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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용서의 십자가 (눅 23: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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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십자가 (눅 23:33~3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눅 23:33-34). 

I. 본문의 배경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 중 첫 번째인 본문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광경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이 기도는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지 보여주는 광경입니다. 

II. 십자가 처형 

원래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앞에는 예수님이 사형언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매우 불의한 것이었습니다. 재판장이었던 빌라도 역시 그것을 알았지만 수많은 인파의 요구에 굴복하여 두려움 속에서 그릇된 판단을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흔한 사형집행 방법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종교적인 음모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종교적인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주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거나, 억울한 죽음이라고 항거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지도자들의 노림수였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매우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적용되지도 않았고, 오직 상습적으로 살인을 하거나 반란을 꾀하는 치명적인 범죄자만이 그 형을 집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X자형과 T자형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두 개의 막대기가 겹쳐진 모양의 십자가가 있는데 어떤 경우든지 먼저 세로 막대를 세우고 죄수를 가로 막대로 못 박아 도르래로 꾀어 높이 든 다음, 이미 세워진 세로 막대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두 다리에 믄 못을 박아서 세 개의 대못으로 사형 받을 사람들을 고정하였고 죄수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 최대의 고통을 받도록 만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십자가 형벌에는 두 가지 규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죽도록 채찍에 맞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는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형벌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대신 지우는 것도 심각한 모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위에 조롱까지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신 후 가시 면류관을 눌러 쓰시고, 온 얼굴에 피가 흥건한 가운데 어깨 위에는 붉은 보자기를 씌워 왕의 홍포를 흉내 내었고, 손에는 갈대를 들려주어 임금의 손에 들린 지휘봉을 흉내 내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멸시와 욕을 당하시며 십자가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그 끔찍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 형벌을 당하실 때 묵묵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끌려가신 것은 사단도 모르고, 인간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한 커다란 구원의 길을 예수를 저주하심으로 열어주신다는 대속의 지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악인에게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승복해서 자기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바치셨으니,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처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많은 진리의 요소들을 하나로 집약할 때 우리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사건들이 하나를 향해 달음질 쳐 왔으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신 죽으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불꽃처럼 온 하늘에 퍼져 신약시대에 나타났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신비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혜는 천사들에게도 감춰진 것이었고 오히려 인간을 통해 이루어져 가는 구원의 역사의 전개를 통해 천사들조차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공경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성품의 펼쳐짐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발견하는 것만큼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우리를 향한 사랑의 깊이를 아는 것만큼 나를 향한 이 사랑이 온 인류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예전에 우리가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대의인 것입니다. 


III. 예수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허락하셨을 때 예수님은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큰 고난 속에서 결국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셔야 했던 상황까지 이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 받아야 할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속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A. 죄사함을 빌으심 

예수님은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간악한 로마의 군인들을 향한 것이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며 그분의 생명을 요구했던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게 만들었던 우리 같은 모든 죄인들에게까지 해당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 육체의 고통보다 큰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당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고통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이 용서 받지 못한 모든 인간들에게 떨어질 것을 생각하셨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의 아픔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인류의 영혼에 대한 고통에 몸서리 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의 군인들이나 그렇게 해 달라고 요구했던 유대인 모두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불성설의 핑계를 대면서까지 우리 편에 서셨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저희는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끔찍하게 죄 지은 인간 사이에서 마치 양 편을 향하여 모두 잘못이나 하신 것처럼, 아버지께는 우리의 죄의 용서를 비셨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아프도록 일평생 가르치신 것도 모자라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지 보여주심으로 완악한 우리를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우리는 과거의 아름다운 신앙의 간증으로 오늘을 살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과거의 신앙을 가지고 살았고, 오늘은 오늘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매일 그곳으로 돌아감 없이는 누구도 오늘날 주님의 크신 사랑에 부합하는 성도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을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배우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깊이 감격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B. 용서하시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간절히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빌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이 죄를 짓고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줄도 몰랐던 그때에 그들이 모르는 임박한 심판을 아시고 죄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아버지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비셨으니 우리도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영혼에 대하여 예수 홀로 우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는 왜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고 아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 같이 쓸모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고결하신 몸을 십자가에서 찢고 피 흘리셨을까요? 또한 성령님은 무엇 때문에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을 오늘도 녹여서 우리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가 등졌던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감화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바로 우리의 죄를 통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에 지속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라도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영혼의 힘이 있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이어지도록 만들고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이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물 붓듯 부어지도록 하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참으로 기이한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저주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오늘 우리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기독교의 표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은 거기서 끔찍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놀라운 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IV.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사랑 

흔히 두 사람이 사랑할 때 사랑하는 마음이 없거나 적은 사람은 언제든지 그 관계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 희생보다 작다고 판단될 때 그 관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성향 때문에 그 관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을지라도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은 죄와 지금도 주님을 거스르고 사는 반역을 고려한다면 벌써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끊으셔야 했을 텐데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끝없는 사랑의 성향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없는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것은 세상 권력의 측면에서는 그분이 힘이 없음을 보여주지만 끝없는 사랑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간의 죄와 모든 허물을 능가하는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하고자 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으로 물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오히려 듣지 않는 우리를 녹이시는 대신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의 진노를 푸시고, 우리 불쌍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마치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으시는 것처럼 눈물로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거룩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이 간절한 중보의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 죄인을 향해 품었던 진노의 마음을 더시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돌이키시기를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리는 것처럼 바꾸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용서는 우리의 지난 죄를 단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과 우리 사이에 죄가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누리며 살도록 부르시는 초청하시는 음성인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 것을 일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여러분은 이렇게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큰 의무요, 행복인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이 큰 사랑이 잊히는 곳 마다 교회는 무너졌고 그리고 생명의 샘은 말랐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이 복음이 조국의 교회에 변함없이 울려 퍼져 우리와 이웃들이 이 오래된 복음을 들으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나는 끔찍한 죄인이요, 한때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알고 고백했던 그 순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알고 십자가 사랑에 감격한 교인들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겸손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를 압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아 오히려 감사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빚진 자임을 깨달으십시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죽이시기까지 용서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계속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과도 사랑의 관계를 계속하기 위하여 예수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또한 지체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가 없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의 교통이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심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에게 오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일이 힘들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감당하는 일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우리는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앞에서 그분이 당하신 저주의 고난이 내가 당하여야 형벌임을 깨달았을 때 그 때부터 이후에 우리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라.”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때문에 덤으로 사는 우리들을 낙원에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아직까지 이 땅에 남겨두시는 것은 그 십자가 사랑의 마음을 품고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평화의 도구로 살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여기 우리를 남겨두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과연 십자가가 있습니까? 우리의 생애에 과연 고통이 있습니까? 마지막 살 한 점,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죽었으니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너희는 서로 용서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고난의 주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이 음성 앞에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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