활하리라” 

그런데 제자들은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보란 듯이 예수님이 크게 되고 기적을 행하여 마침내 군중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리라,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고생이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성공하게 된다, 너희들 이제 고생 끝났다.” 제자들은 그 대답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꾸만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그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좋은 리더십, 기적의 능력, 권위, 초능력 등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 시대에 왕 될 자격이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죽는다고 말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보란 듯이 기적을 행하면 모두가 박수를 치고 환호 받을 것인데 또 왕도 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우리 모두에게 기회가 올 것인데 자꾸만 죽는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행착오를 겪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항변 

시행착오 중 가장 큰 착오는 제자들의 오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나는 죽어야 하리라”고 하였고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절대로 그리할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죽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라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도 속으로 가장 불평스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3년 동안 왜 이 고생을 했는데 여기서 죽다니,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예수께서 잘 되어야 우리도 한몫을 할 수 있는데.” 제자들은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높아지게 되면 행동도 자기 혼자 마음대로 못하게 됩니다.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한사람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오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야 그 식솔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싫다고 포기하고 내려오고 사표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독재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타의에 의해서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모 월간잡지를 보면 “명계의 대화”라는 픽션이 나옵니다. 박정희,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명계에서 서로 만나 대화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는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는데 내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명분도 없었고 마땅한 이유도 없어서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날 내려오도록 기회를 줘서 얼마나 어깨가 가벼운지 모릅니다”하고 대답을 합니다. 노무현대통령도 “그동안 대통령 못 해먹겠다.” 그만두고 싶다고 한 말들은 진심이었습니다, 나는 탄핵 때 정말 탄핵안이 가결되어 통과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싶었는데 다시 하게 되어 낙심 했습니다”고 대답합니다. 

지금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에 제자들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예수님 한 몸에 기대를 많이 걸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만 하면 우리들은 모두 한자리씩 할 것으로 학수고대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조차도 예수께 찾아와서 이다음에 내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까지 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시행착오들 입니다. 예수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제자도 정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제자의 도를 정의해 주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크게 환영받고 예수님은 왕이 되고 우리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는 누구인가”, “제자는 어떤 역할,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34절부터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부탁을 두 가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모두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힘든 일입니다. 이 말은 자존심이나 체면이나 자기를 비하하라는 뜻이 아니고 또 금욕하고 자기욕망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적이 되지 말고 내 의지를 내 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왜 기도가 필요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매일 밤이면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했는데 그것이 자기부정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자아가 너무 강한 시대입니다.  오늘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너무 힘든 시대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되기가 힘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의미를 아십니까.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최대의 혐오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죄수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까지 갔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지금까지 저지른 행위나 죄를 뉘우치고 이제 로마에 충성하겠다는 복종하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나는 없고 로마에만 충성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말은 지금부터 나는 나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이나 제자도는 나를 버리는 생활입니다. 내가 강하면 예수가 축소되고 작아집니다. 내가 부정되어야 예수가 부각되고 크게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축소될 때 예수가 커지고 내가 부정될 때 예수가 긍정되고 인정됩니다. 제자는 스승 앞에서 작아져야 하고 축소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승이 크게 부각됩니다. 그것이 제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내가 복을 받고 건강해지고 형통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그런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복도 주어집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그것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어머니조차 예수께 찾아와서 아들을 위해서 청탁을 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겨우 그 수준이라면 그것은 예수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만 부각되게 됩니다. 그것이 제자의 모습이고 정신이고 삶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너무 내가 강하고 부각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부담되어도 이 신앙의 길을 떠나고 교회를 버리고 조금만 희생이 요구되면 쉬운 교회로 찾아갑니다. 교회 건축을 한다고 하면 회피하고 다른 교회로 가 버립니다. 가보니까 그 교회도 건축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다 지은 교회로 갑니다. 가보니까 그 교회는 교회 건축하느라 진 빚을 갚기 위해 헌금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삶에도 신앙생활에도 내 몫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내게 주어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 십자가를 내가 회피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져야 합니다. 내가 안한다고 그 일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운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통해서 반드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나는 복을 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내게 주어진 소명들, 할 일을, 직분을 잘 감당해 내는 삶입니다.  

 저도 이 전도자의 길을 많이 회피해 보려고 했었습니다. 이 전도자의 길에 가장 힘든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초라함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자의 길은 초라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사들은 결혼하기도 힘듭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결혼은 해야 하겠는데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겠다는 사람은 모두 폭탄입니다. 그런데 맘에 드는 사람은 도망갑니다. 그러니까 모처럼 각오하였다가도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길을 가려면 세상의 기준에 맞추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길 가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초라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원래 초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도자의 길을 가면서 초라해 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초라하다, 가난하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빈천하고 초라하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명한 자요 유식한 자요 다 가진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 확실한 자아상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바울 자신도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대 라이벌이었던 아불로는 아폴로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화려하게 웅변하고 박수를 받을 때 바울은 박수도 없이 소아시아의 비탈길을 걸으며 전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제자의 길은 세상 기준에 맞추려고 하면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처럼 융통성을 크게 발휘해도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융통성을 크게 발휘하면 이 길의 의미가 퇴색하고 빛이 바랩니다. 이 세상은 때로 적당히 타협해야 살아가기가 쉬운 세상입니다. 철저하게 십자가를 지는 삶은 왕따 당하고 내 몰리기도 합니다. 그것을 감수할 수 있어야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성공의 지렛대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숫한 시행착오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이해함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제자 됨은 나를 부인하는 일이고 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예수는 성공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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