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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초대받은 사람들 (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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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사람들 (마 9:9~13)
 

3월을 맞이하면서 새봄과 함께 우리는 부흥사경회와 창립기념주일을 은혜가운데 보냈습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사순절(四旬節)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생애와 고난, 그리고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보내는 절기입니다.  주님의 수난 없이 영광이 없고, 죽음 없이 부활은 없기에 교회역사에서 어느 시기보다도 엄숙하고 경건하게 보내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영어로 '렌트(Lent)'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고대 앵글로 색슨어 '랭(Lang)'에서 유래된 말로서 독일어의 '랜츠(Lenz)'와 함께 '봄'을 뜻하는 말입니다.  

봄은 만물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소생,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순(旬)'이 10일이기에 사순절은 40일 동안 보내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40일 동안 지키는 이유는 성경에서 '40'이란 수가 매우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을 금식하며 율법과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의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40일간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40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하셨으며, 부활에서 승천까지도 40일이 걸렸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40일은 고난과 회복과 갱신의 수입니다.  그래서 40일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거슬러 올라가 지키는 절기입니다.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그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부릅니다.  금년의 달력으로는 지난 2월 17일부터 시작하여 4월 3일까지입니다.  이미 2010년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이번 주가 지나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으로 이어집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과 죽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왜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를 밝힙니다.  본문도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왜 오셨을까요?  왜 주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을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그 이유를 하나 밝혀주고 있습니다.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과연 여기에서 말하는 죄인은 누구일까요?

첫째는 실질적인 죄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가운데 중요한 사역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하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주님은 12명의 제자를 불렀습니다.  본문은 제자가운데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마태의 본명은 레위였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 마태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마태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감격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죄인은 지금 마태와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당시의 죄인들은 비율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그중에서 세리와 창기가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람들과 식사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당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는 것은 가까운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하셨고,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실질적인 죄인들입니다.

창기가 죄인이라는 것은 오늘날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죄인이 된 것은 당시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나라가 로마의 속박을 받던 때에 팔레스틴 땅에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식민지시대에도 친일파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중에 선봉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세금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정당하게 세금을 징수하면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힘을 업고 심한 경우 착취까지 했습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세리들은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 독립군이나 로마를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을 색출하는 일도 했습니다.  마을과 도시에서 정교한 조직을 통해 사람들을 관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 같지 않는 세리들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고, 그들을 만나면 피하였고, 그들과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리들의 행동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에게 큰 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예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마태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시선을 달랐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죄를 용납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이런 죄인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고, 용서와 은혜가 절실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창기도, 세리들도, 아니 더 악한 죄인도 가까이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실제적인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정죄를 당하고, 용서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주님은 긍휼과 자비로 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용서받고, 그들도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죄인들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죄인들이 있습니다.  김길태와 같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극악무도한 죄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죄는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지난 한주간도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말과 행동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난 죄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크고 작은 죄를 지었습니다.  설령 윤리나 도덕적으로 깨끗해도 성경은 선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모르지 않을진대 선을 행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큰 죄인들입니까?  우리는 실제적인 죄인들입니다.  

창기와 세리 못지않은 죄를 짓고 사는 죄인들입니다.  바로 이런 죄인을 부르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  우리는 실질적인 죄인입니다.  하지만 죄를 지었다고 해도 자백하면 됩니다.  인정하고 주님께 고백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죄를 자백하고 인정하여 용서받고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는 원래 죄인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죄인은 실제적인 죄인만이 아닙니다.  원래 죄인들도 부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보통 실제적인 죄를 '자범죄, 혹은 고범죄'라고 말하고, 원래의 죄를 '원죄'라고 말합니다.  원죄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아예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아담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실제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인간은 죄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롬5:12-14)  

아담이후에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인간에게는 악한 본질이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만들었지만, 타락한 이후 인간은 더 이상 선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3:9-18)

여러분, 성경은 이처럼 죄인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다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인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런 성경의 진리를 알고, 신앙의 깊은 세계로 점점 들어갈수록 무엇보다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다윗과 같은 믿음의 영웅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죄 때문에 몸부림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3-5)

 

주님은 바로 이런 원래의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기에 예외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실질적인 죄에서 자유한 사람이라도, 원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예 죄인으로 태어나는데 누가 떳떳할 수 있습니까?  옛날 사람이나 현재 사람이나 이 땅에 생명으로 태어나 한평생 인간으로 사는 모든 자는 죄인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주님은 부르시는 것입니다.  나의 근원적인 죄를 해결하여, 의인으로 만들기 위해 주님은 오셨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만들기 위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물과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며 감사와 영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의인 같은 죄인입니다.

의인 같은 죄인은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말합니다.  그들은 실제적인 죄를 짓지 않았다면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창기나 세리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늘 당당하고 떳떳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원래 죄인에 대해서도 복음을 알지 못하기에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원래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주의 복음이 스며든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끊임없이 자기를 살피고, 부족함을 보는 사람에게 임하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원래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믿지도 않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을 결코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여기 지금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바리새인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인처럼 보이지만 죄인이고, 창기나 세리보다 더 큰 죄인인 그들을 향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14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제사는 원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혹은 감사드리기 위해 드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당시에는 이런 제사가 형식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율법의 의무를 지키는 것보다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경고했습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인용하여 긍휼을 베풀기 위해 지금 실제적인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인처럼 보이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되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형식만 지키면 의인이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의인으로 생각하면서 죄를 짓는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도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보이고 의인처럼 보이지만, 속은 죽은 송장과 같이 더 큰 죄인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이런 주님의 소리가 귀에 거슬려 거짓증인을 세워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였지만 진짜 죄인입니다.  어쩌면 세리나 창기보다 더 악한 죄인들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우월하고, 자기만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자기를 높이고, 남을 낮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겸손은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교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넘어짐의 앞잡이임을 시대마다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교만한 사람치고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교만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스스로를 망하게도 하지만, 무엇보다 교만한 사람을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그들을 깨우치고, 진짜 죄인인 것을 알게 하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의인 같은 죄인은 옛날 바리새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의인 같은 죄인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거기에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는 실제적인 죄를 짓지 않았기에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죄인인 것을 받아드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그래서 남을 판단하고, 그래서 조그만 죄가 드러나면 판단하고,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 같은 죄인입니다.  이것이 지금 나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위하여 주님이 오셨습니다.  의인 같은 죄인을 부르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문제를 제기함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방해하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할 의도를 가지고 계략을 세운 것입니다.  신명기 22장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돌로 치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율법을 어긴 죄목으로 고소를 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율법대로 그녀를 돌로 치라고 말한다면 죄인을 사랑하고 긍휼과 자비를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행위가 됩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근엄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어른이나 젊은이까지 모두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죄인이고, 원래 죄인이며, 의인처럼 보이는 더 큰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을 부르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죄인임을 안다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지금 나를 초대하며 부르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모든 죄를 용서받고, 날마다 은혜 안에서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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